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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MBC 성공시대 현대 정주영 회장네 모습 프로필 출생 사망 신체 학력 부모 형제 자매 자녀 인간성 및 일화 경쟁자들 김우중 이병철 신격호

정주영 프로필 출생 사망 신체 학력 부모 형제 자매 자녀 인간성 및 일화 경쟁자들 김우중 이병철 신격호

출생

1915년 11월 25일

사망

2001년 3월 21일 (향년 85세)

신체

175cm, 72kg, AB형

학력

송전공립보통학교 (졸업)

종교

무종교 → 개신교

부모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형제자매

남동생 정인영

남동생 정순영

여동생 정희영

남동생 정세영

남동생 정신영

남동생 정상영

배우자

변중석

자녀

장남 정몽필

차남 정몽구

삼남 정몽근

장녀 정경희

사남 정몽우

오남 정몽헌

육남 정몽준

칠남 정몽윤

팔남 정몽일

차녀 정정인

삼녀 정정임

1. 개요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보기나 했어?"

정주영을 상징하는 유명한 명언.

https://youtu.be/gqu11flSYEs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그룹의 창업자이자 초대 회장으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함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회장이고 범현대가 특유의 기업 문화 때문에 왕회장이라는 별칭이 있는 인물. 현대그룹의 괴물같은 성장이 이뤄지던 1970년대 전성기 시절에는 다른 재벌들도 현대가 모든 사업을 수주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건설 사업 의뢰가 들어온 정주영에게 사업을 나눠 받는 수주, 사실상의 하청을 받으러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고 현대의 하청회사로 시작해서 중견기업이 된 회사들이 많아서 진짜 회장들에게 왕 대접을 받던 것이다.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일군 역사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처절한 가난 속에서 이루어 낸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화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이다. 현대가만큼 유명한 삼성의 이씨 일가는 철저하게 정주영 개인의 자수성가로 성장한 현대와 달리 예전부터 이미 부를 가지고 있던 집안이었던지라 인기도가 상대적으로 저조하다. 애초에 삼성의 기반부터가 이병철 전 회장이 본인의 부친에게서 받은 지원에서 일으킨 사업에서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큰 기업을 이루고, 대한민국 최고의 부호가 되었음에도 평생 동안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며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기업인 중 하나이다. 회장 재임 시절 한 번은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는데,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어서 어이가 없어진 도둑이 "에이~ 무슨 왕회장 집이 이래?" 라고 말하고 그냥 가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1998년에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까지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금강산 관광은 2008년 7월에 터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정주영이 추진한 대북사업이 금강산 관광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2006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도 포함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들을 선정한 것이며, 리스트에 포함된 한국인은 정주영, 강철환, 백남준 총 3명이다. 또한 한국갤럽이 2019년에 조사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리스트에서 기업인 신분으로는 최고 순위인 전체 6위에 오르기도 했다.

단순히 경제인을 넘어서 대한민국 건국 이후 대통령(들)을 제외한 다른 인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인정받는다.

1980년대 현대가의 아침식사 풍경(왼쪽 회색 자켓이 정주영)

3. 한국 경제 성장의 전설[편집]

미군정 말기인 1947년에는 서울에서 건설 회사를 차렸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사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정주영 본인의 성실함과 근성에 한국전쟁 시기에 주한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손아랫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주한미군 관련 공사를 거의 싹쓸이하면서 창립 10년 만에 전국 10대 건설사로 성장한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에 UN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주영은 받아들였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 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받았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정주영의 가장 큰 시련은 바로 전후에 수주했던 고령교 공사였다. 1935년에 처음 개통됐지만 6.25 전쟁 때 폭파되어 1953년부터 현대건설이 복구에 나서게 되지만, 사실상 말만 복구 공사지 실제로는 신축 공사에 가까웠다. 당시 복구 비용은 5,478만 환(현재 약 547억 원)에 달했다. 더군다나 이는 당시 정부에서 발주한 공사 금액 중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금액이었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큰 공사를 한 일이 전무한 데다가 건설 장비도 부족했고, 애써 박은 교각은 급류에 휘말려 사라져 버리는 사고까지 일어난 데다가 물가도 자꾸 뛰어올라 인부들에게 줄 월급마저 줄어 인부들이 파업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사업하는 사람은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라 말하며 막대한 사채를 쓰고[10], 동생 정순영의 20평짜리 기와집과 매제 김영주의 20평짜리 집, 옛 자동차 수리공장 자리까지 팔아가면서 그 모든 자금을 공사에 쏟아부어 1955년에 완공시켰다.[11][12]

그렇게 점점 사업 규모를 확장하여 현대그룹을 만들어낸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과 축척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을 돌았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지시했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봤지만 이번만은 해결책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라고 했다 한다. 아래의 일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해외 온갖 곳을 돌며 허풍을 쳐서라도 어떻게든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고자 했던 정주영 회장의 눈물겨운 스토리인 것이다.

정주영은 영국에서 바클레이스 은행과 4,300만 달러 차관 도입을 협의했지만 은행의 최종입장은 거절이었다. 그 뒤 정주영은 1971년 9월에 바클레이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의 회장인 롱바텀을 찾아갔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의 은행에게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거북선 이야기가 나온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라며 우리는 할 수 있으니 믿어달라고 설득하여 추천서를 받아냈다. 그럼에도 바클레이스 은행에서는 "배를 구매하겠다는 사람을 먼저 찾아와라. 배 주문서를 가져오면 차관을 빌려주겠다." 라고 얘기했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13]의 처남인 리바노스가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26만톤짜리 선박 수주계약을 따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준다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리바노스도 그의 말을 듣고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일종의 도박을 건 것이다. 정주영은 그에 대해 "나보다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보증을 서줘서 바클레이스 은행에서 차관을 빌렸고, 정주영은 "우리가 지금 조선소는 없지만 배를 계약해주면 그걸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은 뒤 배를 만들어 주겠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현한 것이었다.

그 뒤 정주영은 1972년에 울산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조선소 건설 과정에서도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자서전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밤에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다가 길에 쌓인 자재 더미를 피하려다가 차가 전복되어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익사할 뻔한 사건을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차에서 금방 빠져나왔고 현장에 있던 직원들의 신속한 구조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길에 방치한 자재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이 다름 아닌 회장이었다는 사실을 안 직원들은 모가지가 날아갈 생각에 벌벌 떨었다고. 하지만 정주영은 되려 물이 참 시원하다고 농담을 던지며 그 직원들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울산 조선소에서 진수하는 첫 호선도 정회장이 직접 지휘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국내에 내로라 하는 선장들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서 선뜻 시운전을 안 맡으려고 해서 본인이 직접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소의 완공과 함께 유조선이 건조되어 나오는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는데, 도크가 부분 완공되면 그 자리에 바로 철판을 대어 배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하여 도크와 배를 동시에 만든 것이다.[14]

서산간척지 공사 당시 특유의 뻘지형으로 인해 매립이 잘 안되자 큰 폐선 두 척을 착저시켜 둑으로 이용해 매립공사를 한 후 폐선을 분해해 판매한 정주영식 공법으로 유명하다. 이 공법은 나중에 서해에서 조수간만으로 인해 방조제 막바지 공사가 지연 되었을 때[15]나 홍수시 긴급 제방을 만들 때 등으로 응용되었다.

알파 엔진을 개발할 때의 일화도 유명한데, 미쓰비시의 구보 회장이 로얄티 반값 할인을 조건으로 연구소를 닫으라고 요청했을 때 성공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여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개발 엔진인 알파 엔진이 탄생했다. 이런 조건을 내거는 걸 보니 분명히 해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후일 밝힌 바 있다.

당시는 오일쇼크로 인해 중동에 돈이 엄청나게 몰린 상태였다. 그래서 한국의 건설사들은 과감하게 중동 시장에 진출했는데 그 선두에는 현대건설이 있었다. 타국 건설사들이 합리적으로 100만 달러를 입찰하면 현대건설은 절반도 안 되는 40만, 30만 달러를 적어내는 식으로 공사들을 따냈다. 결과물도 선진국의 건설사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 오일머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크게 도약시켰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는 수주 금액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예산의 25%에 달할 정도로 대형 공사였다. 정주영은 공사비를 아끼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든 기자재를 마련해 바지선에 실어서 주베일까지 옮기기로 결정했다. 쉽게 생각하면 커다란 뗏목에 기자재들을 나누어 담고 앞에서 큰 배가 끌면서 12,000km를 달려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태풍이 자주 부는 필리핀 해협, 인도양, 걸프만 등에서 얼마든지 난파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천운으로 이 계획이 잘 실행되었다. 일이 잘못 되었으면 현대그룹은 없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산업 진출, 조선소 건설, 주베일산업항 건설 등 정주영 회장은 사운을 걸고 이루어 낸 일들이 많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일등 공신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경쟁 도시는 일본의 나고야였는데,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회에서는 비싼 시계를 IOC 위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홍보를 했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IOC 위원들이 머무는 숙소에 꽃바구니만을 돌리면서 홍보를 했다. 승산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막상 다음날 리셉션에서 각국 IOC 위원들은 시계보다 꽃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 측 유치단에 관심을 보여서 일본 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주영은 물량보다는 성의로써 친밀해지자며 과감히 밀어붙였고, 결국 최종 투표에서는 서울이 나고야를 52-27로 누르고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명박의 자서전에서는 정주영은 사업가 시절에 정치인들이 기업인들의 단물을 빼먹으면서도 기업인을 무시한다고 깊이 상심했으며,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해 이러한 인식을 바꿔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은 걸프전 발발로 인한 이라크 건설공사 수금 미수로 물러나고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얻은 인기를 발판삼아 정주영이 미워하던 민자당에 입당, 같은 14대 총선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인간성 및 일화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무척 급했다.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하교할 때 신발을 신는 시간이 아까워 발에 걸친 채로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삯이 없었다. 망설였지만 배가 있는데 타지 않는 것이 바보같아 돈도 없이 타버렸다. 목적지에 다다라 돈이 없는 것을 안 사공에게 따귀를 얻어맞았지만 오히려 배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일화에 따라서는 뱃사공이 따귀를 때리고 '후회되지?'라고 묻자 정주영은 '예. 후회되네요. 따귀로 배삯을 치를 수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탈 걸 그랬어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농부가 되기 싫어 집을 뛰쳐나온 그를 아버지가 데리러 왔다. 결국 아버지에게 설득당해 귀향하기 전, 서울 구경이나 하자며 창경원을 갔다. 입장료가 아까웠던 그의 아버지는 "나는 시골에서 호랑이 많이 봤어. 너 혼자 다녀와." 이랬다고. 심통이 난 정주영은 "아버지가 안 가면 저도 안 가요!"라고 버티면서 결국 부자(父子)는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창경원 동물원 구경을 했다.

쌀가게에서 일하기 전에는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일을 하였다. 합숙소에서 인부들과 함께 잠을 청하는데 빈대가 들끓었다. 빈대를 피하고자 긴 탁자를 가져다 놓고 그위에서 잠을 자는데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와 피를 빨았다. 그래서 이번엔 냄비에 물을 떠다 탁자 다리를 담그고 잠을 청했다. 그랬더니 빈대는 포기하지 않고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점프하는 수법으로 피를 빨려고 들었다. 빈대에게서 끈기를 배웠다. 이 때문에 그룹 임원 중 일처리가 미숙하거나 근성 없는 업무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 "에라이 빈대만도 못한 녀석아!"(...)라고 구박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아직 해방되기 전 정주영이 자동차 정비소인 아도서비스를 운영할 때였다. 한 직공의 사소한 실수로 공장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정주영은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잃었다[28].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와 공장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본 정주영은 탄식했지만 곧 맘을 가다듬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야 괜찮아! 어차피 건물이 낡아서 헐어버릴려고 했으니 철거비 굳은 셈이지. 자, 기운차리고 그 돈으로 막걸리 파티나 하자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의 일이다. 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박정희와 독대하던 때였다. 당시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일하느라 너무나도 피곤했던 정주영은 박정희가 말하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몇 분 후 화들짝 깨어나 박정희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너무나도 부끄럽고 두려웠다. 하지만 박정희는 정주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정사장, 피곤한데 내가 너무 미안하오" 그 이후 자신도 현장을 둘러보다가 졸고 있는 직원을 보면 왜 졸고있냐 라는 책망대신 "피곤하지? 미안하네" 라며 격려를 했다고 한다.

포드와 합작해 자동차를 만들려던 때의 일이다. 한국에 온 포드쪽 사람들과 포드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가 고장이 났다. 포드쪽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차니 자신들이 고치겠다고 했으나 고장난 원인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정주영이 공구 등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고쳤다고 한다. 포드쪽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정주영은 자신이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할 때 포드차도 고쳤다고 말했다. 이것은 현대가 포드와 합작에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현대에서 시멘트를 생산할때 직원들이 정주영 회장의 별명인 호랑이를 상표로 하였다. 그래서 현대 시멘트(현 한일현대시멘트)가 호랑이표 시멘트로 불리며 시멘트 포장지에 호랑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박정희에 대한 과잉충성 으로 목이 잘릴 위기를 구해준 적이 있다. 1972년 여름에 대통령 하계 휴가를 앞두고 평소 이용하던 진해 별장을 개수하라고 지시를 내리자 박종규는 아예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로 근사한 별장을 지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이를 보고 "별장을 고치라고 했지 누가 새로 지으라고 했어? 박종규 너는 항상 이런 식이더라! 난 돌아간다!" 라며 불호령을 내렸고, 김정렴 비서실장이 "지금은 이곳밖에 숙소가 없으니 오늘 밤만 주무시지요" 라고 설득하여 박정희는 못 이긴 척 새 별장에서 묵었다. 그 사이 대통령 측근들은 긴급 회의를 열어 이 별장을 지은 정주영이 박정희의 최 호감 인물이므로 그를 끌어들여 박정희를 설득시키기로 하고 이에 정주영은 다음 날 아침 박정희를 독대하여 말하길,

각하, 제가 진해 별장을 새로 지으라고 했습니다. 각하가 쓰시는 건물이라 제 사재(私財)를 들인 겁니다만, 돈도 얼마 안들었으니 부디 그냥 쓰시지요?

이 말에 박정희는 기분이 풀려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했다고 한다. 물론 박종규는 목숨을 건졌고...

미포조선소를 건설할 때 어느 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아[29] 지프를 타고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시찰을 하다 운전 미숙으로 차가 바다에 빠져 익사할 뻔 했었다. 이때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준 경비원에게 보답의 의미로 경비회사를 차릴 수 있게 도와주고, 그 회사에 현대 계열사의 경비를 모두 맡겼다고 한다.[30] 이 경비원의 말에 따르면 "빗속에서 분명히 쌍라이트가 보이길래 곧 차가 나타나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방파제 바위 근처에서 불빛이 사라지길래 이상하게 여겨 순찰을 나갔더니 누군가 물에 빠져 있었다"라고 한다. 정주영의 증언으로는 "거기 누구요?"라고 부르자 "야! 지금 사람이 빠져 죽는데 누군지는 알아서 뭐해! 빨리 밧줄 가져와!!" 라고 소리 질렀더니 자기인 줄 알더라고 한다. 간신히 바다에서 구조되어 나온 정주영에게 직원들이 몰려와서 괜찮냐고 묻자 쑥스러워진 정주영은 괜시리 화가 났지만, 자기 실수로 물에 빠졌는지라 직원들에게 뭐라 하기 그래서 "물속이 참 시원하더군" 이라는 농담으로 넘기고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1985년 당시 K-1전차를 제작할 때 K-1 전차의 차체에 균열이 가자 납품일자를 지키기 위해 미제 강철판을 구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당연히 현대 미국지사는 난리가 났고 미본토를 싹싹 뒤져 결국 고강도 강철판을 구하는데 성공했는데 문제는 이걸 배로 실어보내려니 1개월이란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가 터지자 아예 B-747기로 실어보내라라는 지시를 내렸고 결국 그렇게 K-1전차의 납품기일을 지킬 수 있었다.

오일쇼크로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무렵 중동으로부터 수주가 왔는데 굳이 거기까지 돈을 벌려는 사업자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얘기를 들은 정주영은 바로 중동으로 출국하여 현지를 살펴본 후 이렇게 보고 했다. "각하, 절호의 기회입니다. 중동은 1년내내 비가 오지 않아 쉬는 날이 없어 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낮에는 더우니 자고 밤에 공사하면 되고, 벽돌을 만들려면 모래가 필요한데 지천에 널린게 모래이며, 유조선을 동원하여 갈 때는 식수를 싣고 가고, 돌아올 땐 석유를 싣고 오면 됩니다."

모 계열사를 방문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였다. 발표자가 1시간 분량을 준비해 긴장타고 있는데 정주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10분만에 끝내." 발표자는 패닉에 빠져 어쩔줄을 몰랐고, 그걸 지켜보던 정주영은 바로 일어나 나가버렸다. 결국 발표자 및 부서의 책임자들은 모두 회사에서 짤렸다.

정주영과 관련된 책은 수도 없이 많아서 대충 인터넷 서점에서 뒤져도 부지기수로 나온다. 이 중 만화가 이현세의 기획으로 정주영의 전기가 만화로 제작되었다. 1992년 선거용으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의 만화판을 이현세 프로덕션에서 만들어 무료배포를 했던 적이 있는데, 이후 1998년에 정주영 자신이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새로 펴내자 그 내용을 기존 만화판에 증보하여 새로 펴낸 것. 정주영이 일궈낸 성과들과 정주영의 인생을 대충이나마 알고 싶다면 한 번쯤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현세 사단답게 세세한 자료조사와 세밀한 작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어떤 관상가는 정주영 회장의 관상이 용의 상이고, 하관 또한 넓직하기 때문에 복이 노년까지 이어져서 현대그룹을 일궈냈다는 평을 했다. 실제로도 왕회장의 이목구비를 동양의 용 그림, 특히 곤룡포 흉배에 수놓여진 용과 꼼꼼히 비교해보면 매우 흡사하다.

대재벌이었지만 소탈하고 전통적인 방식의 생활을 고수해 현대 오너가의 아침은 매일 오전 6시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전부 다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주로 나온 메뉴는 미역국이었는데, 그 미역국은 왕회장의 부인 변 여사를 비롯한 현대가 며느리들이 새벽부터 준비한 것이다.

소탈함은 그의 일생 곳곳에도 드러나고 지금도 남아있다. 집무실 소파는 너무 오래돼서 시트가 많이 해졌고, 청운동 저택은 페인트 칠이 떨어져도 새로 칠을 안해서 그 자국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도둑들이 정주영의 자택을 노리고 들어와 한탕 벌어먹으려고 몰래 침입했는데, 재벌집인데도 털어갈 물건이 없었다며 불평불만을 하고 조용히 떠나가기도. 게다가, 그들과 변중석 여사가 마주쳤는데 도둑들이 돈 되는 걸 내놓으라고 하자 건네준 게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정몽준의 아내를 위해 준비한 예물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현대그룹 사옥 특유의 아치형 디자인도 정주영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이었는데, 이렇게 지은 계동 사옥이 삼성 본관 건설비의 3분의 1밖에 안 들어서 그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했다고 한다.

살아생전의 장래희망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서 실제로 국회의원도 해봤지만 끝내 대통령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여섯번째 아들인 정몽준이 정주영이 살아생전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치인이 되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신문들을 읽거나 해외에서 날아온 문서들을 검토하는 등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었다. 이건 쌀가게에 근무할 때 전차 삯이 부족하여 꼭두새벽에 일찍 출근한 것에서 시작된 것. 위에 서술된 미포조선소 건설현장 순시 중 바닷물에 추락한 날도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일어났다고.

앞서 서술한 아침식사 루틴이 있는 것처럼 유독 아침식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본인이 농부의 아들이었고 상당한 체력과 노동력을 요하는 건설회사를 운영했던 경영자였기에 하루종일 일을 하려면 아침을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배경 때문에 범현대가 기업들의 구내식당은 아침식사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다른 기업에 비해 식대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먹어야 일을 한다"는 창업주의 유지가 이어지고 있는 셈.[31]

위의 '아침형 인간'과는 좀 모순되어 보이는 일이지만, 의외로 평소에 수면은 충실히 취했다고 한다. 밤에 짧게 자고 대신 낮에 중간중간 쪽잠을 자주 자는 형태였다고. 정주영이 '나는 평소 7~8시간 이상은 잠을 자야 하는 사람이야. 만약 4시간씩 자고도 괜찮다는 사람이 있다면 사기꾼이야.'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 최불암의 증언(신동아), 조갑제 칼럼 실제로 영국의 마가렛 대처총리는 총리로 재임 할 때 4시간밖에 안 자고 일 만 했는데, 퇴임후 치매가 와서 고생하다가 사망했다.

물론 이상의 내용들은 정주영 회장 본인의 자서전에 기초한 관계로 자화자찬인 내용들이 많다. 이제 와서 위 일화들의 사실성을 검증하기란 불가능하므로 균형감을 위해 몇 가지 일화의 어두운 면들도 약간 소개하기로 한다.

지프를 타고 조선소를 시찰하던 도중 바다에 빠진 일화는 그의 집중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쓰인다. 조금 생각해보자. 오너가 차를 몰고 다니다 바다에 빠질 정도로 시설이 열악한 조선소에서, 타고 다닐 차도 없는 일반 노동자 중에는 사고를 당한 사람이 없었을까? 정주영의 입수 사건은 74년에 발생했고 73년에 34명, 74년에 25명의 작업공이 공사중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현대조선 뿐만 아니라 현대계열사 전반의 기록적인 공기 단축에는 이렇듯 현장 작업자들의 희생이 밑바탕이 되어 있었다.

정주영이 중동 건설 사업에 진출하면서 박정희에게 했다는 말은 그의 실천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쓰인다. 이 때 그는 낮에는 천막을 치고 자면 된다고 더위에 대처가 가능함을 어필했지만 실제로는 3교대 시스템으로 24시간 작업을 돌렸다. 각종 자서전과 다큐멘터리에서의 묘사는 근로자들이 오너의 열정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를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정주영을 포함해 당시 한국 기업인 대부분의 인식에 노동자는 최소한의 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그 외의 인간적 편의는 그다지 고려해주지 않아도 되는 일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정도 참작해야하는게 한창 성장기에 있는 개발도상국 시기의 기업인들 중에 저렇게 안한 기업인은 거의 없었다. 당장 개발도상국 시절 미국의 록펠러, 카네기만 봐도 노동자들은 일하는 기계취급하고 막 부려먹었었다. 원래 어느나라든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들은 다 저렇게 막 부려먹히고 임금도 적게 받는다. 이건 어쩔수가 없다. 그러다가 선진국이 되면서 임금이 올라가고 대우도 올라가는 것이다.

정주영 특유의 말투로 이거 봐!가 있는데, 정주영은 누군가를 부를때, 이거 봐 XXX하면서 이름이나 직책을 부르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정주영의 일대기를 드라마한 영웅시대에서도 최불암이 정주영[32]이 상대방을 이거 봐 박 상무, 이거 봐 처남등으로 말하는데, 특유의 말투로 성대모사를 하는 연예인들이 많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람을 부를 때 임자! 라고 부르는것과 같이 보인다. 공교롭게도 같은 실향민 출신인 송해 옹 역시도 상대를 부를때 사석에서 이거 봐!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북한 지역에서 노인들이 사람을 부르는 말투 같다.

경쟁자들

김우중

현대자동차가 김우중의 대우자동차와 경쟁을 벌였다. 70, 80, 90년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현대자동차 vs 대우자동차의 대결을 주시하였을 것이다. 김우중이 대우자동차를 통해서 현대의 아성을 꺾기 위한 경쟁, 특히 쏘나타와 관련한 일화가 있었다. 정주영 역시 대우의 아성을 꺾기 위해 현대자동차의 모든 것에 사명을 걸며 김우중과 경쟁을 벌였다.

신차 출시에 있어서도 현대와 대우는 경쟁관계였다. 자동차 뿐 아니라 버스, 트럭 등의 대형 상용차, 중공업에서도 두 사람은 경쟁관계이기도 하였다. 자동차와 중공업에서 현대와 대우의 경쟁은 90년대에 가장 치열했다. 90년대에 존재했던 시내버스나 고속, 시외버스 중에서는 대우나 현대 브랜드 차량이 많았을 정도. 건설업서도 현대와 대우는 경쟁관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2000년 대우그룹이 해체하고 2001년 정주영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 두 사람의 경쟁과 현대와 대우의 자동차 경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병철

삼성의 이병철은 정주영보다 5살 많다. 국내 최대의 재벌인 현대와 삼성의 대결은 재계 1, 2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국내에서도 경제적인 주목을 받아왔으며 반도체, 백화점(현대백화점 vs 신세계), 중공업, 건설업 등 사업 분야들에서도 경쟁을 벌였다. 이병철이 작고하기 전까지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는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 경쟁을 제외하면 정주영과 이병철의 경쟁은 경제계에서도 주목을 받아왔다.

1987년에 이병철이 세상을 떠나면서 정주영과의 경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현대그룹도 왕자의 난 등을 겪은데다 2001년 정주영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현대그룹도 현대자동차그룹에 밀려서 소(小)그룹으로 전락하였지만, 삼성그룹은 여전히 건재한 성향을 보인다.

신격호

백화점에 있어서는 신격호와도 경쟁자였다. 나이는 1915년생인 정주영이 1921년생인 신격호보다 6살 연상이며[33] 일본의 영향을 받은 신격호와는 다르게 정주영은 오직 현대 하나만으로 토종형 기업으로 승부를 걸었다. 현대백화점과 롯데백화점의 경쟁은 이 두 사람에게서도 주목을 받아왔으며 여기에 신세계를 세웠던 삼성 이병철까지 포함하면 삼각경쟁이기도 하다. 또한 건설업에서도 현대건설과 롯데건설을 통해서 신격호와 경쟁을 벌여왔다.

다만 현대가 식품사업에는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식음료쪽에서는 롯데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롯데는 자동차 사업에는 손대지 않았다. 비즈니스와 별개로 사적인 친분이 두터웠다. 두 사람이 하루는 골프 약속을 잡았는데 눈이 내려 신격호가 걱정하자 정주영이 색깔 있는 골프공을 가져와서 눈밭에서도 골프를 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