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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서장훈 나이 신체 가족 학력 소속사 소속팀 선수경력 연세대학교 프로시절 국가대표 농구인들의평가 결벽증 이혼


서장훈 프로필


출생

1974년 6월 3일 (47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체

205.3cm|110kg|320mm|A형

가족

아버지 서기춘, 어머니 김정희, 여동생(1979년생)

학력

서울학동초등학교 (졸업)

선린중학교 (전학) → 휘문중학교 (졸업)

휘문고등학교 (졸업 / 85회)

연세대학교 (스포츠레저학 / 학사)

상명대학교 복지상담대학원 (아동·청소년상담학 / 석사)

소속사

미스틱스토리

소속팀

청주서울 SK 나이츠의 초창기 로...청주/서울 SK 나이츠 (1998년 ~ 2002년)[10]

서울 삼성 썬더스 2004~2...서울 삼성 썬더스 (2002년 ~ 2007년)

전주 KCC 이지스 (2007년 ~ 2008년)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2008년 ~ 2011년)

창원 LG 세이커스 (2011년 ~ 2012년)

부산 kt 소닉붐 (2012년 ~ 2013년)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現 방송인이다.


2. 상세


대한민국 농구계를 대표하는 국보급 센터이자 대한민국 농구 역사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선수였다. KBL 기록의 사나이기도 한데, KBL 통산 최다 득점(13,231점), KBL 통산 최다 리바운드(5,235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한국프로농구 역사상 조니 맥도웰과 더불어 유이한 7시즌 연속 PER 20+의 주인공이다. 아는 형님선 7주 연속 비희망 짝꿍이란 기록도 보유 중이다

상대 선수들의 집중 견제 탓에 부상을 달고 살았으며, 선수 시절 말년에는 골밑보다 외곽을 많이 도는 모습을 보여 줬다. 하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우월한 신체 조건을 이용한 포스트업에도 상당히 능했으며, 이를 역이용한 미들 슛 또한 상당히 정확했다. 미들슛만이 아니라 3점슛도 마찬가지. 포스트업도 막기 힘든데 수비를 달고 쏘는 미들슛, 3점슛도 쏙쏙 들어가니 상대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 반칙으로 끊어도 자유투도 정확하니 더 미칠 노릇.게다가 말년에 외곽을 많이 돌았다는 것도 젊었을 때와의 상대적인 의미이지 실제로는 골밑을 주로 지키며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의 운동선수라는 조건에서도 공부도 상당히 잘 했고, IQ도 140이 넘을 정도로 머리도 좋다고. 최화정의 파워타임에서 IQ를 정확하게 측정한 게 아니라 진위 여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부는 잘 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서장훈의 아버지는 국내 유명 대기업의 이사를 역임했다.

서장훈의 역대 스탯 국내 선수로서는 드물게도 시즌 평균기록 더블더블을 네 차례나 기록한 바 있다. 또한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다. 서장훈 외에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는 하승진으로 한 차례 기록한 바 있다.

또 한국 프로농구 사상 용병을 제치고 리바운드 타이틀을 따낸 유일한 센터이기도 하다.

은퇴 이후 무한도전 등 각종 방송에 가끔 출연하다가, 미스틱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생색 많은 방송인으로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3. 선수 경력



3.1. 선수 경력


3.1.1. 농구에 입문한 야구소년


과거 OB 베어스의 박철순 선수를 좋아해서 서울 학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에 먼저 입문했다. 포지션은 투수. 선린중학교 야구부로 가기 위해 서울 남정초등학교로 6학년 때 전학을 간 후 선린중학교로 진학해 야구부 활동을 했지만, 중학교 1학년 도중 초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있던 휘문중학교 근처로 다시 이사 갈 일이 생겼고 당시 학교군 제도상 야구부 소속으로는 전학이 불가능해 농구부로 바꿨다고 한다.게다가 마침 180cm를 넘는 키는 농구부에서도 주목할 만 했고, 휘문중학교에 농구 특기생으로 전학한 뒤 1년 동안은 기본기만 다지다가 중3 때 키가 15cm나 증가하면서 197cm의 거인 센터가 되어 마침내 포텐이 터지게 되었다.

그는 김원호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중학교 때부터 같이 활동하던 단짝이자 1년 후배인 현주엽과 함께 휘문고를 고교 정상급의 팀으로 이끌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둘은 나란히 93학번과 94학번 최대어로 꼽혔다.


3.1.2. 연세대학교


그러다가 1993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1993-94 시즌 농구대잔치에 등장했는데, 1학년의 나이로 기존 대학 팀들의 인사이더뿐 아니라 기존 실업팀의 국가대표급 센터들까지 완전히 관광을 보내버리며 농구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당시 서장훈만큼의 높이를 가진 농구 선수는 노쇠한 기아자동차 농구단의 한기범과 기량이 두드러지지 못한 현대전자의 정경호 둘 뿐이었고, 키는 비슷해도 서장훈 만한 힘과 기술, 민첩합과 BQ[9]를 가진 선수는 그때까지의 한국 농구계에는 없었다. 이 당시 국내 농구인들의 희망사항은 "한기범의 키에 김유택의 기량을 가진 선수가 있으면 좋겠다."였고, 서장훈은 김주성과 더불어 이 조건을 충족시킨 한국 농구 역사상 두 명뿐인 선수 중 하나다. 서장훈 본인은 후보 선수라 전술 훈련에도 잘 끼지 못했었던 중학교 시절에 슈팅 연습을 혼자 열심히 했던 것이 센터 치고도 슈팅 능력이 탁월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했지만, 사실 서장훈은 대학이나 프로농구 활동 당시 또래 선수들 중에서도 매우 성실한 선수에 속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체격이 커지고 주전 선수가 되고 나서도 슈팅 연습을 항상 따로 열심히 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에 의한 영향이 더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연세대 농구단이 실력도 뛰어났지만 인기 자체가 연예인급으로 많아서, 농구팬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와 지지를 받던 시절이었는데 최희암 감독은 선수들이 훈련 중 해이한 모습을 보일 때 선수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이 대단한 줄 아느냐. 너희들이 막말로 연필 하나라도 만들어서 팔아봤느냐. 그냥 농구만 하는 니들이 무슨 생산성이 있는 일을 한다고 거만해지느냐. 모든 게 니들 덕이 아니라 너희를 좋아해주는 사람들 덕이니 항상 사랑을 주는 팬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그를 위해 성실히 노력하라"고 하며 무섭게 다그쳤고, 그것이 서장훈의 농구에 대한 생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렇게 불벼락을 떨어뜨린 최희암 본인은 연세대학교 농구팀의 인기에 힘입어 남성팬티 TRY CF를 찍기도 했다(...).

서장훈은 당시 농구대잔치 리그에서 연세대가 한기범과 김유택이 있던 기아자동차를 이기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고, 플레이오프에서 재차 기아자동차와 대결하는 일은 없었지만, 결승에서 상무의 센터 정재근을 제압,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 등과 함께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최초의 대학팀 우승으로 이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이 모두 뛰고 있던 중앙대조차도 준우승만 하면서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1994년에도 서장훈은 21점 20리바운드 10블록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으로 트리플 더블을 달성하기까지 하며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다. 고려대가 전희철, 김병철을 비롯한 기존의 강력한 선수진에 현주엽까지 입학시키는 데 성공하며 연세대를 노리는 상황에서 두 대학이 마주한 농구대잔치에서, 경기 도중 이상민이 부상으로 실려나가면서 고려대는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전만 가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연세대에겐 한번의 슛 찬스밖에 없는 상태에서 서장훈은 눈앞에 수비수를 달고서도 중거리 슛을 버저 비터로 꽂아넣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대를 충격에 빠트렸다. 이때는 서장훈의 운동 능력이 절정이던 시기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이 당시의 자신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할 정도.

 

위의 영상이 바로 당시 경기의 영상이다. 참고로 이 영상은 KBL 2007-08시즌에 추억의 영상으로 KBS에서 편집하여 방송한 것인데, 편집영상이 끝나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진행자는 다름 아닌 오정연 아나운서이다.

이상민을 부상으로 잃은 상태에서 당시 1번 시드였던 연세대는 8번 시드 삼성전자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치르게 되었는데, 당시 삼성전자는 2번 시드 고려대와 만나는 것보다는 이상민이 없는 연세대와 붙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정규시즌 막판에 고의적으로 여겨지는 석연찮은 패배까지 불사하며 8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상민이 없는 연세대가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정작 1차전은 건재한 서장훈의 활약에 대학 시절 내내 동기 이상민에게 가려 출전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백업 포인트가드 김성헌이 선발 출장해 그야말로 이상민이 빙의한 듯한 엄청난 활약으로 연세대가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하지만 삼성 또한 2차전을 가까스로 잡고 다음 라운드 진출 여부를 최종 3차전으로 끌고 갔다.

서장훈만 철저히 틀어막으면 이긴다고 본 삼성은 서장훈의 학교 선배인 문경은까지 투입시키며 서장훈에게 폭력에 가까운 파울을 남발했고, 그 와중에도 서장훈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삼성의 센터 박상관은 거친 파울 속에도 서장훈이 득점을 하고 리바운드를 따내자 아예 서장훈의 뒷통수를 그대로 두들겨 패 버리고 만다. 연수 부분에 충격을 받은 서장훈은 그대로 코트에서 혼수상태로 쓰러지면서 병원으로 실려갔고, 삼성은 그것에 힘입어 결승에 올라간다.

이때 서장훈이 당한 부상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목이 다친 부분이 약간만 빗나갔어도 전신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서장훈은 한국 농구에 환멸을 느껴 1995년 미국의 산호세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애초에 편입생은 1년간 뛸 수 없다는 당시 NCAA의 트랜스퍼 제한도 걸린데다 산호세주립대학이 농구로 알아주는 대학도 아닌지라 미국에서 별로 보여준 건 없이 1년만에 귀국한다. 더군다나 국내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일 만큼 서장훈의 기량과 재능도 상당히 좋긴 했지만 미국에는 서장훈 이상의 키와 스피드, 파워를 지닌 선수들이 많아서 미국 농구계에서 대성할 거라고 확신하긴 힘들었다.

서장훈은 국내 복귀 후 황성인, 김택훈, 조상현, 조동현과 함께 다시 연세대를 최강팀으로 이끈다. 그리고 다시 열린 농구대잔치에서 서장훈이 이끄는 연세대는 당시 센터치고는 단신이지만 주목받는 활약을 보여준 윤영필과 장신 슈터 김성철, 그리고 강혁을 앞세운 팀 플레이를 보여준 경희대학교와 플레이오프에서 맞섰다. 서장훈은 이미 경희대의 골밑을 유린한 적이 있지만 경희대는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센터 윤영필과 서장훈의 맞대결이 기대되었는데, 윤영필이 경기 도중 부상을 입어 경기에서 빠져버리자 맞설 상대가 없는 서장훈은 경희대 골밑을 손쉽게 접수한다. 그렇게 경희대는 1차전을 내준 후 2차전에서는 인사이드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강혁이 팀을 이끌며 연세대와 대등하게 맞섰으나, 강혁마저 부상으로 빠져버리자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만다.

그리고 결승에서는 상무를 만났다. 이상민, 조성원, 문경은이 있는 상무는 현주엽이 있던 고려대를 격파하고 올라오면서 이번에야말로 우승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준결승에서 연세대의 테러를 본 농구 팬들은 상무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상무에는 서장훈을 막을 선수가 없었다. 서장훈에 의해 제공권을 장악당하며 상무는 패하고, 서장훈은 다시 한 번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후 프로화된 농구팀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는데, 당시 진로그룹은 신생 농구팀을 창단하는 과정에서 연대 농구선수들에 대한 우선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서장훈을 자기들의 신인으로 지명해 놓았는데 서장훈은 이에 대해 선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라며 반발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서장훈의 농구 유학 자체가 이후 프로화되는 실업팀에 입단하면서 대우가 나빠질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 당시 진로 농구팀 단장이었던 사람이 농구대잔치에서 삼성 감독으로서 서장훈을 골로 보낼 뻔한 짓을 지시한 김인건이었기에 서장훈이 입단을 꺼렸다는 말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서장훈이 졸업 후 현대전자로 가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다는 소문인데, 그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대는 한국프로농구 출범 과정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프로 전환 후에도 팀 내의 베테랑 선수인 이영주를 내치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로가 창단하기도 전에 부도가 나고 농구 팀은 SK그룹에 인수되고, SK 측이 김인건을 단장에서 부단장으로 내려버리고 최고 대우를 약속하자 서장훈은 서울 SK 나이츠에 입단한다.


3.1.3. 프로 시절(1998~2013)


3.1.3.1. 청주/서울 SK 나이츠


프로 선수로 챔피언 결정전 우승과 본인의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1999~00시즌 SK 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 맨 왼쪽이 서장훈이다.

사진에서 서장훈, 조상현, 황성인 등 연대 3인방 출신 선수가 신은 농구화는 99/00시즌 나이키에서 만든 케빈 가넷 전용 농구화로서 당시 KBL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신었고 센터 재키 존스의 농구화는 게리 페이튼의 1999/00시즌 시그니처 모델이다. 참고로 서장훈 선수는 저 시즌 이후 그 유명한 에어 조던 11을 많이 신고 나왔는데 상대적으로 가볍고 목이 낮은 농구화를 선호하는 듯하다.

SK나이츠 시절의 서장훈과 현...

이 둘은 하도 사이가 좋아서 사귀는 사이라는 오해가 많았다

신인으로 SK 나이츠에 입단한 서장훈은 함께 입단한 현주엽과 함께 소속팀을 우승시킬 것이라고 사람들은 예상했으나, 서장훈과 현주엽은 각자 스탯만 잘 쌓고 시너지 제로의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 전엔 우승 못하면 바보, 시즌 끝나면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라는 SK 나이츠의 전통 첫 장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 SK가 시즌 도중 활동 범위가 겹치는 현주엽을 슈터 조상현과 트레이드하면서 황성인, 로데릭 하니발, 재키 존스와 함께 팀을 99-00 시즌 우승으로 이끈다. 시즌 MVP는 서장훈의 몫. 사실 데뷔 시즌에도 국내 선수로서는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리바운드 1위를 차지했지만, 팀 성적을 이유로 신인상을 못 받았는데, 그 한을 제대로 풀었다. 외국 선수와 대적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할 뿐더러 되려 외국선수를 압도한 경우도 많았다.

그가 MVP를 차지한 1999-00시즌을 보면 외국인선수상을 탄 맥도웰과 그의 성적이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2001-02 시즌에는 외국인 선수가 거의 없는 상태였던 만신창이 SK 나이츠를 이끌고 4강에서 KCC를 격파하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당시 최고 전력을 자랑한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 맞서서 7차전 접전을 이끌면서 역시 서장훈이라는 찬사를 얻는다. 사실상 서장훈이 페리맨을 순삭시키며 균형을 맞추었던 것이었다.

또한 서장훈은 2016년 11월 5일 김민수가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 SK의 개인 최다득점자로 남아있었다. 김민수가 9시즌을 뛰고 기록을 경신한 걸 단 4시즌 만에 기록한 서장훈의 선수 시절 위엄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자기 발로 나간 선수지만 활약은 엄청났기에 SK에서는 구단의 역사를 돌아보는 행사를 하면 초청은 꼬박꼬박 해서 영상으로 한 번씩은 인사말을 건네고는 한다. 그리고 서장훈의 시대 이후 SK는 김태술의 2008년을 제외하고 긴 암흑기에 빠져있다가 김선형이 등장한 이후로 겨우 플레이오프에 얼굴을 비추게 되었다.


3.1.3.2. 서울 삼성 썬더스


01-02시즌 종료 후 놀랍게도 FA 자격으로 서울 삼성 썬더스로 이적한다. 팬들이 대단히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이 농구대잔치 시절 서장훈에 대한 린치에 가까운 거친 플레이를 가한 삼성이었고 이적 당시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당사자들인 이창수 & 박상관 두 선배(강을준은 은퇴)가 멀쩡히 팀에 있었기 때문에 삼성행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 사람들이 많았고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에 갓 부임한 은사 최희암 감독이 강력히 영입을 희망하기도 해서 모비스로 갈 것으로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삼성행이라는 최대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등가교환이라고 당시 삼성이 샐러리캡을 맞추기 위해서 그전 시즌 팀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우지원을 보호선수에서 제외해버렸다. 서장훈으로 인해 쫒겨난 선배가 이상민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주범들이었던 이창수&박상관은 동시에 방출됐다.스포츠계에서 감독이나 스타 선수 영입이 있으면 껄끄러운 관계인 선수나 코치들을 방출시키는 게 관행이라 비판할 일만은 아니지만, 서장훈으로 인해 주전이었던 우지원과 나름 전력급 백업센터인 이창수 & 박상관이 동시에 팀을 떠났다. 자신의 이적으로 대학 선배 우지원이 팀을 떠나게 돼서 마음이 안좋았다고 하는데, 몇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적으로 또 다른 대학 선배인 이상민을 떠나게 만들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고 한다.

어쨌든 서장훈이 합세한 서울 삼성은 9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의 서막을 열었고, 05-06 시즌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시기에 주성타 사건이 일어나면서 목 부상의 재발로 그의 상징이 된 목 보호대를 차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고, 서장훈은 부상을 극복하면서 05-06 시즌 삼성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05-06 시즌 우승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정규 시즌에서는 서장훈이 활약하며 생애 두 번째 MVP를 수상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안준호 감독이 의도적으로 강혁과 네이트 존슨의 픽 & 롤을 구사하면서 서장훈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연장까지 간 2차전에서는 강혁과 함께 팀을 캐리했고, 접전이었던 3차전은 결승점이 된 자유투 2개를 성공시켰으니 비중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마지막 4차전에서는 경기 초반만 뛰고 내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다음 시즌 삼성과 갈등이 생긴 서장훈은 2007년 다시 한 번 FA로 KCC 이지스로 이적했는데, 이때 보상선수로 이상민이 삼성으로 가게 된다.

사실 우승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일각의 비아냥과는 다르게 챔피언결정전 한정으로 서장훈의 출전 시간이 줄었지만, 정규 시즌과 플레이오프에선 서장훈이 좋은 활약을 했다. 이 시즌부터 평균 득점이 20점 밑으로 내려가긴 했어도 올루미데 오예데지와 네이트 존슨 듀오의 가세로 수비 부담을 덜고 공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특히 플레이오프에서 오리온스의 약한 골밑을 제대로 유린하면서 팀이 체력 소모 없이 쉽게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장 서장훈은 해당 시즌 MVP였기 때문에 그가 우승에 기여한 게 없다는 얘기는 까놓고 말해 그냥 대놓고 헛소리다. 그가 없었으면 애초에 파이널 진출도 힘들었다.


1.3.3. 저니맨 시기(2007~2013)


서장훈은 KCC에서의 첫 시즌엔 팀을 정규 시즌 2위로 올리며 나름 활약했으나 4강에서 삼성에게 3 대 떡으로 발렸고, 그 다음 시즌엔 하승진의 등장 이후 출전 시간이 줄어들자 트레이드를 요구해 3:2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했다. 전자랜드에서는 당시 7~10위권을 헤매며 답이 없어 보이던 전자랜드가 2월 전승을 포함해 13경기 12승 1패라는 대반전으로 팀을 재건, 은사 최희암 감독과 만나며 6강 진출을 이루었고, 전자랜드가 답이 없던 09-10에도 서장훈은 건재했다. 유도훈이 감독이 된 10~11시즌 문태종-허버트 힐과 같이 서태힐 트리오를 결성, 전자랜드를 팀 성적 역대 커리어하이인 정규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데뷔 시즌부터 10~11시즌까지 통산 기록 12,500점을 돌파했고 리바운드 4,986개로 독보적 1위이다. 센터 중 유일하게 어시스트 1000개를 넘어섰다. 전술한 폭행성 파울로 인한 부상을 제외하면 철저한 몸 관리를 통해 잔부상도 별로 없이 꾸준히 시즌을 소화해온 프로 의식도 칭찬할 만한 부분. 더구나 현역 주전 선수이기에 프로농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특히 득점 통산 기록이 대단한 것은 2위를 다투는 문경은과 추승균보다 2~3,000점 이상 차이가 나는 데다가 서장훈이 문경은보다 3살이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이다.

2010-11 시즌 후 FA자격을 얻었으나 연봉 2억 5천에 인센티브 1억을 더해 총 3억 5천만원에 1년 계약으로 팀 잔류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후 LG 세이커스의 이현민+강대협과 1:2 사인 엔 트레이드 형식으로 LG 세이커스로 이적. 유도훈 감독은 2010-11 시즌을 치르면서 종종 팀에 남아달라 요청했었고 서장훈도 별다른 잡음없이 무난하게 팀에 남을 줄 알았는데, 이런 트레이드가 터짐으로서 전자랜드 팬들은 프런트를 폭풍 성토. 더군다나 서장훈을 내주고 얻어온 대가가 많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도(트레이드의 명분을 리빌딩으로 삼았는데 강대협은 30대 중반, 이현민은 30대에 들어선 나이도 있고, 상무 소속이라 로스터를 비워둔다고 해도 2011-2012시즌 5라운드 이후에나 합류 가능. 게다가 강대협, 이현민 모두 요근래 하향세를 보였으니...) 트레이드에 대한 비판의 한 원인으로 보인다. 어쨌든 원치않은 저니맨(...)이 돼버린 서장훈과 이번 트레이드를 주도한 전자랜드의 2011-2012 시즌 성적은 어떨런지...

결과적으로 2011-12 시즌은 서장훈 농구 인생 최대의 흑역사가 되었다. 노쇠하고 발이 느려진 상태에서 문태영과 롤도 겹치고, 애런 헤인즈 위주로 공격을 풀어간 LG에서는 그의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수비 면에서는 송창무가 어느 정도 각성하면서 장신 선수 수비에 굳이 서장훈이 필요 없어진 상황. 여기에 부상까지 겹치면서 완전히 시즌을 망쳤다. 그를 트레이드시킨 전자랜드는 6강 PO에는 진출했지만, LG는 6강 PO 진출에 실패하면서 묘한 대비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은퇴냐, 선수 생활 지속이냐를 두고 진지한 고민을 해야 했다. 특히나 그때 이혼까지 겹치면서 심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였다.

결국 전창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연봉 1억 원에 kt와 계약을 맺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39] 기자회견을 열어 kt에서 뛰는 12-13시즌 이후 은퇴와 연봉 전액과 사비 1억을 더해 사회 기부를 발표했다. 서장훈 본인은 은퇴식을 고사했지만 kt는 전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은퇴식을 준비했다.

 


2013년 3월 19일 KCC와의 홈 경기에서 은퇴식 및 은퇴 경기를 가졌으며, 33득점이라는 놀라운 기록, 그리고 이날 경기의 마지막 득점을 남기며 25년에 걸친 농구 인생을 마감했다.


3.1.4. 국가대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대학 신입생 신분으로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까지 12년간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이 시기는 중국이 아시아 농구의 1인자였고, 서장훈과 동시대에 왕즈즈(214cm), 야오밍(229cm)이 중국 대표팀에 뛰었기에 아무리 서장훈이라 해도 높이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아시안게임 두차례 은메달에 그쳤으며, 중국을 꺾은 단 한번의 대회인 1997년 ABC 준결승 때는 대회 내내 중이염 때문에 서있지도 못할 정도 국내에서 열린 2002년에 기적적으로 중국을 꺾었다. 야오밍을 막다 일찌감치 파울 3개를 범했으나, 끝까지 야오밍을 육탄방어 해냈고 연장에서 중요한 첫득점을 3점슛으로 올리는 등 활약하며 15득점 6리바운드로 승리에 공헌했다.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서장훈은 '왜 중국을 넘지 못하는가' 라는 비판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후 방송에서 정말 이기고 싶었고 농구하면서 처음으로 야비한 짓까지 해가며 뛰었고, 농구 인생에 있어 가장 열심히 뛰었던 경기라고 술회했다. 여담으로, 야오밍이 출전한 중국팀이 아시아 국가에게 패한 유일한 경기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결승전이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무대는 안일한 대회 준비와 선수 선발으로 형편 없는 경기력을 보였으며, 결국 5위에 그치는 수모를 겪는다. 서장훈도 부상이 있는 상태로 참가하여 최부영 감독에게 '센터 본능'을 잃어버렸다며 혹평을 듣기도 하며 갈등을 겪었고, 결국 이 대회 이후 서장훈은 대표팀을 은퇴하고 이후의 복귀 요청도 고사한다. 한국 농구 사상 최고 센터의 국가대표 은퇴로는 씁쓸한 모양의 은퇴. 아시안 게임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를 따 냈다. 금메달 2개부터 연금이라 연금을 못 받는다고 한다. 대신 월세 받는다


3.2. 평가


3.2.1. 팬들의 평가


기록만 봐서는 프로농구 최고의 선수 화려한 커리어로 농구팬들의 추앙만 받아왔을 것 같지만 현실은 비난과 비판을 독식했던 불운한 선수였으며, 은퇴한 이후 끊임없이 재평가되며 평가가 올라간 재평가의 아이콘.

코트에서 잦은 항의를 하는 모습이 팬들이 서장훈을 싫어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2011년 11월 20일 서울 SK 나이츠와의 원정경기에서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해 테크니컬 파울을 2개 연속으로 받고 퇴장당해 팀 분위기를 다운시킨 일이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심판 항의가 잦고 인상을 많이 쓴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김주성, 하승진 외에는 서장훈을 정상적으로 수비할 수 있는 국내 선수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서장훈의 마크맨들이 파울에 가까운 거친 수비를 자주 했고 심판들이 다른 선수들의 마크맨에 비해 너그러운 판정을 내렸던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서장훈만 그랬다면 비판을 독식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 현역 시절 서장훈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김주성 역시 짜증과 항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오히려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코트에서 욕설을 하고 잦은 항의를 하는 것이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수비를 빙자한 거친 폭력에 수도 없이 노출되었고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힌 목 부상을 두 번이나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견제는 줄어들 줄 모르니 서장훈의 행동을 마냥 비판만 하기는 어렵다.

참고로 이른바 '목장훈'의 상징인 목 보호대를 은퇴할 때까지 차게 된 원인은 2004-05시즌 김주성에게 당한 일명 주성타 사건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서장훈이 골밑 싸움을 기피한다는 이유로 서장훈이 농구판에서 골리앗 같은 악역인 셈이지만 오히려 실제로는 피해자인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자신을 욕한 관중에 대해 욕설을 했다는 루머도 있다. 중계 화면에 잡힌 바로는 해당 관중은 '이응사'. '이응사'가 서장훈을 욕하게 된 계기는 서장훈이 FA 자격을 얻어 삼성에서 KCC로 이적하였을 때 삼성이 보상선수로 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상민을 지목하여 그가 팀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 그러나 서장훈이 KCC로 이적한 이유가 대학 선배 이상민과 다시 같이 뛰고 싶어서였는데 소속팀에서 이상민을 보호하지 않고 보상선수로 떠나보냈음에도 그에 대한 비난은 서장훈이 받았다. KCC는 서장훈-이상민 콤비보다는 노장인 이상민 대신 다른 선수 위주로 팀을 개편하고 싶어했고, 서장훈 역시 삼성보다는 우승권에 근접하며 자신의 비중이 높을 KCC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요컨대 이상민과 KCC의 특별한 관계를 떼고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선수 이동 및 FA 계약이었다.

물론 저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도, 평소 팬들을 대하는 팬 서비스가 안 좋았다는 증언이 많다. 이 때문에 농구팬들 사이에서 서장훈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안 좋았던 측면도 크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서장훈이 감당해야 할 오명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로농구의 인기가 폭락하고 서장훈은 연예계 데뷔 후 뛰어난 예능감으로 이미지를 완전히 일신해서인지, 선수 시절 안 좋았던 팬 서비스 전적이 오늘날 연예인 서장훈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부분은 거의 없다. 서장훈을 있게 해준 농구의 인기가 폭락하면서 오늘날 서장훈의 이미지 실추가 없게 된 묘한 상황인 셈. 팬 서비스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국민타자' 같은 명예로운 호칭으로 표현되던 이승엽이나 '조선의 4번 타자' 소리를 듣던 이대호 등 최고의 야구선수들이 안 좋았던 팬 서비스 전적으로 대중의 엄청난 지탄의 대상이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국보급 센터'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는 서장훈은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인 것도 맞다.

또한 상당히 까칠했던 성격 탓에 드러나지 않은 몇몇 트러블도 있어서 선수 시절 동안 안 좋은 이야기를 달고 살아야 했다. 가령 서장훈이 저니맨이 된 원인을 팀의 1옵션에서 밀려났다는 이유로 불만을 표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그 케이스. 그런데 사실 팀 내 역할이 적다는 이유로 팀에 불만을 표하는 경우는 해외 리그에선 아주 흔하다. 오히려 외국에서는 이를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경우도 잦은데, 설령 이게 욕먹을 일이라 해도 서장훈은 불만을 가졌을 뿐 공개적으로 불평한 건 아닌 만큼 욕먹을 이유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서장훈이 줄어든 역할로 불만을 표한 게 이적으로 이어진 삼성, KCC 케이스를 살펴보면 삼성 시절엔 결승전에서 팀 플랜을 가드 위주로 짜려고 해 그의 출전을 제한한 안준호 감독과의 마찰이었다. 근데 이 시즌 서장훈은 MVP였다. 그것도 20점 가까이 기록할 수 있는. 리그 최고의 국내 선수를 뛰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기꺼이 벤치에서 동료들을 응원하겠다며 불만갖지 않을 선수는 적을 것이며, KCC의 경우 까마득한 후배이자 본인보다 기량이 훨씬 떨어지는 신인 하승진과 로테이션으로 나오다가 출전시간이 20분 밑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적 직후 전랜의 팀 성적을 수직으로 끌어올리고 그 다음 시즌 정규시즌 2위/베스트 5에 들 정도의 실력자가 말이다.


2.1.1. 외곽 플레이어라는 오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경기력 면에서도 비판을 받았는데, 골밑 경합, 리바운드 등 센터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외곽으로 나와 중장거리 슛에만 몰두하며 팀 성적보다는 스탯관리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인데...

굉장히 아이러니한 것이 이런 비난이 시작된 시기가 20대 초중반에 골밑 공격 위주일 때부터 나온 비난이다. 물론 30대에 진입해 노쇠화한 이후 3점 라인에서 공받아서 3점 혹은 드라이브인을 노리는 공격 등 포워드 플레이를 하던 시기가 분명 있었고 그 당시에 외곽 공격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면 이해할 일이지만, 20대 전성기에 골밑 공격 위주일 때부터 이런 비난에 시달렸으니 아이러니.

이런 비난의 근본적 원인은 우선 한국 남자농구에서 센터가 득점 1위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역대로 한국 농구에서 센터가 1옵션인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한국에서는 신동파-이충희-김현중-문경은-방성윤으로 이어지는 슈터 계열이 메인 스코어러 스타일이었고, 예외적으로 허재 같은 다재다능한 유형이 있었다. 하지만 센터는 스크린, 리바운드, 피딩 등 궂은 일 위주였고, 전 시대 최고의 센터 김유택은 다양한 득점 루트를 보여줬으나 팀에선 2~3옵션이었고, 1옵션은 허재와 강동희였다.

따라서 당시 한국 남자농구에서 센터가 팀의 볼 소유 시간이 길고 공격 시도가 많다면 볼 호그 취급받기 쉬웠다. 그러나 서장훈은 한국 농구계 최초로 센터가 1옵션이 되었던 상황이다. 서장훈 자체가 리바운드와 골밑 수비 등 역대 최고의 기량을 가졌다는 것 이외에, 득점 역시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는 점이 매우 생소한 상황이었다. 이는 서장훈의 안티들에게 볼 호그로 매도당하기 쉬웠으며, 실제로 서장훈이 커리어 내내 받아왔던 비판 중 하나는 탐욕이 심하다는 내용이었다는 점이 방증한다.

즉, 서장훈이라는 출중한 신체를 지닌 선수가 골밑에서 리바운드와 수비만 충실하고 공격은 보조적인 수준을 원했는데, 막상 서장훈은 주도적으로 자신의 득점을 시도하는 선수였으니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쉬웠고,그냥 다양한 공격루트와 득점력을 지닌 센터였을 뿐 전혀 외곽 위주가 아닌데도 외곽에서만 머무른다는 오명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서장훈 역시 자신의 득점의 2/3는 항상 골밑 공격으로 이루어진다고 항변해 왔다. 실제로 아마추어 때는 아예 골밑에 주력했고, 전성기 서장훈의 주 공격루트는 포스트업에 이은 골대 근처에서 페이더웨이가 주를 이뤘다. 30대 초반까지 경기당 삼점슛 성공갯수가 한 개 정도였다. 이때 서장훈이 20점 가까이 넣은걸 생각하면 실제로 3점슛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었다.

이후 프로농구 출범 이후 용병 제도가 도입되자 국내 선수는 1옵션에서 거의 배제된다. 2명의 용병이 득점을 주도하고, 허재 등 한국의 최고 스타조차도 공격을 주도하면 비효율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기 쉬웠다. 문경은 같은 특급 슈터들도 공격 위주보다 3&D 스타일의 롤 플레이어로 강요받는 상황이니 블루워커들이 더 많았던 센터들은 더욱더 마당쇠 역할을 강요받았다. 이에 반하며 프로 이후에도 국내 선수로 4~5년 이상 오랜 기간 주축 스코어러였던 선수는 서장훈뿐이니, 비난받기 쉬웠다.

서장훈의 최전성기가 지나고 골밑에서 용병을 상대하는 경쟁력이 떨어지자, 3점슛 비중이 높아진 것은 분명히 맞다. 다만 이 당시 국내 센터들 대다수가 골밑 경쟁력을 잃고 3&D 스타일로 수비와 3점슛에만 치중하거나 벤치로 내려와야만 출전이 가능하다시피 했다. 서장훈 역시 전성기가 지나고 용병과 일대일 대결에서 우위가 힘들어진 상황이었으니 스트레치 빅맨이 된 것은 맞으나 이전에도 빅맨으로서의 기본 소양에 소홀했다는 비판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이는 선수 생활 후반에나 적용되는 논지일 뿐 전성기 구간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이때에도 매치업 상대가 국내 선수일 경우는 엘보우에서 포스트업을 구사하거나 골밑을 많이 노렸다. 전성기 시절의 서장훈에 비해 커리어 후반의 서장훈의 경기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골밑에서의 적극성이 줄었다는 건 알지만, 그는 자신의 장점인 정확한 슈팅을 활용해 좋은 선수로 남았다. 실제로 삼성에서의 마지막 2년 간 미들슛의 비중을 높이며 팀의 우승을 견인했고, KCC에서도 토종 1옵션으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08-09시즌 중반 트레이드 이후 바닥을 기던 전자랜드를 기어코 6위로 이끌면서 플옵 보증수표의 역할을 톡톡히 했고, 10-11시즌엔 팀을 2위로 이끌면서 MVP 후보이자 베스트5에도 들었다. 06-07시즌을 기점으로 리바운드가 줄었다고는 하나, 이후 6시즌 중 아시안게임 차출과 부상에 시달렸던 06~07시즌을 제외하고는 전부 5~7개 사이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는 김주성과 비슷한 수준이다. 원래 10개를 기록하던 선수가 6개 정도 잡으니 적다고 느껴질 뿐 절대적으로 보면 적은 수치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서장훈이 05-06시즌를 기점으로 골밑 플레이가 예전보다 줄어든 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력적인 선수였기 때문에 스탯만 좋다거나 볼 호그 기질이 심하다는 비판은 초보적인 비판이 맞다. 또한 골밑 플레이가 줄었다고 해도 국내선수들 중 상위권의 보드 장악력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독보적인 넘버 원에서 "잘하는 수준"이 된 것일 뿐.

재미있는 것은 서장훈과 자주 비교되는 김주성의 경우 선수 말년에 3점 슈터로 전업한 듯한 변신을 하였음에도 비판받지 않는다. 최고센터 김주성, 어떻게 그는 '3점 슈터'가 됐을까 나무위키 내 김주성 항목을 보더라도, 3점슛을 던지기 때문에 상대가 수비하기 더 어려운 선수가 됐고, 팀 기여도가 더 높아졌다며 칭찬하는 대목이 나오지, 단순히 외곽슛을 던진다는 이유로 비판받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고, 3점슛의 가치가 높아진 것에 따른 자연스런 인식의 변화로 보인다.


2.1.2. 수비와 리바운드에 대해


보통 농구계 속어로 (골밑)비비기라는 용어가 있는데 , 서장훈은 골밑에서 비비지 않는다는게 서장훈에 대한 흔한 비판 논리였다. 골밑 비비기는 다른말로, 골밑 자리잡기 골밑 몸싸움 박스아웃등으로 어느정도 대체할 수 있는 용어이다. 20세기 농구는 빅맨의 골밑 몸싸움과 자리잡기가 농구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봤기에 이 부분에 굉장히 민감했다. 100%까지는 아니지만 골밑 비비기를 상당히 반영하는 기록이 리바운드이다.

사실 농구선수의 기량은 스탯으로 수치화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빅맨의 득점 리바운드 스틸 블록슛 등의 주요 스탯중에서, 득점은 포지션과 상관없는 스탯이라면, 리바운드와 블록슛은 빅맨의 기량과 직결되는 기록이다. 하지만, 골밑 비비기 가장 그나마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기록은 리바운드이다. 서장훈은 이런 측면에서 분명히 골밑에서의 리바운드 싸움에 누구보다 충실한 선수 중 하나였다.

서장훈의 리바운드는 수치상으로 매우 뛰어나다. 앞서 언급된 대로 국내 선수 중 평균 리바운드가 두자리 수를 넘긴 선수는 서장훈(네 차례)와 하승진 뿐인데, 그나마 하승진은 정확히는 9.95로 반올림해서 10리바운드다. 커리어 후반에도 6~7개는 올려줬으며 이는 국내 선수 중 상위권이며 김주성과 비슷한 수준이며 밀린 적도 거의 없다. 몸싸움을 안 하는 빅맨의 리바운드 1위가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지 생각해 보자.

느린 백코트와 불성실한 수비 또한 비판받았다. 단지 나이 먹은 이후 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빠른 김주성이 등장해서 김주성과 비교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장훈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지나친 술, 담배, 체중 증가와 발바닥 무릎 허리 등의 부상 이후 스피드가 느려졌지만 본래 서장훈은 100m 기록이 13초 대가 나올 정도로 스피드가 좋았다. 실제로 서장훈이 대학농구에서 다른 선수들을 압살한 이유도 키와 힘, 스피드까지 갖췄다는 것이었다.# 다만 백코트 속도가 느려 얼리 오펜스에 대한 수비가 취약했던 것은 사실. 그러나 이 또한 전성기 이후에, 술, 담배, 노화, 부상...으로 신체능력이 하락해서 나타났던 단점.

김주성이 유독 상대적으로 롱런한 것일 뿐 김주성보다 훨씬 육중한 서장훈이 부상에 시달리는 건 당연했다. 평범한 선수였으면 몸 상태가 심각해서 운동 능력이 많이 내려오면 선수 생활 지속이 어렵지만, 서장훈은 워낙 기본 기량이 뛰어나고 슛도 좋았기 때문에 부상과 운동 능력 상실 이후에도 계속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수비력과 기동력의 저하는 감수해야만 했다.

서장훈의 신체적인 대표적인 약점은 팔의 길이, 즉 윙스팬이었다. 블락과 스틸 기록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핵심적인 이유. 농구선수의 신체 조건 중 키 못지 않게 중요한것이 윙스팬이다. 윙스팬이 길수록 스탠딩 리치도 높아져 블록이나 림 프로텍팅, 슛 컨테스트와 디플렉션 등 수비 시 강점이 매우 높아진다. 서장훈은 윙스팬이 길지는 못했기 때문에 스틸이나 블록슛이 많지 않았고(커리어 평균 스틸 0.5, 블락 0.6), 이는 커리어 평균 스틸 0.9, 블락 1.4를 기록한 김주성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치이다.

총평하면 서장훈은 노쇠 이후 팀 수비와 스피드 측면에서 약점을 드러낸 것일 뿐, 전성기 용병센터와 일대일 매치업에 밀려나는 일이 거의 없는 뛰어난 선수였다.

국내 선수는 외국인 선수를 1:1로 막기도 힘들고 반대로 뚫어내는 것도 어려운데, 서장훈은 전성기 내내 줄곧 외국인 센터와 매치업하며 팀에 기여했다. 이걸 극대화한 사례가 99-00시즌 로데릭 하니발. 당시 상대는 역대 최고의 용병 맥도웰을 보유한 현대라는 거함이었는데, 이를 파훼하기 위해 최인선 감독이 기발한 수비전략을 썼다. 주로 상대 한국인 주 득점원을 봉쇄하던 로데릭 하니발이 이상민을 막고, 상대 센터를 막던 서장훈이 4번으로 뛰던 맥도웰을 막는 전략. 이상민은 하니발에 막혀서 볼 간수에서부터 애를 먹었고, 언더사이즈 빅맨이었던 맥도웰은 서장훈의 높이에 밀려서 원활한 플레이가 힘들었다. 공격에서는 하니발을 주 공격옵션으로 사용하면서 상대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전략으로 최강 현대를 꺾고 우승하게 된다. 이는 서장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전략.

어쨌든 서장훈이 노쇠화로 인해 자유계약 용병센터에 밀려나고 부상으로 갈수록 느려져서 팀 전술상 수비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노쇠화 이후에도 수비력 약화가 천천히 온 김주성에 비해 수비력 저하가 빨리 온 셈은 맞지만, 역대를 논할 빅맨 수비수인 김주성보다 못하니 수비력이 약하다는 비판은 과한 측면이 있다. 즉, 노쇠화가 된 이후에 느려지면서 지역방어 등 팀의 수비밸런스에 손해를 끼친 것은 맞으나 이는 노쇠화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이다. 물론 목 부상이 없었고, 담배 끊고, 술 줄였다면 전성기 기량을 3~4년 더 유지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상대적으로 수비에 강점이 있었던 김주성과 비교되는 면인데, 사실 김주성이 센터(라고 쓰고 파워포워드라고 읽는다)지만 스피드가 뛰어나며 기동력 저하도 늦게 온 덕에 팀 수비 측면에서 강력한 수비수였던 거지 전성기 서장훈이 수비가 약했던 게 아니다.


3.2.1.3. 그 외 비판


덩크슛이 적었다는 점도 꽤나 욕을 먹었었다. 최근에야 김선형이나 김종규등 비교적 토종 선수들의 덩크가 많이 나오는 편이지만 서장훈의 선수 시절엔 국내선수의 덩크가 희귀한 볼거리였고 그나마 김주성이 종종 보여주는 걸 제외하면 시즌 내내 보는 일이 손에 꼽는 수준이였다.덩크 영상 그래서 팬들은 국내 최장신이던 서장훈이 덩크를 좀 시도하길 바랐지만 원맨 속공 같은 노마크 상황에서도 레이업을 올려놓아 아쉬움을 샀던 것. 이에 대해 서장훈 본인은 자신의 덩크가 외국인 선수들의 덩크에 비해 멋없어서 잘 시도하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다. 또한 덩크나 레이업이나 성공률은 비슷한 반면 덩크의 체력소모가 훨씬 커서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비판도 복잡미묘한 감이 있다. 이상민의 경우 프로 출범 이후 인게임 덩크를 거의 안 했으나 연습 중에는 이따금씩 덩크를 선보였는데, 이상민의 덩크 시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가 나왔다. 그러나 서장훈이 실제로 덩크를 할 경우 반응이 별로 없었다. 04-05시즌에 서울 삼성과 전주 KCC 사이의 잠실 경기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연습 중 이상민이 레이업을 할 때마다 관객들(주로 여성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끝내 투핸드 덩크를 보이자 경기장이 폭발할 듯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런데 여기에 자극받았는지 다른 한쪽에서 연습하던 서장훈이 원핸드 덩크를 하자 덩크를 본 일부 팬들이 "오-"한 것 외에는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것. 당시 서장훈은 평균 22점 9리바운드를 기록하는 특급 선수였음에도. 농구대잔치 시절 서장훈은 연세대의 인기에 힘입어 환호를 받았으나, 프로 출범 이후 안티가 점점 늘어나면서 삼성 시기에는 비판적인 여론이 꽤나 많았다. 물론 "우리 편"이란 점에서 응원은 있었지만 서장훈이 (파울을 당한 뒤) 항의를 하면 파울을 당한 서장훈에 대한 우려보다는 "저 놈 또 욕하네"란 탄식이 많았다. 즉, 애초에 서장훈이 하는 플레이는 팬들로부터 환호를 받지 못했는데 당시 목 보호대를 하고 있던 서장훈이 체력소모와 부상을 각오하고 덩크를 해야 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는 프로시즌 이후의 농구팬들이 주로 가하던 비판이었으며,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그를 봐 온 올드팬들은 대부분 서장훈에 대해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삼성전 때의 폭력 수비 사건. 그리고 프로에서 '주성타'를 비롯한 수많은 폭력 수비 등등. 그만큼 국가대표나 소속팀에서나 궂은 일을 많이하고 험한 꼴 많이 받았으나 돌아오는 건 욕밖에 없으니... 사실 서장훈이 받는 비판의 대부분은 상대 선수들의 상식 밖의 견제와 목 부상에 기인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불쌍한 거 맞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논파되거나 정상 참작되며 긍정적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어쨌든 한국 농구계의 전설적인 선수이니... 특히 베테랑이 되면서 인터뷰도 자주 있었고 신문 기사에서도 자주 본인의 목소리를 냈는데, 그 동안 농구팬들에게 험상궂고 짜증만 많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던 서장훈은 인터뷰를 통하여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이미지로 돌아서게 되며 이미지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에도 늘 개념찬 인터뷰를 보여준다.

다만, 여러 팀을 돌아다닌 통에 어느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기억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농구계의 저니맨. 한국을 대표하는 센터로 농구사에 길이 남겠지만, 특정 팀의 영웅은 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단 굳이 따지자면 SK 혹은 서울 삼성의 레전드로 볼 수 있겠다.

이는 서장훈의 2번의 MVP와 우승을 차지한 팀이 각각 SK와 삼성이고 그가 뛴 기간동안 최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등번호인 11번이 영구결번 된다면 이 두 팀에서 받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영구결번에 부정적이라 영구결번이 될 확률은 낮은 편이다.

그 외에 01년과 03년에 음주운전 전과가 있어서 비난받는 것도 있다. 2001년 9월에 음주운전으로 인해서 면허가 취소되었는데 02년 7월 2002 월드컵 기념 대사면으로 면허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후 불과 8개월만에 6강 플레이오프 중 음주 운전이 적발되어 다시 면허가 정지되었다. 그리고 이 여파로 인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이 탈락했다.


3.2.2. 농구인들의 평가


(한국농구 역대 Best 5를 뽑아달라는 질문에)“제일 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애매하긴 한데, 일단 서장훈은 무조건 들어가야 하고, 이충희, 허재도 이름을 올려야 한다. 김주성도 2002년 때의 전성기라면 뽑힐 수 있다"

- 유재학 신동아 2015년 1월호

"내가 높이 평가를 하는데. 그 당시에 선수 생활이라는 그... 그게 있다고.. 한기범이랑 서장훈이랑 10년 차이가 나요. 농구 역사로 보면 10년 주기로 한번씩 나온다는 거지. 그게 이제 서장훈이라고. 한기범 밑으로 나온 게 서장훈인데… 한기범은 그때 몸이 안 좋아서 체력적으로 많이 딸릴 때고. 그러니까 이제 서장훈이가 그 때 완전.. 서장훈이 하나 때문에 우승했다고 보면 되지."

- 허재

농구선수들의 아이돌

팬들의 평가보다도 농구인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궂은 일을 잘하는 블루워커 스타일을 이상하리만큼 고평가 하는 한국 농구의 특성에 맞지 않게 블루워커보다 득점을 하고 팀의 중심이 되고 싶기에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던 만큼 현역 농구인들로서는 서장훈의 실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실감했다.

한국농구에서 서장훈과 쌍벽을 이루는 김주성과의 비교에 대해 신선우 감독은 "전성기 기량으로 본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며 서장훈의 손을 들어줬고 모비스의 유재학 감독은 "전성기 기량이라면 당연히 서장훈을 택할 것이다"라고 했고 삼성 안준호 감독도 "득점력과 노련함이 돋보인다"며 서장훈에 대해 호평했다.중앙:8개구단 감독들이 말하는 서장훈과 김주성

다만 링크에서 보면 유재학과 안준호 등 서장훈을 택한 감독이 있고, 김진, 추일승 등 김주성을 들어준 감독, 그리고 판단을 유보한 감독으로 각각 나뉘었다. 두 선수가 한국농구를 대표하는 센터라 볼 수 있지만 둘의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고, 각자 장단점이 있다보니 선택이 갈리는 것으로 보여진다.

2016년 스포츠동아에서 현역 감독, 코치,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허재와 함께 '남자프로농구 20주년 기념 역대 최고선수' 공동 1위에 선정됐다.‘국보 센터’ 서장훈 ‘대통령’ 허재…최고 선수 공동 1위


2.3. 은퇴 이후의 재평가


NBA에서 르브론 제임스와 카이리 어빙의 사례는 1옵션의 논쟁에서의 대표적 사례다. 제임스 밑에서 어빙은 파이널 진출과 좋은 스탯, 그리고 '"NBA 파이널 우승'"이라는 인생에 제일 빛나는 순간을 가졌지만, 1옵션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싫어서 팀을 나갔다. 그만큼 1옵션과 2옵션의 지위는 팀 내에서도, 그리고 스타플레이어들에게도 큰 차이로 다가온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속 서술했듯 서장훈은 용병제도 도입 이후에도 The man을 고집했던 선수이다.

그런 이유로 서장훈이 선수 생활을 하던 시기 궂은 일에 소홀하고, 득점과 리바운드 등 드러나는 성적에만 신경쓴다는 비판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좀 억울한 면이 있다. KBL 출범 이후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되며 한국 농구의 방향성은 외국인 선수에게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는 당시 1옵션이던 서장훈의 매치업이 팀마다 두 명씩 생겼다는 의미기도 했다.

첫 우승팀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경우 국가대표 센터였던 김유택이 순식간에 식스맨이 되고, 허재가 팀에서 존재감이 없어져서 결국 밀려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당시 기아는 클리프 리드와 저스틴 피닉스 두 명이 득점과 리바운드를 장악했고, 이에 따라 득점원 역할을 해줄 국내 선수보다는 패스가 뛰어난 포인트가드와 오픈 찬스에서 외곽슛을 쏘며 수비까지 되면 금상첨화인 슈터 정도, 그리고 용병이 쉴 때 백업을 해주는 조동기나 앞서 말한 김유택이 필요할 뿐이었다. 허동택 트리오를 보유했던 기아가 이 정도였으니 다른 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블루워커 기질이 뛰어나고 팀 디펜스와 활동량이 많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그 위에 뛰어난 용병 둘을 얹으면 우승할 여건이 되기에 당장의 우승을 위해선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기 쉬웠다. 그 결과, 서장훈의 연세대 선배인 우지원은 스팟업 슈터로 변신했고, 원래 고려대학교 센터 출신이자 다재다능한 포워드 자원으로 기대를 모았으며, 서장훈의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같이 뛰기도 했던 이규섭도 우지원과 비슷하게 수비력을 갖춘 슈터가 되었다. 라이벌이었던 현주엽은 포인트 포워드라는 미명 하에 득점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팀에 기여하는 것을 택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한국 선수가 중심이 되어서 경기를 끌어갈 수 있는 경우는 서장훈과 방성윤, 그리고 문경은의 프로 초기와 00-01 시즌 MVP인 조성원밖에 없었으며, 서장훈만이 팀내 1옵션으로서 롱런했다.

서장훈은 인터뷰에서 이런 식으로 궂은 일을 하는 선수가 더 가치를 인정받는 KBL의 풍토가 아쉽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용병과 정면으로 대결해서 평균 20점씩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들도 팀의 중심이 되지 못하여 궂은 일을 하며 용병을 보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에이스 역할을 할 만한 국내 선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장훈은 궂은 일을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밀려날 바에야 은퇴를 하겠다고 이야기했던 선수이다.[77] 서장훈의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시즌이 진행될수록 점차 국내 선수의 득점과 리바운드 등의 기여도가 낮아져서, 팀 공격의 중심으로 활약하는 국내 선수가 꽤나 줄어들었다. 김선형이나 이정현, 오세근 정도. 화려하고 개인 능력으로 득점하는 선수가 아닌 궂은 일을 하고 성실한 선수가 더 인정받는 KBL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들도 나오는 상황이다. 궂은 일을 하는 선수가 팀에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그 선수가 에이스보다 잘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야구로 치면 아무리 홀드를 많이 따내는 중간계투라도 15승을 해 줄 수 있는 선발투수에게 명함을 내밀 수 없는 것처럼. 종목을 막론하고 스포츠에서 블루워커는 팀의 입장에서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궂은 일이 저평가받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차원의 접근으로, 궂은 일이 주목받는다면 그건 이미 궂은 일이라 부를 수도 없다.

사실 다득점, 다포제션 게임인 농구에 있어서 팀 구성의 기본은 공격과 득점이고, 이 때문에 농구는 스코어러가 팀의 기둥뿌리이자 대들보가 되는데, KBL 농구는 이를 전부 외국인 선수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에, 외국인 선수의 기량 부족이나 플레이스타일이 스코어러가 아니거나 부상을 입을 경우 국내선수 중 아무도 스스로 슛을 던질 수 없는 구성의 팀은 아예 득점이 안 되는 팀이 되고, 용병을 단 1초도 코트 밖에서 쉬게 할 수 없는 리그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서장훈도 나이를 먹으면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경향은 있었으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득점하고 리바운드를 잡으며 경기를 이끌어가는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분명히 서장훈은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하고는 소속팀을 포스트시즌에 꾸준히 올린 핵심 선수였으며, 수비 능력도 나이가 많아 하락했을 뿐 전성기 구간에는 분명 좋은 수비수였다.

SK, 삼성, KCC, 전자랜드에서는 잘했고 LG에선 부진했고 kt에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3.2.4. 총평


팬들의 평가는 그의 커리어 내내 등락이 컸지만 은퇴하고 난 후에 그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다. 전문가 및 선수들의 평가는 말할 필요도 없고. 반박불가한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이자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농구선수 중 한명이다.

실업 무대를 제패하고 프로 리그에서 용병들과 맞대결하면서도 THE MAN의 자리를 잃지 않았던 유일한 한국 선수.

서장훈은 선수 시절에는 욕심이 과하며 외곽에만 맴돈다는 비판과 함께 끊임없이 저평가되었다. 팬들에게 생긴 좋지 못한 이미지를 만들게 된 이유들로 서장훈이 허재의 기아-동부나 이상민의 KCC-삼성과 같이 그를 상징하는 팀의 대표로 남지 못하고 이적을 자주해왔던 것과 그의 선수시절 동안 <팀의 승리에 어떤식으로 공헌하는가>라는 질문에 한국 정서에 맞는 희생정신을 꼽은 팬들의 반향이 가장 컸다. 반대로 농구인들에게 서장훈은 언제나 호평받았으며 특히 현역 농구 선수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KCC의 신선우 감독은 서장훈이 한창 현역이던 03-04시즌에 '용병들이 판을 치는 현 한국 농구에서 유일하게 30득점을 기대할 수 있는 농구선수'라 말했으며 당시 한국에 오는 용병들도 서장훈은 1대1로 제압하기는 힘들다고 언급할 정도.

그러나 서장훈이 은퇴하며 점차 국내 선수의 1옵션으로서의 활약이 폭락하며 팬들의 서장훈에 대한 평가가 뒤집혔다. 당장 외국인 선수 없이는 득점이 급감하는 프로 팀들의 실력은 과거 외국인 선수 유무에 관계없이 메인 스코어러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던 서장훈에 대한 재평가의 이유가 되기 충분했으며 팬들에게만 저평가되던 서장훈의 기량과 1옵션 마인드 등이 현재의 KBL의 프로선수들이 현재 보여주는 모습이 대비되며 급격하게 평가가 올라갔다.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2회 (2000년 SK, 2006년 삼성)

KBL 챔피언결정전 MVP 1회 (2000년 SK)

KBL 정규시즌 MVP 2회 (2000년 SK, 2006년 삼성)


4. 방송인 서장훈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또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너 죽여 내가! 최고의 요주의 인물이야 너!

보통 스포츠 선수들은 은퇴 후 원래 몸을 담던 분야와 연관된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장훈은 방송 활동에 뛰어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았던데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그만이 가지고 있는 207cm의 장신 슈퍼스타 농구선수 캐릭터 + 겉보기와 달리 머리도 좋고 눈치도 있으며 입담도 좋아 방송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는 평가.

참고로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닌데, 한창 현역 농구선수로 뛰었던 1990년대에 예능 출연이 잦았다. 예를들어 미국 유학 직전에 연세대 동문 박진영과 토요일 SBS 예능에 나와서 박진영은 유학을 말리고 서장훈은 가겠다고 고집하는 설정으로 유학 여부를 가리는 자유투 내기를 했었다. 이때 운동장에 서장훈을 보러 온 여성 팬들이 있었는데, 내기 후에 내 팬은 여동생밖에 없는 줄 알았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또한 SBS 야심만만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은퇴 후 주변 인맥들을 통해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다보니 자연스럽게 방송계의 러브콜이 생겨서 무사히 정착한 케이스. 운동선수에서 예능인으로 전직했다는 점에선 강호동과 비슷하지만, 강호동이 이경규라는 강력한 버프를 받았고 주로 메인으로 활약한 것과는 달리 서장훈은 서포트 없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메인보다는 (존재감 강한) 보조로 나오는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예능 도전을 한 계기는 은퇴 후 6개월 동안 자유의 몸을 가졌는데, 평생 운동선수로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가 안 하니 뭔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된 것이라고 한다. 농구선수 시절 안티팬도 상당히 많았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이런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 싶다 한다. 당분간은 방송일로 대중 앞에 서서 본인을 솔직하게 알리면서 소통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예능에 도전을 하였다고 한다.

"은퇴 후에 6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하면서 놀았어요. 평생을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 하는 일 없이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그러던 차에 방송을 하게 되면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고정적인 일을 갖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는 방송을 하면서 대중의 시선이 따뜻해진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줄면서 당분간은 이 일을 하면서 대중 앞에 저를 좀 더 솔직하게 알리면서 소통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중략) 부모님은 제가 운동에만 과몰입하는 것을 경계하셨어요. 교육적인 부분에 많은 신경을 쓰셨죠. 어렸을 때는 그게 피곤하고 힘들어서 싫었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저 스스로 농구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또 거기에서 궁금증이 생기면 관련 책을 찾아서 읽는 습관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신문은 원래 구독했었는데, 요즘엔 너무 시간이 없다 보니 챙기지 못해 배달을 받지는 않아요. 하지만 요즘엔 다양한 경로로 보도를 접할 수 있잖아요." 기사

원래도 스포츠를 통해 인지도가 높았지만 방송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인지도가 쌓였기 때문에 우리동네 예체능, 런닝맨 같은 방송사들의 간판급 예능 프로에도 다수 출연했다. 2013년 7월 6일 방송된 무한도전 웃겨야 산다 특집 때 뮤지컬 중 목부상으로 입원한 정준하의 대타로 출연해] 국내 최장신 예능인 반열에 올랐다. 본인은 "이거로 뜨고 싶은 마음 없어요. 이게 마지막 방송이에요." 라며 격하게 부정했지만 유재석은 녹화장에 나타나자마자 못친소 2회를 위해 아껴둔 게스트라며 기대감을 표출했을 정도.

결국은 2014년 1월 3일부터 시작된 금요 예능 사남일녀에서 김구라, 김민종에 이은 셋째 역할로 고정 예능인으로 데뷔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합격점을 받았다. 실제로는 당시 PD인 강영선 PD와 작가진들이 새로운 내용을 통해 효(孝)를 실천하고 리얼 버라이어티에 농구계 최고 스타 서장훈이 참여 한다면 새로운 재미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장훈도 매번 고사했지만 제작진의 설득에 승낙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훗날 서장훈도 "이번에 참여하게 된 프로그램은 효를 실천하고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공감이 됐다. 쓸쓸하고 힘들게 살아가시는 분들을 도와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힘든 생활을 함께 겪으면서 그분들께 웃음과 정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물론 힘 쓰는 장면도 많이 나오긴 하지만 이제 운동만 잘한다는 이미지는 거의 벗어던진 셈. 이상민이 삼성 감독에 취임한 후 서장훈이 코치로 하마평에 오르내리자 시청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사남일녀 해야 된다 가지 마라'라는 반응을 보인 것을 보면 시청자들의 지지도 받고 있다. 본인 역시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지도자 생활보다는 예능이 재미있다며 이상민 감독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사남일녀 출연 덕분에 라디오 스타에도 출연하였고 여기서 재밌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연말에 한 해 동안 가장 재밌었던 게스트 중 한 명으로 한번 더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면서 상당한 예능감을 보여줬다. 거기다 예전부터 김구라가 종종 서장훈의 재테크(후술한 부동산 수익)를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이 덕에 라디오 스타에서 윤종신이 붙인 서셀럽이 캐릭터화되면서 예능 안착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전부터 방송 적응이 잘되기도 해서 전업 예능인이 되기에 좋은 운을 탄 상태.

2014년 8월 10일 아빠! 어디가?에 우연하게 윤후의 모습을 봤는데 윤후의 매력에 빠졌다고, 윤후의 농구선생 스승으로 깜짝 출연했다.

그 후 새로 개편된 세바퀴의 고정이 되었다.

2014년 12월 13일 무한도전 유혹의 거인 편에 주연으로 출연, 맹활약을 펼쳤다. 무려 3주에 걸친 낚시로 무한도전 멤버들을 훌륭하게 낚았다. 정준하, 하하, 박명수와는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고, 정형돈도 후배인 이규혁을 통해 연락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무도 멤버들과 친한 사이라서 시너지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준하와 함께 멤버들을 꼬여내기 위해 갖은 사탕발림과 협박을 적절히 배합하는 진상 콤비는 이날 방송의 백미였다. 적절한 리액션과 자연스러운 멘션으로 유재석을 비롯한 무도 멤버들로부터 MC 꿈나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대화의 희열에서 후술하기를 그렇게 친하지 않던 유재석에게 연락이 와서 '15분만 있다 가라'는 말에 잠깐 들려 출연한 것이었는데, 이후 농구선수 서장훈으로만 바라보던 주위의 따가운 시선들이 친근하게 변하는 걸 느끼고 이후로 들어오는 예능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무한도전 나 홀로 집에에서도 최종보스 역으로 출연 사실상 이전의 데프콘처럼 비정기 객원 멤버 취급이다. 무도큰잔치에서는 농구계 동료 현주엽을 데리고 나왔는데 유재석에게 "한 달에 한 번씩 꼭 나온다"며 디스당했다.

일밤 아빠! 어디가?의 후속 프로그램이었던 애니멀즈에 캐스팅되었다. 그러나 애니멀즈는 몇 달 지나지 않아 폐지.

2015년 1월 15일 썰전에도 나왔는데 본인이 방송을 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본인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데 그걸 깨고 좀 더 소통하기 위해서 라고 밝혔고 언젠가 자신에 맞는 팀을 지도해보고 싶다는 말도 하였다.

1월 28일 미스틱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2015년 2월 20일 엠스플의 프로농구 SK-kt 경기 중계에서 일일 해설을 맡았는데 무도큰잔치 녹화 중에 현주엽이 자기 해설할 때 한 번 같이 하자고 해서 나왔다고 한다.

무한도전 식스맨 당시 후보로 거론되며 1차 토론회까지 출연했지만 투표에서 탈락한 데다가 방송에서 과거 음주운전 이력을 어물쩍 넘긴 것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무한도전 식스맨 : 시크릿 멤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소재 자체가 논란과 병크 투성이인지라. 이후로 무한도전에 더 이상은 나오지 않고 있다가 무한도전 예능총회에 오랜만에 나왔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 고정 패널로도 출연 중이다. 3회에 출연했던 무용소녀 김현아 편의 경우 유독 서장훈의 존재감이 돋보였는데, 다른 출연진들이 단순히 엄마와 딸의 1차적인 입장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수준이었던 반면 서장훈은 예체능계 출신 경험을 토대로 딸의 건강에 대해 조언하기도 하고, 딸의 어머니에게 "코치의 역할은 코치에게 맡겨야 한다"며 진지하게 설득했다. 게다가 단지 딸을 대변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어머니가 스스로의 인생을 더 즐기길 바란다고 하면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동상이몽’ 서장훈의 기가 막힌 어시스트..당신이 MVP 방송 이후 시청자들의 평가도 좋았으며, 프로그램 성격에 가장 걸맞은 패널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후에도 짤이 캡쳐되어 각종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며 많은 공감을 얻어내기도.

키, 이혼, 결벽에 가까운 위생 관념 등으로 자신을 놀리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지만, 농구에 관한 사항과 엮어서 희화화 시키거나 본인 커리어에 대해 터치하고 시비거는 걸 매우 싫어한다. 방송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진짜로 심기 불편하다는 표시를 할 정도. 사실 예능계에 갓 입문했을때부터 "농구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예능이라도 웃기는 쪽으로 나아가는 걸 사절한다. 진지하게 임하고 절대로 웃기고 싶지 않다."''' 고 공언했을만큼 농구에 대한 자존심이나 신념이 확고하니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게 당연하다.

대표적으로 아는 형님에서 본인의 인생 사진으로 은퇴식 당시 사진을 가지고 와서도 농구에 대해서만큼은 농담을 하고 싶지 않다며 웃음기 싹 빼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그래서인지 jtbc 아는 형님에서 김희철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농구에 농자도 모르는 사람처럼 질문을 해서 서장훈을 자극하는 식의 상황을 뽑아낸다 또한 몇몇 프로그램에서 농구 지도자로서 출연할땐 선수들에게 자세한 조언이나 따끔한 일침 등을 날리는데, 핸섬 타이거즈에서 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세바퀴에서 우지원과 비교해서 누가 농구를 더 잘했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상당히 언짢은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김구라 및 다른 사람들이 포지션이 다르니까 비교하기 힘들다고 했기 때문. 물론 우지원도 영구결번까지 기록한 굉장한 실력의 슈터이지만, 서장훈은 2016년 농구인이 뽑은 역대 최고 선수에 허재와 함께 공동 1위인, 그야말로 한국 농구 사상 최고의 선수였다. 게다가 우지원이 후배라면 모를까 전성기를 함께한 연세대학교 선배다 보니 대놓고 "내가 지원이 형보다 더 잘하지"라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농구 잘 모르는 사람들은 "둘 다 레전드"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둘의 위상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일단 우지원은 팀의 주포로서 전성기 시절 리그 1, 2위를 다투는 슈터였지만 볼을 주면 득점을 바로 뽑아주는 최정상급 득점원까지는 아니었으며 전성기 시절 국내선수론 1대1로 막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현재보다 수준이 낮긴 하지만) 외국인 선수들에게 더블팀 당하던 서장훈과는 차이가 역력했다. 게다가 우지원이 과소평가받는 선수이고 선수시절 말년에 마당쇠 역할로 살림꾼 역할을 톡톡히 해준 건 사실이지만 수비와 궂은 일에서 그렇게 뛰어나진 않은 선수였다. 기준이 다른데, 노장 시절 후보선수 기준으로 보면 수비, 리바운드, 패스 등 다방면에서 공헌해주는 완소급 선수였다. 그러나 스타급 기준으로 보면 뛰어나다고 할 만한 부분은 결국 득점력 하나 뿐인 원툴 플레이어에 가까웠다. 반면 서장훈은 국내선수들이 막으면 피지컬로 밀어붙히고, 외국인이 붙으면 거리를 벌려서 중장거리 슛으로 해결하는 최강의 득점력과 강한 리바운드를 지니고 있었으며, 수비범위가 좁긴 했지만 워낙 투쟁심과 피지컬이 좋은 선수라 골밑에선 결코 누구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는 선수였다. 잔인한 비교지만 전성기 시절 두 선수의 위상은 NBA로 따지면 하킴 올라주원과 알렌 휴스턴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 물론 스타일을 바꾸고 말년까지 잘 뛰어준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지만.

방송 활동 초기에 계속 밀던 그냥 유명인 컨셉은 이제 버린 지 오래. 이제는 아예 방송을 전업으로 삼고 있고 건물주 캐릭터로도 웃음을 뽑아내는 중. 시사 상식이 풍부하고 소위 촉까지 좋기 때문에 앞으로도 방송계에서 승승장구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의 방송인으로서의 캐릭터는 초창기 방송인 시절 같은 프로그램에 동료였던 김구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퉁명스러운 말투나 지식 자랑을 할 때 특히 그런 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인맥 때문인 점도 있겠지만, 예능적 역량이 매우 우수한 편이다. 2013년 무한도전에 출연하며 예능에 발을 들인 이후로, 2017년까지 4년 사이에 무려 7명의 연예대상 수상자와 고정 프로그램을 했다. 메인 MC는 아니고 패널이나 보조 MC 격이었지만, 만약 예능감이 없었다면 인맥으로도 한계가 분명한 곳이 예능계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굉지한 것이다. 물론 강호동급의 메인 MC로 발돋움 하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특히 아는 형님 전후로 하여 예능 활동이 확 바뀌었다. 아는 형님 출연 이전엔 연예인이라 불리기도 꺼리며 겸손하고 자중하는 이미지의 스타일을 추구했다면 아는 형님 출연 이후로는 본인이 직접 콩트에 참여하는 등 태도 자체가 확 바뀌었다. 또한 방송을 하며 붙은 거인, 건물주, 이혼남, 츤데레, 결벽증 캐릭터를 본인이 적재적소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여러 예능에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고 위에서 말했듯이 본인이 알고있는 각종 잡지식과 상식들을 여과없이 시도때도 풀어대는 김구라 같은 거만한 스타일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그 결과 여러 예능에서 고정으로 들어가며 본인에 캐릭터를 이용해 방송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박명수가 호통 개그로 유명한 것에 비해 서장훈은 현실 개그로 정곡을 찔러 유명하다. 예능인답지 않게 말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하며 그것 때문에 좌절하는 다른 출연자의 모습을 보면서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그런데 서장훈이 하는 말이 주로 현실적인 발언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평생을 승부의 세계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서장훈이 밝히는 과학자들에 캐스팅된 것은 이러한 그의 성향 때문이다.

2017년 SBS 연예대상에서는 미운 우리 새끼와 동상이몽, 너는 내 운명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쇼토크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프로필 하단의 수상 내역을 보면 2015년부터 SBS 한정으로 신인상-우수상-최우수상 루트를 착실히 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8년 5월 3일 54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 예능상을 수상하였다.


4. 기부 활동


현역 선수 시절부터 현재까지 기부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이에 대해 서장훈은 “내가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갖게 되고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매년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4.1. 선수 시절


2002-2003 시즌부터 2006-2007 시즌까지 총 5시즌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자유투 1점당 일정액을 적립해 소년소녀 가장 및 소아암 어린이 치료비로 매년 1천만원씩을 기부했다.

연세대 시절 동기였던 박승일이 루게릭병으로 투병을 시작하자, 그의 루게릭병 환우 후원모금 사업에 가장 크게 협조했다.

현역 시절 205cm의 큰 키로, 1980년대 한국 여자 농구의 골밑을 책임졌던 코끼리 센터 김영희는 부모를 암으로 잃고, 자신은 거인병으로 심장이 계속 커지는 등 갖은 질병에 시달리며, 8평짜리 단칸방에서 한달 체육연금 50만원으로 힘겹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2005년의 어느 날, 김영희씨는 통장을 확인해보니, 몇 달치 치료비가 입금되어 있었는데, 입금자는 바로 서장훈. 후에 이 일이 알려지자, 서장훈은 머쓱해하며 '농구 선배의 딱한 사정을 듣고 약간의 성의를 보탰을 뿐' 이라며 쑥스러워했다고 한다.

2006-2007시즌의 올스타전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받은 상금 500만원에 사비 500만원을 더해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에 전달했다.

2006-2007 시즌 정규리그 MVP로 뽑히자 또 다시 상금 500만원에 500만원을 보태 이웃돕기 성금으로 기부했다.

2007-2008시즌에는 전주 지역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중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1천만원을 전달했다.

2008년 11월 19일, 프로농구 사상 첫 정규리그 1만 득점을 돌파한 서장훈은 "의미있는 기록을 달성했으니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전북대 병원 소아암 환자 5명을 위한 치료비 1천만원을 기부했다.

은퇴 직전 마지막으로 뛰었던 2012~2013시즌에는 연봉 전액 1억원에 사비 1억원을 보태 총 2억원을 모교인 연세대에 저소득층 자녀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5.2. 은퇴 이후


농구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기부는 계속 이어졌다. 2016년 12월에는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하였다. 이로써 서장훈은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의 1452번째 회원으로 가입됐다. 서장훈은 "방송을 시작한 이후 뜻하지 않게 받은 많은 관심과 사랑을 조금이나마 사회에 돌려드리고자 기부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어 "기부금을 통해 의지할 곳 없이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는 어린 친구들의 작은 보탬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5. 기타


5.1. 결벽증


평소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나 물건을 종류별로 열을 똑바로 맞춰 놓고 유통기한을 앞으로 놓아둔 뒤 내림차순으로 정렬을 해 놓아야 하는 등 강박증 증세가 있고, 집에 돌아와 세상의 모든 더러운 걸 씻어내야 한다며 샤워만 1시간 가까이 한다고 할 정도로 더러운 것을 극히 싫어하는 결벽증 증세도 있다. 오죽하면 은퇴 이후 누구보다 농구를 다시 잘할 자신은 없어도 누구보다 깨끗하게 씻을 자신은 있다고도 할 정도. 2017년 8월 17일에 방송된 '뭉쳐야 뜬다' 캐나다 편에 게스트로 출연하였을 때의 일로, 다른 사람이 사용한 화장실을 쓰는 것이 싫었는지 숙소에 들어오면 무조건 자신이 제일 먼저 화장실을 사용하겠다는 조건을 달았었다. 이후 하루 일정이 끝난 뒤 가장 먼저 욕실로 들어가 정말로 샤워만 1시간 이상을 해서 같은 방을 쓰던 정형돈과 김용만을 질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것도 둘을 배려해서 일찍 끝낸 것이라고 한다.

선수 시절에는 워낙에 깔끔을 떨어서 유니폼 빨래를 본인한테 시키면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본인이 직접 유니폼을 손빨래를 해야 잠을 잘 수가 있었다고... 이후에 고참이 되어서도 막내한테 유니폼을 안주고 본인이 빨래를 자처해서 했다고 한다.

의외로 청소를 하는 것도 싫어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청소할 때 먼지가 날리는 것이나 청소 도구를 만지는 것도 더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위의 1시간 샤워 사건에서도 서장훈이 샤워하고 나온 뒤에 욕실에 물이 잘 안 빠져서 바닥에 물이 차 있었는데 신경쓰지 않고 만족한 상태로 나왔다고 한다. 다음 차례로 들어간 김용만이 뒷처리를 했다고. 미운우리새끼에서 말하길 허지웅이 더러운 것을 반드시 깨끗하게 하는 결벽증이라면 본인은 더러운 것을 만지기 싫어하는 결벽증이라고 한다.

혹여나 집이 더러워질까봐 집에 손님을 데려오는 것도 극히 꺼린다고 한다. 아는 형님 방송에서 본인은 에어컨을 심하게 쐬다가 한여름에 감기에 걸릴 정도였지만, 절친인 이상민은 폭염에 에어컨도 없이 처참하게 여름을 보낸다는 소리를 듣고도, 제 집으로는 절대로 오지 못하게 하고 차라리 같이 모텔방을 잡아서 살자는 제의를 했다.

결벽증과 강박증 증세가 있는데도 어떻게 오랫동안 운동 선수로 지냈는지가 참으로 궁금한데, 사실 운동 선수 대다수에게서 보이는 현상이다. 프로선수, 국가대표 선수의 훈련은 곧 반복 작업이다. 무엇이든 먹고 자는 시간, 일 보는 시간만 빼면 반복 훈련이다. 거기서 변수를 만드려고 들지 않는 심리가 루틴을 만들고, 그 루틴이 징크스를 만들고, 그 루틴이 강박증 내지는 결벽증으로 바뀐다. 아닌 사례도 있지만, 웨이드 보그스 항목의 징크스를 예로 볼 수 있듯이 결벽증이나 강박증은 프로 선수에게 흔한 일이다. 특히 스포츠는 어떤 종목이든 간에 대진표가 어떻게 짜이느냐로 우승을 하느냐 못 하느냐가 갈리기도 하는데 그래서 결벽증 수준으로 징크스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매우 많다. 참고로 서장훈의 이런 징크스는 실력이 부각되고 나서 더욱 심해졌는데 아무리 술에 취하고 시합을 뛰고 힘들어도 모든 걸 깔끔하게 정리하고 샤워를 마치고 취침할 정도였다. 잘해야 한다는 욕심과 부담감이 많았던 결과라고 한다. 더불어 박지성, 박찬호를 부러워하면서 농구선수라는 꿈을 완전히 이루는 데는 실패하였고 1만 3천점이 아니라 2만점 넘는 압도적인 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농구를 할 때면 매우 진중한 태도로 일관한다. 또한 배구선수 출신 김세진도 서장훈의 이런 청결에 집착하는 모습을 어느 정도 공감했는데, 키가 큰 사람들은 냉장고 위나 찬장 위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높은 위치의 먼지나 쓰레기가 보이다보니 더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5.2. 드림 브레이커


2016년 경 아는 형님 에서는 걸그룹 여자친구가 출연을 하였는데, 이 때 새로운 인물이 아는 형님에 오면 그 인물은 녹화 전 자기소개서를 적고 녹화하면서 그 자기소개서를 읽는 시간이 있었다.

예린: 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고 싶어.

서장훈: 죽을 때까지 행복하면 조증이야.

그러자 서장훈 옆에 있던 김영철은 이제 갓 20살 된 아이한테 뭐하는 짓이야!라면서 핀잔을 줬다.

은하 : 나는 자식의 의견을 존중하는 친구 같은 엄마가 될 거야.

서장훈: 그럼 애가 잘못 간다.

은하: 나는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열심히 했어. 그래서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자식은 부모의 존중을 통해 잘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서장훈: 문제는 어떤 아이가 나올지 모른다는 거야. 예를 들어 엄마 나 중3인데 나 너무 힘들어서 소주 한 잔 할래. 그래 난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러자 은하의 옆에 있던 신비는 "너무 현실적이야!" 라고 말하며 쐐기를 박았고, 서장훈 뒤에 있던 강호동도 "예를 상식적으로 들어야지." 라고 하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신비: 나는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 검도도 하고 복싱도 할 거야.

서장훈: 쉽게 가스총을 갖고 다녀.

신비: 내 꿈을 짓밟지 마!

이 장면으로 인해 서장훈은 드림 브레이커로 별명을 남겨 시청자들 중 절반은 서장훈이 이러지 않았으면 재미는 없었다는 여론과 너무한 것 아니냐는 여론으로 갈렸다.

이후 여자친구와 서장훈은 괴팍한 5형제라는 프로그램에서 다시 만나면서 재미있게 풀고 갔다고 한다.


5.3. 이혼


오정연 전 KBS 아나운서와 2009년 결혼해 화제가 되었지만, 2012년 합의 하에 이혼했다. 이혼 당시에는 늘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인 '성격 차이에 따른 결별' 이라고만 이야기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는데, 서장훈과 오정연이 본격적으로 예능 활동을 하면서 이 둘의 사생활이나 성격 등이 노출되자 진짜로 성격이 안 맞았을 것이라는 여론이 늘었다. 서장훈은 결벽증 증세가 있는 반면 오정연은 매우 프리하고 털털한 걸 넘어서 더러워 보일 수도 있는 성격이다. 집에서 화장실에 일을 볼 때 매번 물을 내리지 않고 두 세 번 모아서 물을 내린다든지, 머리를 3~4일에 한 번씩 감아서 정수리에서 냄새가 났다든지, 커피믹스를 김치통에 다 담아놓고 밥숟가락으로 퍼서 커피를 타 줬다든지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예능에서 본인이 직접 이야기하거나 같은 자리에 있던 동료의 증언인데 예능 특유의 과장이 있을 수는 있지만 확실히 털털하거나 깔끔 떠는 성격이 아닌 건 확실해 보인다. 이 정도로 성격이 극과 극이니 서로가 서로의 생활 패턴을 견디기가 매우 힘들었던 것. 이쯤 되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격 차이로 인한 결별이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오정연이 신박한 정리에 출연한 모습을 보며 이 예측은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안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니라서 그런지 둘은 지금도 가끔 연락을 하는 사이라고. 또한 2015년 말 이후부터는 김구라가 대놓고 둘에게 다시 잘 해보라는 식으로 반 농담, 반 진담성 드립을 날리는 중. 2015년 SBS 연예대상에서의 공식 재회가 그 재결합 드립의 절정을 찍었었다. 그 이후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멤버들이 전 부인과 관련된 얘기들만 나오면 꼭 트라우마처럼 이혼 사실이 언급되면서 본의 아니게 이별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혼 얘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이별, 결별, 짝, 아나운서 관련 얘기에 정연이라는 이름까지 꼭 서장훈과 연결이 되는 식. 초반엔 그런 얘기 좀 그만하라는 식으로 항상 화를 내며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고정 출연하고 있는 아는 형님에서 멤버들이 하도 많이 놀리고 하다 보니 이제는 그냥 해탈한 듯. 훈서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6. 여담


별명으로는 골리앗 센터, 언론에 쓰이는 공식 별명인 국보급 센터. 서장팔, 목장훈, 서역귀, 목도리도마뱀 등 부정적인 별명도 많이 갖고 있었다. 이미지가 좋아지고 KBL의 레전드 취급을 받게 된 말년 of 말년 시절부터는 농구 팬들이 장팔이형이라는 친근한 별명으로도 부른다. 현재는 훈서방.

본래 고교 졸업 때 착화 207cm에 맨발 205cm 정도였으나 그 후에도 약간 더 자라서 프로선수 생활 중에는 맨발 207cm(정확히는 206.8cm)였다고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혔다. 기사. 그러나 선수 은퇴 후 40대에 잰 키는 키가 줄어서 205.3cm가 되었다고 미우새 145회 2019년 6월 30일 방영분에서 스스로 밝혔다. 참고로 중학교 졸업 때는 맨발 198cm였다고 한다. 중학교 농구부 감독님이 크게 발표하려고 언론에 201cm로 인터뷰하였는데 실제 키는 198cm였다고 한다.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수치랑 살짝 다른데 원래 183 정도였던 키가 다치고 몇 개월 쉬다가 복귀하니 갑자기 197cm가 됐다고... 그래서 감독님이 흥분해서(?) 대회 출전할 때 202로 적어냈다고 한다. 당시 서장훈은 원래 야구를 하다 휘문중 전학 이후 농구를 시작해 존재감이 없이 구석에서 연습이나 하던 존재였으나 키가 급성장하며 팀 내 독보적인 에이스가 되었다고 한다.

은퇴할 때 동시에 강동희 감독이 승부 조작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자신의 은퇴식에서 "강동희 감독님은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던 선배였는데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너무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멘션을 남겼다.

프로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리그에서 거의 손가락에 꼽히는 고연봉자에다 재테크에 능해 약 200억 상당의 빌딩의 건물주이자 자산가이다. 그럼에도 본인 소유의 건물 임대료를 시세를 해치지 않는 상식적인 선에서 인근보다 약간 저렴하게 받고 있기 때문에 착한 건물주로 불리며, 아버지에게 맡겨놓고 굴리는 부동산이라지만 잡음이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임차인들과도 원만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기사 그런데 이러다 오해가 생겨 많게는 인근의 반값 수준으로 임대료를 싸게 받는다는 소문이 돌고 기사까지 나오는 바람에 방송이나 인터뷰 등으로 여러 번 해명한 것으로 보아 그런 얘기 하지마아~ 사람들이 자꾸 와서 진짜냐고 물어봐아 이에 대한 스트레스도 나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능에서 본인 소유의 빌딩에 관한 토크가 나오면 이혼 얘기 못지 않게 매우 불편해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역시 익숙해졌는지 2016년 7월 9일자 아는 형님에서 일명 '건물주 전용 개그'를 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상술했듯이 여러 기부 활동에 참여하며 선행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라디오 스타에 박수홍과 손헌수가 출연했을 때, 손헌수가 자신이 박수홍을 단순한 선배님이 아니라 집사가 주인 모시는 것처럼 모시고 산다고 해서 이유가 뭐냐고 하자 '유산을 노린다'는 기믹을 썼는데, 그 말을 하며 "제가 가까운 사이라 아는데, 서장훈 형님 그 형님보다도 우리 수홍이 형님 재산이 약간 더 위라고 알고 있습니다"라고 섣불리 말했다가 김구라가 의아해하며 "서장훈? 서장훈이랑 붙으려면 최소 300개(300억)는 넘어야 되는데, 진짜 넘어요?"고 하자, "300이요? 그정도씩이나 되나요?"라며 식겁해서 데꿀멍한 적이 있다. 가만히 있던 박수홍만 당혹 최근 2019년 9월 6일 보도된 바로는 홍대 번화가 건물 매입…'400억 건물주 등극'을 했다고 전해졌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립적인 인물임을 자처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오인할 정도이다. 같은 1974년 동갑내기 친구이자 웹툰 작가인 강풀에게는 "너의 정치적인 발언 때문에 네 만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며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반대로 이러한 극도의 중립성 표방 때문에 정치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나이 들고 정치하려고 그 짓 하냐고 여기고는 한다. 김구라가 이런 말을 한 바 있으며, 이러한 중립적 입장견지에서 비롯된 "나는 공인이 아니라 셀럽이다" 발언도 그러하다.

선수 시절에 유명한 목 부상을 비롯해 다른 부위들에 더 부상을 많이 당했지만, 오히려 은퇴 이후에 그의 건강에 가장 무리를 주는 건 무릎 관절이라고 한다. 이는 무릎이 단순히 농구 같은 격한 운동에서만 무리가 갈 수 있는 부위가 아니기에 그런 것으로 판단되는데, 일상 생활 중에도 2m 이상의 거인이라면 서 있기만 해도 누구나 겪는 무릎 관절에 가해지는 강한 하중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젊을 때 농구까지 계속 하면서 더 큰 충격이 가해져왔던 후유증으로 보인다. 덧붙이자면, 키가 작든 크든 무릎 같은 연골의 크기는 그 하중의 차이만큼에 비례해서 커지지 않기 때문에 키가 큰 사람은 운동을 하지 않았어도 노화가 진행된 후, 관절에 문제가 생기기 훨씬 쉬운데 그 키 큰 사람들 중에서도 키가 큰 서장훈이 격렬하게 뛰고 점프하는 농구라는 운동을 하였으니 관절은 만신창이일 것으로 보인다. 연골이라는 게 원래 한 번 가지고 나오면 죽을 때까지 사용해야 되는 것이라 다 닳아버리면 살아가는 데 지장을 주며, 인공 연골 같은 수술이 있긴 한데 여럿 운동선수들의 사례를 보면 아주 큰 효과는 아닌 걸로 보인다. 나이 40이 넘은 이후로 갈수록 무릎에 물이 자주 차서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뺀다고 한다. 무릎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을 때는 한 층을 이동할 때조차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것도 피한다고. 거인의 슬픈 숙명

힐링캠프에서 밝혔는데 가장 기뻤던 순간이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나갔던 시합에서 첫 골을 넣었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맛과 매운맛을 기피하는 편이다. 같이 나온 게스트인 매운맛 마니아 강수진을 보고 학을 뗐을 정도. 다만 자신이 메인인 그 다음 회차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면, 도무지 맛의 기준을 잡을 수가 없다. 신맛 매운맛 뿐만이 아니라 단맛도 싫다면서 비빔면은 왜 가지고 있냐는 지적에 '그 정도는 괜찮다' 는 말을 하질 않나, 시고 단 맛이 싫어서 과일도 거의 안 먹는다고 했으면서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은 왜 가지고 있냐고 묻자 '내 기준에는 괜찮다' 고 대답을 하고, 같은 회사의 아이스크림 중 조금 더 단맛이 없는 제품을 추천하는 김풍에게 '그건 너무 심심하다' 고 말을 하는 등 셰프들과 MC, 시청자들을 혼돈으로 밀어 넣었다. 이 현상을 굳이 분석하자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서장훈은 루틴에서 벗어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이 성격이 자신이 매일 먹던 음식에 자신의 입맛을 최적화시키며 그 입맛을 기준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더/덜 시거나 달거나 매운 음식을 싫어하게 된 듯. 한마디로 까다롭다고 같은 회차의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어머니 음식이 맛있어서 다른 집에 가서 음식 맛있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는데, 아마 이런 강박증 내지는 징크스의 발현일 확률이 높다.

키가 워낙 커서 병역 신체검사 당시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아 일반적인 병역 의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93년에 신검을 받은 서장훈은 제2국민역(면제)이지만, 1998년 법이 개정되어서 1999년에 신검을 받은 최홍만이나 그 이후 등장한 농구선수 하승진은 키로 보충역(4급)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서장훈은 2002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해서 쓸 일도 없는 예술체육요원 복무 혜택도 받았다.

프로선수 생활을 한창 하던 어느 날, 사람들이 "어? 서장훈이 쌍꺼풀이 원래 있었나? 수술해서 생긴 거 아냐?"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은퇴 후 공식적으로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자연산 쌍꺼풀이라고 한다. 그냥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겨서 수술을 했다는 오해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가족들도 대부분 쌍꺼풀이 있었는데, 본인은 어릴 때는 피곤할 때만 생겼을 뿐 평소에 없었다가, 성인이 되고 나이를 더 먹으면서 쌍꺼풀이 평소에도 생겼다가 없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자연적으로 쌍꺼풀이 자리 잡혔다고 한다. 자신의 수술 여부를 의심하는 시선에 대해 말하면서 "저보고 느끼하게 보이게 그걸(수술) 왜 했냐, 이상하다, 이런 식으로 말씀들 하시는데, 제가 이거(쌍꺼풀) 생긴다고 잘생겨지는 것도 아니고 쌍꺼풀 수술을 해도 별로인(?) 얼굴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는데 제가 왜 그런 수술을 했겠습니까? 정말 안 했습니다"라고 호소하며 억울해했다. 실제로 한쪽 혹은 양쪽에 나이가 들면서 쌍꺼풀이 생기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방송에서 과거 연세대 재학시절 우지원, 이상민 등 잘생긴 선배들과 함께 스타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팬들에게 외모로 지적받았던 설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제가 언제 제 스스로 잘생겼다고 했냐고요. 전 항상 가만히 있었는데 대체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이라며 억울해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농구 경기장에서 자신에게 외모로 대놓고 지적질했던 여성 팬과 인터넷에서 본인에게 못생겼다고 한 농구 팬들을 회상하며 "솔직히 세상에 그렇게 얼굴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 많지 않습니다. 본인들은 뭐 얼마나.. 아니 차라리 장동건, 원빈 같은 사람이 나한테 와서 '야, 너 진~짜 못생겼다'고 하면 깨끗하게 인정하겠습니다. 근데 대놓고 저한테 얼굴 가지고 못생겼다고 뭐라고 하신 분들, 대부분 그렇지(?) 않았거든요. 지~들도 그러면서(?) 뭘 나한테만 자꾸..."라고 하며 서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야구선수를 했던 경력 때문인지 농구 외에는 야구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앞에서 서술했다시피 초등학생 시절 박철순 선수를 응원했던 인연으로 현재까지도 두산 베어스의 팬이며 2016년 8월 잠실 홈경기에서는 시구도 했다. 야구선수 드립 쳐놓고 시구할 때 공을 패대기친 건 안 자랑 여담으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최대 라이벌 팀 홈경기에서 시구할 뻔 했던 적이 있다. 2011년 6월 29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시구를 할 예정이었으나 이 날 경기가 비로 취소돼 시구가 무산됐다. 두산 팬인 그에게 LG 홈경기 시구 기회가 주어진 것은 당시 그의 소속팀이 LG 트윈스와 한 식구인 창원 LG 세이커스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공교시 19회에서 한국 여자농구계 사상 최고의 유망주인 박지수와의 만남이 성사됐다. 그런데 박지수는 그 목장훈 사건의 가해자였던 박상관의 딸로도 유명해서 팬들의 관심이 상당했는데, 서장훈은 박지수를 보자마자 반갑게 악수를 하며 "저기 누구야... 상관이 형 아들"이라는 실언을 해 폭소를 자아냈다.

K리그에 서장훈의 닮은꼴으로 유명한 선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성남 FC의 김태윤과 광주 FC의 김영빈이 있다. 특히 김영빈은 팬들에게 인터뷰 질문을 받을 때 질문의 절반 이상이 서장훈과 연관된 질문이 나올 정도 사진을 보면 확실히 닮았다. 그리고 2018년 1월 성남 FC의 김태윤이 광주 FC로 이적하면서 K리그를 대표하는 서장훈 닮은꼴인 두 명을 같은 팀에서 볼 수 있게 됐다. 농구계 서장훈 닮은꼴로는 조성민이 있다.

2017-18 프로농구 시즌에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 서장훈과 이상민의 11번을 공동 영구결번한다고 발표했다가 하루 만에 취소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는 서장훈보다는 이상민에 대한 삼성과 전주 KCC 이지스(현대전자)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장훈에게는 조금 억울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성타 사건의 김주성이 은퇴하기 전 서장훈에게 가장 많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2015년 4월 15일에 발매된 지누션의 한 번 더 말해줘의 뮤비에 나오기도 했다.

아는 형님을 통해 장성규 아나운서와 레드벨벳(특히 아이린)의 팬임을 자처하고 있다. 특히 장성규에게 주로 하는 말은 "그만 프리선언 했으면 좋겠어···. 너무 불쌍해···." 다만 아는 형님에서 다른 걸그룹이 나왔을 때도 안면이 있는 사이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가고 심지어 꽃놀이패에서 우주소녀의 멤버들의 이름까지 다 맞히고 아는 형님에서 걸그룹이 나오면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다. AOA가 아는 형님에 출연했을 때는 멤버들 이름은 다 알고 있는 것은 물론, 혜정이 "내가 고등학교 때 이것으로 잘 나갔다고. 이것이 무엇일까?"라고 하자마자 정답을 맞히기까지 했다.

2018년 8월 4일 JTBC 아는 형님 139회에서 나무위키를 언급하였다. 해당 영상의 마지막 부분(약 2분 40초 정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레드벨벳 멤버들의 신상 정보를 북측 관계자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멘션에 "나무위키 봤나 보다."라며 언급한다. 다른 방송에서도 게스트로 나오는 아이돌들의 신상 정보를 잘 아는 것으로 보아 본인도 나무위키를 참고하는 듯.

2019년 5월 4일 아는 형님 177회에서 IZ*ONE에게 치킨 쏘겠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멤버 전체가 장훈이랑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다고 했다.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 같은 운동선수 후배들이 고민상담을 하러 오는 것을 특히 좋아하며 많이 먹고 체력을 키우라며 개인 카드를 망설임 없이 쾌척한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의 스타일리스트와 동선이 겹쳐 선제적 대응으로 코로나 검사와 자가격리에 들어갔고 예정되어 있던 아는 형님 녹화를 한 주 쉬어갔다. 다행히 음성 판정. 그리고 한 주 만에 곧바로 복귀했다.

현주엽의 학폭 논란에 대해서 최초 폭로자의 농구부 동기 A씨가 현주엽의 1년 선배인 서장훈은 알고 있다며 해명을 요구하자 장훈은 스포츠 조선과의 단독 전화 인터뷰에서 "A씨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농구부도 아닌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나를 들먹이는지 모르겠다. 폭로자는 현주엽의 2년 후배고 해당 사건은 현주엽이 고 3일때 일어난거라고 했는데 내가 졸업한후의 일이라 직접 본적이 없으며 목격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말씀드리기 조심스럽다." 라고 전했으며 현주엽이 중학생때도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주엽이가 중학생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중등부와 고등부는 훈련 시간만 다를뿐 모든 시설 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교 선배들이 보는 앞에서 중등부가 감히 그런 행동을 할수 없다. 그 시절엔 운동부의 질서가 엄격했고 내가 현주엽의 폭력 행위를 본 것은 없었다."고 답했다. 폭행 관련 소문을 들은것이 없냐는 질문엔 "나에게 무슨 얘기가 들어온 기억은 없다. 나는 다들 아시다시피 농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내 앞가림하기도 바빴다. 타인에 대해 별 간섭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다. 당시 분위기는 고등부는 중등부 어린 애들이 뭘하는지도 신경쓰지 않았다. 중등부가 대회 우승을 해도 '그랬나 보다.' 하는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학창시절 주장도 아니라 후배들과 접할 기회도 적었다."고 답했다. 선수 출신 어머니, 사업가 아버지등 집안 배경으로 현주엽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 선수 출신 부모님은 현주엽 말고도 여러 분 계셨고 주엽이는 굳이 배경에 기댈 애도 아니었고 그때는 부모님들이 돌아가면서 가끔 선수들에게 고기 회식을 시켜주는것 외에는 선수 자식을 전적으로 선생님께 맡겨놓고 감히 간섭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현주엽이 무슨 특혜를 봤다? 그런 건 잘 모르겠다." 고 답했다.


7. 어록


저는 정말 농구를 더 잘하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최다 득점 기록자였지만 정말 정말 남과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은퇴할 때 말했지만 전 평생 후회하며 살 거예요.

더 어렸을 때 조금만 더 열심히 했다면, 더 몸 관리를 하고, 더 노력하고, 더 체력을 길렀다면 1만3,000점이 아닌 2만 점, 2만5,000점도 넣을 수 있었을 거에요. 나 혼자 능력의 한계 안에서 죽기 살기로 했지만 '이것 밖에 왜 못했을까'하는 후회를 평생 할 겁니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자 없다? 다 뻥이에요.

너 내가 아주 가만 안둬

너 죽어


8. 사건사고/논란


8.1. 음주운전


허재만큼은 아니지만 서장훈도 음주운전을 하다가 2차례나 적발된 적 있다.

첫 번째는 청주 SK 나이츠에서 뛰던 2001년 9월 23일, 무려 혈중 알코올농도 0.212%의 만취 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되어 불구속 입건 및 면허취소를 당했다.

두 번째로는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이던 2003년 3월 10일, 음주운전 단속에 적발되어 100일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 하필 당시 소속팀 삼성이 정규시즌 종료 후 플레이오프를 준비하던 상황에서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렸고, 거기에 삼성이 이 해 플레이오프에서 광탈하면서 서장훈에 대한 비난은 더 커지게 되었다.


8.2. 삐졌니?


무엇이든 물어보살 2021년 1월 4일분 방송에서의 말실수로 비판을 받고 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서 25년만에 연락이 왔는데 만나야 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라는 의뢰인을 향해 " 너 엄마한테 삐졌니? " 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해버린 것. 남편의 폭력을 피해 자식을 버리고 도망갈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사정을 이해하라는 취지는 좋았지만, 결론적으로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자식의 감정을 단순히 삐쳤다라고 표현하며 의뢰인의 감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셈이다.

지금껏 무엇이든 물어보살을 진행하며 통렬하고 날카로운 일침으로 호평받았던 서장훈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실수를 했다는 의견이 대다수. KBS N 유튜브 영상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서장훈에 대한 비판 댓글이 줄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의뢰인이 직접 달아놓은 댓글에서 이수근은 님이라는 호칭을 붙였지만 서장훈은 씨라는 호칭을 붙이며 선을 그은 것으로 보아 의뢰인에게도 큰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