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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갑에서 공개한 재일교포 김주성의 북송 스토리

1. 소개

1963년 일본 도쿄 출생.

재일교포이면서 동시에 북한이탈주민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2. 상세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고 어릴 때부터 오사카에서 자랐으며 조총련 계열 조선학교를 다녔다. 1979년 북한이 재일교포 북송을 추진할 당시 조부모[1]와 함께 만 16살 고등학교 1학년 때 북한으로 이주했으나[2], 가자마자 너무나 낙후된 모습에 실망을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이정도일줄은 상상도 못했다라며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낙장불입. 더구나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이라고 차별받았던 것보다, 북한에서 더욱 더 심하게 일본인이라고 욕하면서 주변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 후 조부모는 사망

북한에서 재일교포 학생들만 모여서 사는 숙소에서 친구들과 지냈다. 북한에서 사범대학에서 체육(배구)을 전공하고[4] 보통은 중학교로 발령을 받아야 하지만 일본에 계신 부모님이 보내준 세이코 손목시계를 뇌물로 써서 청진경공업대학 교수로 발령 받았다.[5] 이후 평양 직장을 찾아 작가동맹에서 경리 업무를 맡았다.그러면서 단편소설도 몇 편 발표 했다. 대부분 일본에 계신 부모님이 보내준 돈이나 물품으로 뇌물을 써서 동원이 없는 편한 직장과 부서만 찾아서 다녔는데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당원이 아니니 학급반장도 맡지 못하는 걸 보고 당원이 아니면 애들 장래를 담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빨리 당원이 될 수 있는 힘든 노동 현장 직장을 찾아 도시시설사업소에 가서 가로등 켜고 끄는 일(이마저도 하루에 2번만 일하면 되는거라 편한걸 찾아갔다) 살수차 운전도 했다

이후 원하던 당원이 되었고 새로운 직장인 북한국가과학원(한국으로 치면 KIST 정도)에서 근무한다. 문과출신이라 과학원에서 찾은 일은 일본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컴퓨터로 외국과학정보를 찾아 번역해서 연구원에게 제공하는 일(이것도 일본에서 중고컴 몇 대를 들여와 기부하기로 하고 맡은 직책)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게임이나 인터넷으로 남한정보를 찾아 보고 놀았다고 한다.

2003년 북한 사정이 어려워지자 배급이 끊기고 각 기관은 자체적으로 먹고 살아라라고 지시가 떨어지자 연구소를 개조해서 PC방[7]을 운영하기도 하는 등 나열하면 끝이없다. 여담으로 PC방은 장사가 너무 잘돼서 애들이 학교를 안오고 PC방으로 몰리자 옆 학교에서 민원이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이 전자오락이 전국적으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당의 지시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북한의 납치문제로 북한 압박정책으로 일본으로부터 입금과 물자조달이 막히게 되자 어머니에게 지원 받아 살던 생활방편이 어려워지자 2007년도에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북을 하고 어머니가 있는 일본을 가기 위해 일본 영사관에 전화해서 귀환을 요청하고 기다리다가[8] 중국의 변방대에게 체포되어 북송된다 나중에 보위부로 끌려갔을 때 동행의 폭로로 본인이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것이 더해져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게 된다. 온성 보위부로 끌려가 6개월간 수감되어 영양실조로 죽을 지경까지 갔다가 뇌물을 주고 나오게 된다.

2008년 초 중국으로 재탈북하여 일본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연락했으나 탈북한 아들의 귀환을 거절하셨다.[9] 그래서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귀순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사이버한국외대 일본어학과를 거쳐 북한대학원대학교을 졸업했다.

현재는 통일부 통일교육원 전문강사, "(사)배우고나누는무지개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2020년 유튜브에 김주성TV를 개설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XagiX8NdRQeRb7Zn3U8UFQ/featured

여담

처음에 자신이 북한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완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12] 어느 정도였냐면 니가 북한에 간다면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까지 할 정도였는데 결국 갔다. 북송되는 날 배를 타고 가며 항구를 봤는데 항구 구석에 아버지가 자신을 보러 온 걸 발견했다고 한다. 이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한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썰을 풀며 울먹이는데 보는 시청자도 가슴이 아픈 장면.

북한에 도착해서 배에 내리고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는 유리창이 없고, 차 매연이 안으로 풀풀 들어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지만 문제는 이미 늦었다!

할아버지의 본적이 경상남도 김해시라서 탈북하고 호적을 파니 부모님의 이름이 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고... 어찌보면 출신 자체가 북한, 남한, 재일교포에 모두 해당되는 사람인 셈이다.

온갖 감언이설로 재일교포를 북송시킨 북한이지만 정작 본인이 북한에 정착해서는 왕따와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13] 애초에 북한은 남한에 밀리는 노동력 충당과 재일교포의 재산이 필요했지, 자신들의 판타지급 세뇌에 속지않는 재일교포 자체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탈북하고 일본에 돌아갔는데 아버지의 무덤이 무연고 무덤이 되어버려서 없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이 얘기를 하는데 설움에 복받쳐 말을 잇지를 못한다.

처음 남한에 정착했을 때 작은 것 부터 해나가자는 생각으로 100만원 모으기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00만원을 달성했을 때 베개로 삼아 눈물을 흘리며 잤다고...

추석이 되면 꼭 임진각 바람개비 동산에 간다고 한다. 인터뷰

개인적인 소망으로 탈북자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게 꿈이라고 한다.

재일교포 출신답게 일본어가 매우 유창하다. 북한에 있을 때도 비공식적으로 재일교포들만 모인 자리에서는 항상 일본어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14]

오사카에서 자랐기 때문에 일본어를 할 때 칸사이 사투리를 사용한다.

일본에 재일교포 어머니와 친척들이 살고 계신다. 김주성이 북으로 떠난 이후 재일교포 어머니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셨으며 재혼하셨고 이부 동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한국에서 탈북민 아내[15]와 결혼해서 딸[16]이 태어났다.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의 주역 오청성을 양아들 삼아 자기집에 데리고 같이 산다.[17]

본인이 워낙 북한에서 고생을 해봤던지라 방송이나 유투브에서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줄때 공감해서 눈물을 흘릴때가 종종 있다.

북에서 고통을 많이 받은지라 북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눈물이 고일 정도로 보인다.

언변이 상당히 좋다. 말을 조리있게 잘한다.

상당히 많은 직업을 가져보았다. 북한에서는 국가과학원 소속 연구원, PC방 운영, 일본어 번역가, 교사, 소설가, 배구선수, 대학교 교양체육 강사, 가로등 소등 용역 등으로 일했다. 남한에서는 북한자유연맹 이사, 국제PEN망명작가센터 이사, 방송인, 작가, 초청 강연자, 유튜버 등으로 일하고 있다.

FNN프라임온라인에 당신이 모르는 북한 《あなたの知らない北朝鮮》이라는 동영상으로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해 일본어로 코멘트를 올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