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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화그룹 (Hanwha Group)은 대한민국의 기업 집단이다. 2020년 기준으로 재계서열 6위다.

 

 

 


2. 역사


1952년 조선화약공판 출신이던 현암 김종희가 부산에서 한국화약(韓國火藥) 주식회사로 창립한 게 그룹의 뿌리이다.

 

1955년 귀속재산 조선유지 인천공장을 불하받아 1959년 화약류 국산화를 달성했고, 1964년 신한베아링공업을 인수해 사업 확장의 기틀을 만들고 1965년 한국화성공업, 1966년 태평물산을 각각 세운 후 비서실을 설치했고, 1968년 삼호그룹으로부터 제일화재를 인수해 금융업에도 손을 뻗었다. 1969년 미국 유니온오일과 합작해 '경인에너지'를 세워 대한석유공사와 호남정유에 도전장을 던지기도 했다. 1973년 호텔/관광개발업체 태평개발을 세우고 1976년에 서울프라자호텔을 열어 서비스 사업에까지 진출하며 중견기업을 넘어 대기업 반열에도 오르게 되었다.

 

위와 같은 성장 와중에도 1977년 익산역의 흑역사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룹은 여전히 성장 드라이브를 이어갔다. 1981년 비교적 젊은 나이로 김종희 회장이 사망 하면서 당시 겨우 29살이던 장남 김승연이 2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1985년 한양그룹으로부터 한양유통을, 1986년 정아레저타운 등 구 명성그룹 관광계열사들을 각각 인수해 재계순위 10위권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1990년엔 'PRO 2000' 경영혁신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뒤 이듬해에 국내 기업으로서 최초로 환경경영 'ECO-2000' 운동을 벌였다. 1992년 빙그레가 분가하고 1993년 한국화약그룹에서 한화그룹으로 명칭을 변경한 뒤 1996년 제일화재가 분가했다. 반면 모기업 (주)한화는 1995~1996년까지 골든벨상사, 덕산토건, 한화전자통신, 한화기계 등을 합병해 종합사업군으로 개편했고, 소그룹제도 도입했으나 1997년 외환위기 후 폐지됐다. 그 이후 한화는 재계 6위권에 안착하여 국내 5대 대기업] 다음가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원래 이름은 당연히 한국화약 주식회사였고 그룹의 풀네임도 한국화약그룹이었지만 하필 본사의 영문 이름이 Korea Explosives인지라 그룹명은 Korea Explosive Group이 되어 버렸고, 고위관계자가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중국 측에서 이걸 '남조선 폭파집단'(!!!)이라는 지극히 테러 단체 같은 이름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그룹 이름을 한화로 바꿔야 했다. (그 근거로 자주 회자되는 것이 매일경제 1994년 4월 7일 신문, 34면에 해당 기사가 실려 있다.) 이후 중화권에서는 화약의 火 자가 아닌 빛날 화(華) 자를 써서 韓華로 표기하고 있다. 사실 한화가 화약을 통해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긴 했지만, 주력 사업들이 화약을 비롯해 각종 분야에 걸쳐 늘어나면서 '한국화약'이라는 기업명 자체도 변경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이 그 기폭제가 되었다고 봐야 할듯.


3. 참모 조직


그룹 참모조직의 뿌리는 셋으로 나뉜다. 1966년 비서실이 먼저 신설되어 1973년 경영관리실, 1974년 기획조사실이 차례차례 생겼고, 1980년에 기획조사실이 '종합기획실'로 변경되었다. 1990년 세 조직이 합쳐져 '경영기획실'이 됐다가 1994년에 '비서실'로 변경했으나, 1998년에 비서실을 폐지하고 '구조조정위원회'를 신설했다. 이후 2000년 '구조조정본부'로 개편됐다가 2006년 조직개편에 따라 '경영기획실'로 변경했다가 2017년에 폐지됐다.


4.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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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3개의 사옥 이외에도 세종대로, 여의도 증권가등 곳곳에 꽤 많은 사옥들을 가지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집무실이 위치한 가장 중심적인 사옥인 장교동 사옥은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

 

동여의도 남쪽에 위치한 한화63시티 사옥엔 한화생명이 입주해 있다. 이는 과거 신동아그룹의 계열사였던 시절 대한생명이 63빌딩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신동아그룹이 해체되고 한화가 매물로 나온 대한생명을 인수하면서 함께 굴러들어왔다.오우 이게 웬 횡재냐 이후 대한생명은 한화생명으로 개명을 하였고, 63빌딩도 한화63시티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2015년엔 63빌딩에 'Galleria DUTY FREE' 라는 이름의 면세점도 들어왔다. 동여의도의 북쪽에는 한화투자증권, 한화손해보험 통합 사옥이 들어와있다. 그리고 한화금융플라자로 불리우는 세종대로 사옥엔 한화생명, 한화투자증권, 한화손해보험의 일부 부서들이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장교동 사옥은 건축연한이 은근 오래되어(1987년 10월 완공) 노후화 문제나 협소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승연 회장은 3세경영 승계 전에 사옥을 이전하거나 or 현재 자리에 재건축하는 방안들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최종적으로는 사옥 외벽을 미디어월이 가능한 전면 유리 외벽 형태의 태양광 건축물로 리모델링하고 그 과정에서 내부도 함께 리모델링하여 사실상 새 건물로 탈바꿈시키는 방안이 선정되었다. 이후 2016년 4월 공사를 착공하여 2019년 11월 완공되었다.## 공간 협소 문제는 일단 보유 중인 사옥들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극복 가능하기에 넘어간듯 하다.


5. 특징


 

그룹명에 대해 말하자면, 한화는 韓國火藥을 줄인 것이지만 한자는 쓰지 않는다.韓華라는 표기가 있긴 하지만 이는 중국 진출을 위한 음역일 뿐이다. 한편, 한화그룹 중국어 홈페이지.를 보면 韓華의 간화자인 韩华로 나온다. 물론 태생이 태생이니만큼 韓火도 쓰이기는 한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韓華(韩华 포함)는 중화권 웹 페이지들이, 韓火는 일본어 웹 페이지들이 주로 검색된다. 한편 한국 화교를 줄여 한화(韓華)라고 부른다지만, 화교와는 상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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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으로 변경한 이유는, 1990년 중국에 사업차 간 간부들 앞에 중국 환영단이 나와서 반기는데, 환영한다는 플래카드에 그룹 영문 명칭이었던 Korea Explosives Group을 중국어로 번역 후 다시 한국어로 옮긴 듯한 "환영 남조선 폭파집단!"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출처1출처2[8] 실제로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영문 명칭을 보고 서구권에서는 이게 웬 테러집단? 이라고 해석한 것이 그룹 명칭 변경의 이유라고 한다. 밑에 소개하는 그룹 로고 중 가운데 마름모꼴 안에 K자가 보이는 로고[9]가 바로 Korea Explosives Group의 두문자이다.

 

구타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김승연 회장의 이미지에 더해, 대기업답지 않게 사훈에 "신용과 의리"가 있다는 사실도 주목을 받으면서 왠지 조폭 기믹이 덧씌워진 느낌. 사회 공헌 도 많이 하는 기업인데 오너의 화통한 성격 탓에 어째…이 성격의 예를 보여주는 사례가 서울 프라자 호텔 내부 공사를 할 때인데, 3개월간 호텔을 닫아야 하자 김승연 회장은 쿨하게 직원 전원에게 공사가 끝날 때까지 전부 유급휴가를 줬다.


6. 가계도


김재민 / 妻 오명철

1남 김종철 (1920 ~ 1986) 6선 국회의원 / 妻 유성은 (1922 ~ )

1남 김요섭 (1948 ~ )

2남 김신연 (1952 ~ ) 한화 이글스 대표이사 / 妻 정원옥

1녀 김수연 (1954 ~ )

3남 김시연 (1954 ~ 2008)

4남 김진연 (1956 ~ )

5남 김규연 (1960 ~ ) 천경해운 사장

6남 김광연 (1961 ~ )

2남 김종희 (1922 ~ 1981) 한화그룹 회장 / 妻 강태영 (1926 ~ 2016)

1녀 김영혜 (1948 ~ ) 前 제일화재 이사회 의장 / 夫 이동훈 (1948 ~ ) 前 제일화재 회장[1]

1남 이재환 (1972 ~ ) / 妻 손희영 (1972 ~ ) 동덕여대 교수

2남 이석환 (1973 ~ ) 한익스프레스 대표이사

3남 이준환

4남 이지환

1남 김승연 (1952 ~ ) 한화그룹 회장 / 妻 서영민 (1961 ~ )

1남 김동관 (1983 ~ ) 한화솔루션 대표이사 사장 / 妻 정OO

2남 김동원 (1985 ~ ) 한화생명 전무

3남 김동선 (1989 ~ ) 한화에너지 상무보, 前 마장마술 국가대표

2남 김호연 (1955 ~ ) 빙그레 회장 / 妻 김미 (1959 ~ )

1남 김동환 (1983 ~ ) 빙그레 과장 / 妻 가OO (1987 ~ )

1녀 김정화 (1984 ~ )

2남 김동만 (1988 ~ )

1녀 김종숙 / 夫 김영일 한화에너지 부사장

3남 김종식 (1935 ~ 2009) 국회의원 / 妻 문영숙

1남 김정연

1녀 김서연

2남 김도연

3남 김원필

현암 김종희 창업주는 미군들이 붙여준 별명이 '다이너마이트 김' 일 정도로 화끈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특히 경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을 구타하자 김종희가 나서서 그 일본인 학생을 구타했고 김종희는 이 일로 퇴학을 당했다.

 

김종희 창업주가 후계자를 정해두지 않은 상태로 1981년 58세의 나이로 급사하면서 아직 20대였던 김승연-김호연 형제 간에 분쟁이 폭발하였다. 일단 명분상의 우위를 가진 장남 김승연이 불과 29세의 나이로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형제 간의 재산분쟁은 10여 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1993년 차남 김호연이 그룹 계열사 중의 하나인 식품기업 빙그레를 가지고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딸 김영혜도 1996년 제일화재를 들고 분가했으나 2008년 제일화재가 그룹으로 돌아왔고, 대신 한익스프레스를 인수했다.

 

김승연은 슬하에 3남을 두고 있는데, 장남은 현재 한화큐셀 전무로 경영수업을 받으면서 3세 경영권 승계자로 사실상 점쳐지는 분위기이다. 사건사고를 하나씩 달고 있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사고를 친 적이 없어 평이 매우 좋다. 둘째 아들 김동원은 사고 치고 다니다 수감된 적도 있고, 셋째 아들은 승마 선수로 성공하며 잘 사는 듯 했으나 계속 되는 술집 난동으로 비난과 질타를 받고 있다. 최근엔 변호사 폭행으로 한화 오너 일가의 조폭 이미지를 강화하는 중이다.

 

셋째 김동선의 2017년초 술집 난동 이후에 둘째 김동원은 한화생명을 비롯한 금융 계열사에서 재직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2018년 생각치도 않은 깜짝 실적으로 잠시 경영 능력이 호평을 받기도 했다.

 

김호연은 백범 김구의 손녀와 결혼한 인연으로 김구기념재단의 이사장을 맡기도 했으며, 18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범 한화가의 지역 연고인 충남 천안시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이후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선 다시 낙선하였다.


7. 병역


한화가는 범현대가와 함께 병역 관련해서는 깨끗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승연 회장은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했고, 김승연 회장의 아들 셋도 병역 의무를 이렇다 할 잡음 없이 깔끔히 마쳤다. 이는 한화의 근원이 한국화약이라는 방산업체이기 때문에 김승연이 병역 문제에 대해선 확실하게 해야한다는 지론 때문. 면제가 판치고 끽해야 공익근무 출신이 섞인 다른 재벌가 총수와 자제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부분 중 하나.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과 차남 김동원은 각각 하버드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처럼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했다. 이 집안은 특이하게도 ROTC는 없이 학사장교로만 복무했는데 뭐 장교는 장교니 사실 해외 대학교를 나왔으니 ROTC는 당연히 못한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나온 셋째 아들 김동선은 현역 출신은 아니지만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승마 금메달리스트로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았으므로 별다른 논란이 없다. 김동선은 꾸준히 승마 선수로 활동하며 2010, 2014년에도 모두 금메달을 땄고 2016 리우 올림픽에도 대표로 출전했다.

 

추가로 지금은 빙그레로 분리해 나간 동생 김호연 일가도 김호연 본인은 김구의 차남인 김신 장군의 사위이며, 장인처럼 공군 장교로 복무해 중위로 만기전역했다. 김호연의 차남 김동만 역시 공군 장교로 복무했고 심지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누나 김영혜도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 김호연의 장남은 공익 근무이긴 했지만 적어도 면제는 아니며, 2년동안 국방의 의무를 다한 병역필이다.


8. 기업정신


8.1. 기업이념


신용과 의리


8.2. 역대 사훈


1952~1959

신념, 용기, 봉사

1960~1973

회사발전을 위해 과감히 일하자

책임을 느끼고 책임질 줄 알자

고객에게 친절하고 예의를 지키자

물자를 아껴쓰고 낭비를 없애자

청결과 정돈에 힘쓰자

1974~1975

의욕을 갖고 일하자

책임을 지고 일하자

회사발전을 위해 노력하자

1976~1992

적극적으로 일하자

합리적으로 일하자

국가사회에 기여하자

1993~2006

신의, 분수, 최선

2001~2006

인재존중, 혁신추구

2007~2011

신뢰, 존경, 혁신

2011~

도전, 헌신, 정도


8.3. 사가


 

구 버전: 작사는 이은상, 작곡은 김성태가 맡았으며, 1980년에 제정되었다.

(1절)우리는 이 나라 산업의 역군

협동과 사랑 속에 힘이 솟는다

창의와 실천은 우리의 자랑

오늘도 즐거이 사명 다하자

 

(후렴)한화그룹[16] 깃발 아래 뭉치고 뭉친 동지들

겨레와 인류 앞에 봉사하리라

 

(2절)우리는 슬기론 산업의 역군

내일을 내다보며 희망에 찼다

의욕과 용기는 우리의 자랑

힘차게 세계로 뻗어나가자

 

신 버전

 

 

 

신용과 의리로 가꾸어 온 우리 한화

한데 뭉쳐 나아간다 정상의 신화로

 

겨레와 인류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꿈의 불꽃 쏘아 올리며 세계로 나가자

 

한화의 깃발 아래 하나가 되어

환한 세상 밝혀주는 큰 빛 되리라


9.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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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세계적인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에게 의뢰해 CI를 교체하였다. 1990년대 재벌 그룹들 사이에서 로고 변경이 유행할 때 1994년 10월 한 차례 변경(위의 H 모양 로고)하였으나 12년만에 다시 교체한 것. 다른 그룹 로고들이 보수적으로 보일 정도로 튄다. 그룹 상징색은 오렌지색으로, 화약에 기인한 것 같다.

 

1953년 창립 때부터 쓰인 톱니바퀴 모양 로고의 상징을 말하자면, 톱니바퀴는 기간산업을 토대로 한 기업경영에의 의지를 나타내며, 아래 원 모양은 지구를 뜻한다. 또 구 위의 횃불은 평화와 미래의 길잡이로서 온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화약의 의지를 상징했다. 양 옆 망치는 장인정신을 지니고 근면, 성실의 자세로 일하는 근로자를 나타낸다. 또 하단 KEC는 한국화약의 영문 약자였다.

 

1964년부터 개정된 마름모 로고의 상징을 말하자면, 마크 중앙의 'K'자는 한국화약(주)와 한국화약그룹의 이미지를 통합하고, 입체적으로 구성된 다이아몬드는 상향으로 경사각을 이루어 상승기세를 반영하고 있으며, 마름모와 4면의 모서리는 세계 어디라도 진출한다는 적극적 기상을 표상한다.

 

왼쪽에 소개된 1994년판 로고의 상징을 말하자면, 우주를 상징하는 주황색 타원 위에 그룹 이니셜을 첨단지향의 역동적 형태로 각인하여 국제적 초우량기업에의 도전의지를 표상했다. 철학적 의미로는 모든 생명의 근본인 우주 속에 그룹의 생성과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요소가 조화되어 인류문명의 진화, 발전에 공헌하며 현재의 장과 미래의 장을 연결하는 그룹 다이나미즘을 담았다.

 

2007년부터 쓰고 있는 '트라이서클' 로고의 상징을 말하자면, 로고를 이루는 3개의 원은 변화와 혁신을 통해 우주 속으로 무한 진화, 팽창, 성장해 나가는 걸 의미하며, 고객과 사회, 인류가 서로 힘을 합하며 발전해 세계 속의 그룹으로 표상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10. 역대 슬로건


미래창조 세계도전 (1995~1996)

Dreams are to same: 같은 꿈을 꿉니다. 한화 (2003)

당신의 꿈을 믿습니다 (2004)

늘~가까이! 한화 (2005)

Your Dreamworld (2007~2009)

내일을 키우는 에너지 (2011~2015)

나는 불꽃이다 (2015~2018)

지속가능한 내일 (2019~ )


11. 사업 분야


화학/제조/건설이 주력 분야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매출도 그렇고 순이익도 그렇고 한화그룹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금융 계열사가 제조/건설보다 더 높다.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한화에서 가장 자산가치와 매출액이 높은 기업은 한화 화약부문도, 한화건설도 아닌 한화생명 이었다. 다만 삼성-한화 빅딜을 계기로 제조업 계열사를 대거 인수하면서 15년에는 제조업이 앞지를 것으로 예상되었고 2017년을 기점으로 한화토탈의 영업이익이 한화생명을 추월했다. 최근까지는 그룹 전체 영업이익의 거의 절반을 한화토탈 혼자서 책임질 만큼 비중이 컸다.

 

현재 군수 분야에서는 주로 화약, 포탄, 로켓 추진체 등을 생산 중이며, 항공기용 유압부품 등도 생산 중. 단순 로켓을 넘어 미사일, 집속탄(!) 전체를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기도 하다. 또한 불꽃놀이에 쓰는 폭죽도 만드는데, 새천년을 앞둔 1999년에는 밀레니엄 특수를 타고 전 세계적으로 폭죽의 수요가 늘어난 바람에 반짝 호황을 맞기도 했다고 한다. 나름대로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예술 폭죽 제작력은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듯. 하지만 현재는 단가 등의 이유로 폭죽을 생산하지 않고 외국(주로 중국, 일부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며, 불꽃놀이를 연출하는 연화연출팀 만 유지하고 있다. 북핵 위협을 구실로 잠시 중단했다가 다시 여의도 앞에서 하고 있는 서울세계불꽃축제를 후원하는 기업도 바로 한화. 그리고 불꽃놀이 발사 장소가 한화그룹 소유 건물인 63빌딩 앞이라는 점도 흠좀무.

 

2000년대 후반부터 그룹의 제조업 부문을 태양광 발전 산업 수직계열화 체제로 전환했는데, 중국업체들의 난립과 미국의 반덤핑 과세 때문에 태양광산업이 시들시들해져서 제대로 피를 보고 있다. 어차피 태양광발전은 시대적인 숙명이자 과제라서 결국은 빛을 보겠지만, 문제는 그 시기가 너무나도 일렀다는 것.

 

그나마 다행인 건 그룹 차원에서 사활을 걸고 따낸 수십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신도시 건설사업은 총수인 김승연 회장의 구형이 집행유예로 끝나서 한화건설 같은 비화학계열 회사 관계인으로는 활동이 가능하고, 공사 지역이 이라크 지역 내에서 주요 내전과 동떨어진 곳이라는 점이다. 다만 IS가 100여 km 떨어진 라마디를 함락하면서 건설현장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였지만 미국의 항공지원을 등에 업은 이라크군의 반격으로 구사일생했다.

 

2005년에 63빌딩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천억 원대에 이르는 대형 공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열사인 한화건설이 입찰에 탈락해서 말이 많았다.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 이후로 단단히 찍혔는지, 아래 총수 일가의 내력에서도 볼 수 있지만 경제민주화 여론이 조성될 때마다 검찰에게 얻어맞고 있다(…).

 

2014년 계열 전체 매출액은 49.2조 원, 자산은 132.8조 원(㈜한화의 연결조정 감안)이다. 금융부문은 자산비중 70.8%(103.3조 원), 매출 비중 37.5%(20.2조 원)을 차지하고 있으며, 비금융부문은 자산비중 29.2%, 매출비중 62.5%로 파악된다. 그룹 전체 영업이익은 9,600억.

 

비금융 주력사업은 석유화학 산업으로 자산비중 8.9%, 매출비중 24.7%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화 무역사업이 포함된 무역/도소매부문이 2.7%, 12.2%의 비중으로 뒤를 잇고 있다. 그 외에는 화약(자산 비중 6.3%, 매출비중 7.8%), 건설(4.4%, 6.6%), 태양광(2.9%, 4.3%)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22]

 

사회분야에 문외한 일반인도 한화하면 떠올릴 정도로 가장 행복하고 유명한 계열사인 한화 이글스 프로야구단도 운영하고 있다.


12. 그룹사


 

지배구조 출처. 상기 자료와 홈페이지의 계열사 소개를 참고하여 작성한다. 2014년 삼성-한화 빅딜을 반영하기 이전 기준으로, 42개의 비금융 기업(상장 4개, 외감 29개, 일반4개)과 10개의 금융기업(상장 3개, 외감 4개, 일반 3개)을 소속으로 두고 있다.

 

금융 계열사의 경우 금산분리법에 따라 금융지주회사를 세우기 애매해 한화그룹 계열사로 되어있다. 대외적으로는 한화금융네트워크라는 브랜드를 쓰고 있다.

 

한화그룹 자체에서 설립하지 않은 회사도 많은 편이다. 특히 레저부문은 명성그룹이 해체될 때 넘겨받았고, 한화탈레스, 한화테크윈, 한화토탈 등은 M&A를 통해 인수한 기업들이다.어째 삼성그룹에서 사들인 기업만 써놓은 것은 기분 탓이다. 특히 삼성이 비주력부문인 화학 부문에서 손을 떼는 과정에서 매각한 화학 관련 계열사의 상당수를 사들여, 화학 부문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활발한 인수합병으로 한화그룹은 덩치를 크게 키워 오늘날의 그룹집단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12.1. 제조/건설


한화: 사업 지주회사이자 그룹의 모태다. 화약/방산, 무역, 기계의 3가지 사업 부문을 영위하고 있다. 2014년 별도 기준 5조의 매출과 1,600억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사업보고서를 보면 '화약제조업'이 1조 2천억, '기계제조업'이 1,600억, '도소매업'이 3조 6천억을 올렸다고 나와있다. 화약제조업이 화약/방산을 더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결기준, 즉 한화가 종속회사로 두고 있는 주요 계열사들의 실적을 모두 합한 결과는 14년 37조 4천억의 매출과 5,158억의 영업이익이다. 상술한 그룹 전체의 실적보다 낮은 것은 한화의 연결대상에 해당되지 않는 일부 계열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구 삼성테크윈. 방위산업체이다. 본사를 2018년 4월 창원으로 이전하였다. 1977년, 항공기 엔진 사업 및 필름 카메라 사업을 토대로 설립되어 시큐리티, 에너지 장비, 산업용 장비, 방위산업 분야의 사업을 영위했었다. 2017년과 2018년에 차례로 분사한 이래로 항공우주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2018년 4월 한화테크윈에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로 변경하였다. 기존의 명칭은 시큐리티 사업을 분할해 신설한 자회사가 이어받는다.

 

한화디펜스: 2017년 한화테크윈에서 분리돼 한화지상방산으로 출범했으며, 2019년 (구)한화디펜스를 통합했다.

 

한화시스템: 2018년, 방위산업체를 담당하는 한화시스템과 그룹사의 IT를 담당하는 한화S&C가 합병하여 한화시스템이 출범했다. 현재 한화시스템/시스템과 한화시스템/ICT 두가지 부문을 영위하고 있다.

한화시스템/시스템 구 삼성탈레스. 마찬가지로 방위산업체이다. 프랑스 탈레스 社와 합작이었고 지분율은 탈레스 50%, 한화테크윈 50%였었다. 이는 구 삼성탈레스 시절의 5:5 지분율을 이어받은 것. 구축함 전투지휘체계, 열영상 감시장비, 탐지추적장치 등 각종 군사장비를 제조하며 특히 레이더·전자광학, 전투체계, 지휘통제·통신 등 정밀전자와 소프트웨어 분야의 독보적인 기술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14년 6,700억의 매출과 260억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한화그룹에 인수되며 사명을 한화탈레스로 바꿨으며, 이후 탈레스 측이 합작을 포기하고 한화 측에 지분 전량을 매도하기로 함에 따라 한화그룹이 탈레스의 잔여지분 50%를 모두 인수했다. 이로서 더 이상 합작회사가 아니게 되어 탈레스의 명칭을 쓰지 못하자 한화시스템으로 사명을 바꿨다.

한화시스템/ICT: 그룹 내 IT를 담당하고 있다. 1997년 (주)한화의 정보부문으로 발족 한 뒤, 규모가 커짐에 따라 2001년 한화S&C로 분사했다. 이후 한화그룹의 ICT를 담당했으며, 2018년 한화시스템과 합병하게 되었다.

 

한화테크윈: 한화테크윈 영상보안부문이 2018년 분리되어 신설되었다.

 

한화정밀기계: 한화테크윈 산업용장비부문이 2017년 분리되어 신설되었다. 이어 로봇사업도 편입되었다.

 

한화파워시스템: 한화테크윈 에너지장비사업본부가 2017년 분리되어 신설되었다.

 

한화솔루션: 케미칼, 큐셀, 첨단소재 3개 부문으로 구성된 종합화학회사로, 케미칼 부문은 1965년 설립 이후 국내 PVC(폴리염화비닐), LDPE(저밀도 폴리에틸렌), LLDPE(선형 저밀도 폴리에틸렌), CA(염소·가성소다)를 국내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지난 50여 년 동안 각종 산업의 기반이 되는 기초화학제품을 생산해 온 종합 화학 회사이다. 자세한 사업 내용은 여기를 참고. 2015년 9월 기준으로 한화첨단소재, 한화갤러리아, 한화화인케미칼 등을 종속회사로 두고 있다. 태양광 사업도 이 회사에서 담당 중. 14년 연결 기준 8조의 매출과 1,400억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한화컴파운드: 자동차나 휴대폰 부품 등을 생산하는 업체로, 구 삼진화학-한화폴리드리머-한화넥스트. 2015년 (구)한화컴파운드와 합병해 현재 형태로 바뀌었다.

 

한화케미칼오버시즈홀딩스: 한화케미칼의 중동 합작사들을 총괄하는 지주사이다.

 

한화종합화학: 구 삼성종합화학.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의 원료인 PTA(고순도 테레프탈산)를 생산하여 섬유원료의 국산화를 이뤘다. 울산 및 대산 사업장에 국내 최대인 연산 200만 톤 규모의 PTA 생산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14년 1조의 매출과 47억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한화토탈: 구 삼성토탈. 프랑스 토탈 社와 합작으로 설립됐다. 지분율은 역시 5 : 5. 에틸렌, 프로필렌 등 기초유분부터 SM(스틸렌모너머)·PX(파라자일렌) 등 화성 제품, PE(폴리에틸렌)·PP(폴리프로필렌) 등 생활 속에 다양한 소재의 원료로 쓰이는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14년 8조 8천억의 매출과 1,700억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그런데... 15년에 엄청난 실적을 거두면서 한화토탈 인수가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영업이익을 보면 3분기까지 누적 5,700억으로 14년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고, 한화그룹의 주요 계열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안에 들어가는 수준.

 

한화종합화학글로벌: 한화종합화학의 해외사업 투자 자회사이다.

한화글로벌에셋: 2019년에 기존 한화큐셀앤드첨단소재 법인이 사업부를 분사시킨 후 출범한 지주회사이다.

한화솔라홀딩스: 한화큐셀과 한화솔라홀딩스의 합병법인. 구 한화큐셀은 그룹 차원에서 신성장 동력으로 밀어주고 있는 태양광 발전 산업을 영위하는 계열사 중 하나. 태양광 발전의 미드스트림에 해당하는 잉곳·웨이퍼·셀·모듈 생산부터 개인 주택·상업 시설·대형 발전소에 이르는 다운스트림 분야의 솔루션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한화케미칼 태양광 부문이 15년 4조에 달하는 매출을 기록한 것과 달리 14년 2,500억에 불과하다. 영업이익은 180억 손실.

 

한반도태양광

영암테크노태양광

영암해오름태양광

하이패스태양광

해사랑태양광

해돋이태양광

해넘이태양광

석문호수상태양광

해누리태양광

해나라태양광

해맞이태양광발전

한마을태양광

한으뜸태양광

아침태양광

수리태양광

라온태양광

마루태양광

소수태양광

미르태양광

아란태양광

워터솔라

드림라인쏠라파워4호

드림라인쏠라파워5호

티지솔라넷

한화솔라파워글로벌

 

여천NCC: 대림산업과 합작으로 세워진 기업이다. 지분율은 정확히 5 : 5. 일단 한화케미칼의 자회사로 분류하지만 연결대상 기업은 아니다. 즉, 실적을 합산하여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하지 않는다. 연간 에틸렌 191만 톤, 프로필렌 97만 톤과 벤젠, 톨루엔, 크실렌, 스티렌모노머, 부타디엔 등 석유화학 공급 원료 232만 톤을 생산하고 있다. 14년 7조 1천억의 매출과 1,300억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한화에너지: 전기 373MW, 스팀 1,950톤 규모의 설비용량을 갖춘 최신 열병합 발전소를 운영하며 여수국가산업단지와 군산 2국가산업단지 입주 기업을 대상으로 양질의 전기와 열을 공급하고 있다. 14년 매출 4,600억에 영업이익 1,700억을 기록했다.

대산그린에너지

SIT테크

에스아이티

천장산발전

 

한화건설: 15년 도급순위 기준 11위의 종합 건설사이다. 14년 3조 3천억의 매출과 4,100억(!)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15년 3분기 누적 기준으로도 2,800억에 달하는 손실을 보았었다. 15년 3분기 부채비율도 273%로 상당히 높은 편. 그러나 2016년부터 영업이익이 개선되어 2017년을 제외하고 2500억 ~ 1200억 원의 순이익을 내고 있다.

양주에코텍

에코이앤오: 김포 등지 하수처리장 운영사이다.

레이크파크에이치

한화에스테이트: 구 에스엔에스에이스. 시설관리 등 부동산서비스 전담 업체이다.

한화에스테이트서비스: 주거시설 관리 자회사이다.

한화도시개발: 한화도시개발은 지난 2001년부터 대덕테크노밸리 조성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민간주도 첨단 복합산업단지개발의 선두 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화도시개발이 조성한 주요 산업단지는 여기를 참고. 한화케미칼이 100%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경기용인테크노밸리

김해테크노밸리

서산테크노밸리

아산테크노밸리

안성테크노밸리

제이용인테크노밸리

에이치밸리: 구 경기화성바이오밸리.

농업회사법인 그린투모로우

서울역북부역세권개발

에이치피앤디


12.2. 금융


한화생명: 옛 명칭은 대한생명. 1946년에 설립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 역사를 지닌 생명보험사이다. 2016년 자산 100조원을 돌파했다. 14년 매출 14조 8천억에 영업이익이 4,800억에 달하는 거대 보험사이자 한화의 주력 계열사이다. 2018년 4월 16일 메인 스폰을 하던 락스타이거즈를 인수해 Hanwha Life Esports 약칭 HLE로 재창단했다. 젊은 층에 인지도 있는 롤을 노려 추후에 고객으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보인다.

 

한화라이프에셋: 2005년 대한생명의 텔레마케팅 부문이 분사된 업체이다.

한화손해사정: 2005년 대한생명의 보험심사부문이 분사된 업체이다.

한화자산운용

한화금융에셋: 한화생명의 보험대리점 자회사이다.

한화손해보험: 옛 명칭은 신동아화재. 1946년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국내 최초의 손해보험사로서 현재 원수보험료 4조 원, 총 자산 10조 원대 규모를 갖춘 중견 보험사로 성장했다. 장기, 자동차, 일반보험 등 다양한 상품 포트폴리오 갖추고 있다. 14년 5조 3천억의 매출과 277억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캐롯손해보험: SK텔레콤, 현대자동차, 알토스벤처스 등과 합자한 국내 최초 온라인 자동차보험사이다.

한화투자증권: 2014년 매출 9,700억에 6조 7천억의 자산을 굴리고 있는 중견 증권사이다.

데이터애널리틱스랩: 빅데이터 분석 자회사이다.

한화인베스트먼트

한화저축은행


12.3. 서비스/레저


한화호텔앤드리조트: 1979년 명성그룹 주도 하에 국내 최초의 콘도미니엄으로 설립됐으며, 1983년 명성그룹 붕괴 후 법정관리를 받다가 1986년 한화에 인수되었다. 410개의 객실을 갖춘 럭셔리 부티크 호텔인 더 플라자를 비롯, 12개 직영 리조트와 4,800실 이상의 객실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콘도미니엄 체인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시장으로의 진출 또한 활발해 일본 나가사키의 오션팰리스 골프클럽&리조트, 사이판 월드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다. 주력 산업으로 리조트, 호텔, 레저, 푸드 서비스 등을 운영한다. 14년 매출 1조에 110억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참고로 (주)한화의 종속기업이다.

 

여수씨월드: 한화 아쿠아플라넷 여수 개발 및 운영법인이다.

 

일산씨월드: 한화 아쿠아플라넷 일산 개발 및 운영법인이다.

플라자디앤씨: 호텔사업 자회사이다.

한화역사: 서울역, 청량리역과 같은 민자역사를 운영하고 있다. 청량리역사는 애초에 롯데에 임대했고, 서울역사 신관은 '갤러리아 서울역점'으로 운영하다가 서울역 신축 후 '갤러리아 콩코스'로 한동안 명맥을 이어갔으나, 인근 명동 롯데백화점 본점과 신세계백화점 본점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역세권 백화점이 흥한 일본과 달리 소위 '뜨내기' 고객이 많은 서울역의 특성상 적자만 기록하다 결국 '롯데 아울렛'에 자리를 넘겨줬다. 그동안 보유하던 구 역사 점유권마저 국가에 넘겼다.

한화갤러리아: 갤러리아백화점을 운영하는 곳. 비록 신세계나 현대백화점이나 롯데에는 밀리지만 그래도 메이저 백화점으로써 인정받고 있다.

한화에스테이트

한화 63시티: 63빌딩의 위락시설을 운영,관리하는 곳. 업무시설은 한화생명의 본사라서 거기서 관리한다.

 

한화 이글스: KBO리그 소속 프로 야구단이다. 각 계열사들과 김승연 회장이 나눠서 지분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한화의 인지도를 굉장히 크게 높혀주는 역할을 하고있는데, 일례로 각 기업마다 떠오르는 사업을 조사했는데 한화그룹은 한화생명을 제치고 한화 이글스가 선정 되었었다.

 

12.4. 매각/해산


검단에코텍: 2013년 지분매각.

경인해운: 1997년 편입된 후 2000년 청산.

경향신문사: 1998년 사원주주들에게 매각.

고려씨스템산업: 김종희 창업주의 사위 이동훈이 총괄했던 컴퓨터 제조업체로, 1991년 파산.

골든벨상사: 1995년 (주)한화에 합병.

공영화학공업: 1972년 한국화성공업에 합병.

군장열병합발전: 2012년 여수열병합발전에 합병.

군포에코텍: 2014년 지분매각.

김포요업: 1980년 태평양건설에 합병.

당진테크노폴리스: 2011년 청산 후 '예스인베스트'로 변경했으나, 2015년 폐업.

대덕테크노밸리: 2011년 청산 후 2014년 폐업.

대한플라스틱공업: 1972년 한국화성공업에 합병.

덕산토건: 구 중앙건영. 1988년 태평양건설 전직 임직원들이 인수해 운영했다가 1996년 (주)한화에 인수합병.

동양화학공업: 1972년 한국화성공업에 합병.

동일석유: 2006년 계열분리.

동주가스: 1999년 동일석유에 합병.

(신)드림파마: 2015년 근화제약에 인수합병.

마이크로에어로봇: 2010년 (주)한화에 합병.

명성: 1989년 한국국토개발에 합병.

부평판지: 한동안 위장계열사였다가 1997년 정식편입 후 2004년 한화기계에 합병.

빙그레: 상술했다시피 원래 한화그룹의 계열사였지만, 김승연으로의 승계 과정에서 동생 김호연과 분쟁이 있었고, 1992년 김호연이 빙그레를 분리하여 독립했다. 1998년 공정거래법상 완전 분리.

산다: 구 국제전광사. 1988년 한국화약에 합병.

삼희통운(현 한익스프레스): 1989년 이석범 대표에게 매각됐다가 2005~2006년까지 보유지분을 태경화성에 판 후, 2009년에 김종희 창업주의 딸 김영혜에게 넘어갔다.

서울교통공사: 옛 명성그룹 계열 전세버스 운송업체로, 동명의 지하철 공기업과는 다르다. 한동안 위장계열사있다가 1994년 정식 편입 후 1996년 삼희관광에 합병.

서천관광개발: 1996년 한국국토개발에 합병.

성운물산: 유조선 해운업체로, 1990년 경인에너지에 합병.

성주랜드: 2005년 한화국토개발에서 분할됐다가, 얼마 못 가 한양상선에 매각 후 이듬해 합병.

수원관광: 1996년 한화관광에 합병.

씨스페이시스: 2006년 NHDL에서 분할한 법인으로, 편의점 '씨스페이스' 운영업체이다. 한화갤러리아가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규모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매우 경영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는데 2016년 우린이라는 기업에 매각되었다.

아크런: 2006년 (구)드림파마에 합병.

양주엔바이로: 2013년 청산.

에이치컴파운드: 구 대림산업 여수 컴파운드공장. 2015년 한화넥스트에 합병.

에이치팜: 구 한국센트랄제약-덕산센트랄제약-센트랄제약-한화/의약부문. 2004년 (구)드림파마에 합병.

엔갤러리아: 2001년 한화유통에 합병.

엔에이치엘개발: 구 NHDL에서 물적분할된 해상화물운송 업체로, 2016년 해산이 결의.

오트론: 자동응답전환기, 유무선전화기, 휴대폰 생산업체로, 1998년 퇴출 후 사업부가 (주)한화 정보통신부문으로 흡수.

우영석유: 1994년 동양연료에 합병.

우풍화학공업: 1972년 한국화성공업에 합병.

이천가스: 1999년 동일석유에 합병.

정아건설: 1989년 한국국토개발에 합병.

정아관광: 지리산프라자호텔 운영업체로, 1989년 한국국토개발에 합병.

정아칸트리클럽: 구 명성칸트리클럽. 1989년 한국국토개발에 합병.

제삼석유: 경인에너지 석유제품 판매업체로, 1989년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지분매각했다가 1994년 재인수 후 동양연료에 합병.

제일특산: 1999년 한화유통에 합병.

제일화재: 1996년 김영혜의 주도로 독립했다가 2008년 재인수 후 2009년 한화손해보험으로 합병.

태경화성: 한동안 위장계열사였다가 2011년 정식 편입됐으나, 2018년 청산종결.

태안리조트: 2011년 한화호텔앤드리조트에 합병.

태평양건설: 1987년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해외건설 면허 반납 후 1996년 한화개발에 합병.

태평양엔지니어링: 1985년 태평양건설에 합병.

프라자골프개발: 2010년 한화호텔앤드리조트에 합병.

푸르덴셜자산운용: 구 국민투자신탁운용-현대투자신탁운용. 2011년 한화투자신탁운용에 합병.

한국강구공업: 2004년 한화기계에 합병됐다가 2006년에 'KBR'로 재분사.

한국다우케미칼: 1984년 한양화학지주에 합병.

한국비커스: 1993년 한국종합기계에 합병.

한국전자증명원: 2004년 계열분리 후 2014년 폐업.

한양상사: 2006년 청산.

한양전기화학: 1984년 한양화학지주에 합병.

(구)한양화학: 이하 동일.

한컴: 구 삼희기획. 2015년 두산그룹 계열 광고계열사 오리콤에 매각되었다.

한화개발: 구 태평개발. 플라자호텔 운영업체로 2009년 한화리조트에 합병.

한화관광: 구 삼희관광. 한동안 위장계열사였다가 1994년에 정식 편입됐으며, '빙그레투어' 및 '한화 이글스 세계여행'으로도 유명했다. 1998년 퇴출 후 일부 조직 및 인력이 한화국토개발로 흡수.

한화나노텍: 2013년 한화케미칼에 합병.

한화도시개발: 2006년 (구)드림파마에 합병.

(구)한화디펜스: 옛 명칭은 '두산DST'로, 2019년 한화지상방산에 합병.

한화바스프우레탄 (현 한국바스프): 1997년 지분매각.

한화베이시스: 구 한화파이낸스-드림파마. 2014년 한화케미칼에 합병.

한화소재 (현 한양소재): 벨기에 솔베이 사와의 합작사로, 2004년 박팔용과 배청에게 매각되어 계열분리.

(구)한화에너지 (현 SK인천석유화학): 구 경인에너지. 1999년 현대그룹에 매각.

(신)한화에너지 (현 포스코에너지): 구 경인에너지-한화에너지-(주)한화/에너지부문. 2000년 계열분리 후 한국종합에너지가 됐다가 2005년 포스코에 매각.

한화에너지프라자: 구 동양연료. 1999년 현대정유에 인수합병.

한화자동차부품 (현 한온시스템EFP코리아): 구 한국자동차부품. 미국 포드와의 합작사로 1998년 캐나다 테스마 사에 매각.

한화전자정보통신: 구 동양전자통신. 1996년 (주)한화에 합병.

한화정공: 구 삼미정공. 1995년 한화기계에 합병.

한화종합금융: 구 삼희투자금융. 1998년 퇴출 후 2012년 법인 소멸.

(신)한화L&C (현 현대L&C): 2014년 분사 후 얼마 안 가 미국 MPSE에 매각.

한화청량리역사: 2011년 한화역사에 합병.

한화큐셀앤드첨단소재: 2020년 한화케미칼에 합병.

한화큐셀코리아: 2018년 한화첨단소재에 합병.

한화투어몰: 구 한화국토개발 여행사업부-투어몰닷컴. 2004년 계열분리 후 2005년 '투어몰여행'으로 변경됐다가, 2006년 세중나모여행에 매각되어 2007년 합병.

(구)한화투자증권: 구 국민투자신탁-국민투자신탁증권-현대투자신탁증권-푸르덴셜투자증권. 2014년 한화증권과 합병.

한화포리마: 구 유니온포리마. 2003년 삼진화학에 합병.

한화화인케미칼: 2016년 한화케미칼에 합병.

한화GKN (현 한국GKN): 1998년 영국 GKN 사에 매각.

한화NSK정밀 (현 한국NSK): 구 한국정밀. 1998년 일본 NSK에 매각.

한화S&C: 구 (주)한화 정보부문. 2018년 한화시스템에 합병.

해남석유: 1994년 동양연료에 합병.

환경시설운영: 2016년 에코이앤오에 합병.

휴먼파워: 2018년 유클릭에 매각.

FAG한화베어링 (현 셰플러코리아): 구 한화기계 베어링부문. 2003년 지분매각.

SKF한화자동차부품: 1998년 스웨덴 SKF 사에 매각된 후 SKF자동차부품으로 변경됐다가, 2009년 SKF코리아에 합병.


13. 관련 학교법인


학교법인 북일학원

북일고등학교: 북일학원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2008년 일반 고등학교에서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로 전환한 후 천안북일고등학교에서 북일고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북일여자고등학교: 역시 북일학원에서 운영하는 여고. 일반 사립고로, 북일고와 입구와 일부 건물을 공유할 정도로 가까이에 위치.


14. 사건사고


14.1. 김승연 일가


1993년 11월 거액의 외화를 밀반출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듬해 1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47억 2천여만 원을 서울형사지법에서 판결받았다.# 이후 1995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었다.

 

2007년, 김승연 회장이 둘째 아들을 건드린 술집 종업원을 경호원을 동원해 폭행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두목님이라는 별명을 획득. 실제 복싱 마니아로 알려져 있는데다 정말로 한국-아시아-국제 아마추어 복싱 연맹 회장 테크를 타서 도합 30년 동안 역임했다. 그리고 누가 '화약' 기업 아니랄까봐 도금한 권총(!)으로 협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보복 폭행도 문제지만 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뒷처리를 하고 전직 경찰청장 등 경찰 고위층에 로비를 하여서 사건화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한 달 넘게 수사를 하지 않다가 언론에 새나가면서 뒷북수사. 이에 김승연은 역시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출석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조폭 두목과 경찰 간부들에게 5억 7천여만 원을 뿌린 것으로 드러났다. 폭행 자체는 김승연이 재판에서 피의자 심문 시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자면 원투 스트레이트로 아구 몇대 돌리고, 흉기와 쇠파이프로 위협한 정도라고 한다. 이 사건은 영화화 시도까지 있었고, 2011년 하반기에 드라마를 통해 패러디됐다.

 

법원은 이 사건을 부정(父情)을 앞세운 나머지 분별력을 잃고 범행한 점을 고려해야…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참고로 김승연의 아들이 셋이다. 첫째 아들은 하버드에서 유학 후 공군 통역 장교로 복무했으며 그룹에 차장으로 입사하여 경영 수업을 받았고, 둘째 아들은 예일대학 졸업 후 공군 장교 복무했고, 셋째 아들은 승마 선수로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2010년 10월 둘째 형과 마찬가지로 술집에서 행패를 부린 건으로 입건되었다. 2017년 1월 5일 또 다시 청담동 술집에서 종업원을 폭행을 하여 입건이 되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여기서 대한체육회 면죄부 논란이 있다.

 

장남 김동관은 1983년생으로 미국 세인트폴 고교와 하버드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군복무는 공군 학사장교로 마쳤다. 경영 수업 및 참여의 첫 단추로 태양광산업을 찍은 듯하며, 미국 솔라펀 파워 홀딩스를 인수해서 한화솔라원으로 개명하고(이후 한화큐셀로 통합) 그룹의 전체 능력을 사실상 올인하여 성과를 거두면서 상무 자리까지 올랐다. 2015년 12월 임원인사에서 전무로 승진하여 2018년 현재 한화큐셀 전무를 맡고 있다.

 

차남 김동원은 1985년생으로 미국 세인트폴 고교와 예일대학교에서 동아시아학을 전공했다. 형처럼 군복무는 공군 학사장교로 마쳤다. 2011년 4월에 경찰관을 상대로 뺑소니 사고를 치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더니 2013년에는 마약복용으로 수사를 받고 있다. 답이 없었으나 형처럼 경영수업을 받아 2018년 현재 한화생명 상무다.

 

삼남 김동선은 1989년생으로 미국 태프트 스쿨과 다트머스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했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승마 마장마술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병역은 예술체육요원으로 해결. 갤러리아 승마단 소속 선수로 활동하면서 2014년 아시안 게임 이후 10월 한화건설에 과장으로 입사했다. 그 형에 그 동생 아니랄까봐 2010년 10월, 강남의 모 주점에서 여종업원과 시비가 붙어 여종업원의 가슴을 만지고, 이를 말리던 남종업원을 폭행한 혐의로 입건된 흑역사가 있지만, 2016 리우 올림픽 때 승마협회의 무관심 속에 전담 수의사도 없고, 타국 선수들에게 말 먹이를 구걸해가면서 어렵게 대회를 치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금은 오히려 동정 여론을 받고 있으며, 흑역사도 묻혔다(…) 하지만 2017년 1월 5일 다시 술집에서 필름이 끊겨 종업원을 폭행하고, 순찰차도 파손시켰다. 악화되는 여론을 의식했는지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집행유예가 끝나기도 전인 2017년 9월 말, 다시 취중폭행으로 구설에 올랐다. 대형 법무법인 소속 신입 변호사 10여 명의 친목 모임에 참석했다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해 변호사들에게 막말을 하고 폭행을 휘두르는 등 이른 바 '갑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선은 자신보다 연장자도 섞여 있는 변호사들에게 "너희 아버지 뭐하시느냐"고 묻는가 하면 "날 주주님이라 부르라", "허리 똑바로 펴고 있어라", "존댓말을 써라" 등의 주문을 했다. 일부 변호사들은 김동선의 이런 행동에 일찍 자리를 떴고 남은 변호사들이 몸을 못 가누는 김 씨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다 뺨을 맞거나 머리채를 붙잡히는 등 봉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위산업체라는 성격과 이미지 때문인지 이처럼 병역 문제만큼은 깨끗한 편. 김승연 본인을 비롯한 오너 일가 모두 제대로 병역 의무를 마친 상태다. 하지만 장남을 제외한 다른 문제들이…


타임라인


1993년 - 김승연 외화 밀반출로 구속

2007년 - 김승연 청계산 보복폭행사건

2010년 - 김동선(삼남) 호텔 성추행 및 만취난동 사건

2011년 - 김동원(차남) 청담동 뺑소니 사건

2012년 - 김승연 배임사건

2014년 - 김동원(차남) 대마초 흡연 사건

2017년 - 김동선(삼남) 청담동 바 만취폭행 사건

2017년 - 김동선(삼남) 변호사 만취폭행 사건


14.2. 2010년 비자금 조성 사건


2010년 9월 16일,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검찰의 전격적인 압수 수색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는데…2011년 초부터 샅샅이 털렸다. 김승연 회장을 중심으로 그룹 재계담당 등 고위층들은 죄다 조사받았다. 초동 수사 때는 비자금 관련 증거를 못잡아 검찰은 끝내 비자금과 상관없는 횡령 배임 건으로 김승연을 불구속 기소하며 한화그룹 전체가 총비상에 돌입했다.

 

사실 검찰의 수사가 '한 놈만 패' 식의 표적수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집요하긴 했다. 하지만 처음 비자금으로 수사를 시작했으나 혐의를 찾지 못하자 횡령과 배임으로 기소하며 용두사미라는 언론의 비판받았다'.수사가 얼마나 집요했는지 한화의 한 임원이 '죄가 있다면 벌을 받을테니 수사를 빨리 끝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담당 검사가 사직할 정도니 한화의 로비가 있기는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산하 구단인 한화 이글스도 예외일 순 없었다. 구단 관계자 말로는 윗선에서 돈이 안 들어온다고…. 근데 돈이 들어와도 단장이 삽질하잖아.현 사장인 김관수에게까지 영장이 날아올 정도면 볼장 다 본 듯. 결국 사장, 단장이 갈렸고, 이후 2011년이 끝나고 회장이 말한 대로 김태균을 잡아오고 박찬호를 붙잡는 등 여러가지로 돈을 펑펑 썼다.

 

2012년 2월 4일, 대주주인 회장의 횡령혐의는 무죄로 배임 혐의가 유죄로 판결남에 따라 월요일인 6일부터 한화의 주식거래가 정지되고 상장실질심사 대상이 되었다. 망했어요. 하지만 2월 5일에 상장실질심사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결정나 주식 거래는 재개되었다.

 

김승연은 2012년 8월 16일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관련 기사 2014년 2월 11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1억 원이 선고되었다.


15. 기타


한때 식품업체 빙그레를 계열사로 둔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화 이글스도 옛날에는 빙그레 이글스였는데 이름이 바뀐 것. 김종희 회장이 1981년 급사하면서 김승연이 29세의 나이로 경영권을 승계하였는데, 이때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은 공군 중위로 복무 중이어서 나설 수가 없었다. 이후 오랜 상속권 소송 결과 1998년에 빙그레를 포함한 일부 계열사[35]를 김호연 측에 떼어주는 선에서 타협을 본 것이다

1990년에는 사단법인이던 경향신문을 인수해 주식회사로 전환했지만 과도한 경쟁과 IMF 외환위기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독립시켰다.

군사정권 당시 최루탄 제조로 돈을 엄청 벌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군사정권 당시 시위진압용 최루탄 납품으로 돈을 벌었던 회사는 삼양화학공업이다.

 

 

 


 


1. 개요


한화그룹의 창업주. 호는 현암(玄巖)이다. 미군들이 붙여준 별명은 다이너마이트 김. 현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과 빙그레 회장 김호연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서정화 전 내무부장관,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 전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과 사돈이다. 종교는 성공회, 신명은 디도이다.

 

 

그의 형 김종철은 자유당, 민주공화당, 한국국민당 소속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동생 김종식은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소속 정치인이었다. 그의 차남 김호연 역시 한나라당, 새누리당 소속 정치인이었다.


2. 상세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현 천안시 서북구 부대동)에서 김재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천안 북일학교, 직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에 경기공립상업학교(현 서울특별시 경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경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을 구타하자 김종희가 나서서 그 일본인 학생을 구타했고 김종희는 이 일로 인해 경기공립상업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뒤 원산상업학교로 전학하여 1941년 12월에 졸업하였다.

 

1942년에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했다가 8.15 광복 후인 1952년 10월 28일에는 부산에서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대부분의 국내 재벌들이 그러하듯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 즉 적산을 정부로부터 헐값에 사들이면서 기업의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1956년 4월에 인천 화약공장을 복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자체 생산하였다.

 

196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또한 주한 그리스 명예 총영사로 위촉되었다.[5] 1968년 제일화재를 삼호그룹으로부터 인수하고 경인에너지를 설립한 후, 1973년 태평개발도 세워 서비스업에 손도 댔다.

 

1975년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1976년 3월 6일 천안북일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해에 서울프라자호텔을 개업하였다. 그 외에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각각 지냈다.

 

1977년에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나자 빠른 대국민 사과 이후 자신의 전재산인 당시 약 90억 원 가량을 전부 피해자들과 이재민들에게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빠른 대응과 더불어 그룹의 전력을 다한 지원덕분에 당시 사건에서 심각한 구설수나 이미지 하락을 받지 않게 되었다.

 

말년에 당뇨와 악성 신부전증, 신경통 등으로 고생하면서 사업에 불철주야 전념하다가 1981년 7월 23일 오후 9시, 서울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59세로 숨을 거두었다. 아직 환갑되기 전 별세한 터라 유언장이 없었고, 차남 김호연이 공군 장교로 군복무 중이었던지라 장남 김승연이 그룹을 독차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형제의 난의 도화선이 된다.


3. 여담


그가 창단한 천안북일고등학교 야구부는 이후 1985년에 창단된 충청도 연고의 프로야구 제7구단 빙그레 - 한화 이글스의 기틀이 되었다. 특히 청주중학교 선수였던 이상군을 북일고로 직접 데려오고 이상군의 형들을 한화그룹에 취직까지 시켜주며 스카웃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한 인연으로 김종희의 장례 때 그의 관을 운구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당시 미성년이었던 이상군이 선발되었다. 김종희의 아들인 김승연과도 친분이 두터운 편이다.

학창시절 한국인 학생을 괴롭혔던 일본인 학생을 구타한 역사가 있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의리를 중요시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괄괄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그가 세운 한화그룹의 기업 경영 철학에도 "신용과 의리"가 강조되고 있다. 또 맏아들 김승연에게는 남자로서 가져야 할 호연지기를 강조했다고 하는데 그 영향인지 김승연 회장도 아버지와 닮은 점이 많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는 12살의 나이차가 있음에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김종희 회장의 깍듯한 태도와 성격 때문에 이병철 회장이 각별히 여겼다고 한다.


 


 


1. 개요


김승연 現 한화그룹 회장.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구단주이기도 하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다이너마이트 김이라고도 불린다. 기업의 태생이 화약 제조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다이너마이트 김은 김승연의 아버지인 현암 김종희 전 회장의 별명이기도 하다. 미군이 붙여줬다고

 

1952년 2월 7일 한화그룹의 창업주 김종희와 강태영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종희는 생전에 “남자는 술도 좀 마시고, 담배도 피워 보며 단맛 쓴맛 다 맛봐야 한다.”며 “어차피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중에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호연지기를 키울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1981년 김종희가 유언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한화그룹을 이끌게 되어 국내 6위 초거대 재벌로 키워낸 것으로 유명하다. 남동생 김호연과 10여년간 상속 다툼을 벌인 끝에, 김호연이 빙그레를 가지고 독립했다. 빙그레 이글스 가 한화 이글스로 바뀐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누나 김영혜도 1996년 제일화재를 이끌고 독립했다.

 

장인은 내무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서정화 미래통합당 상임고문. 큰아버지 김종철도 1980년대 한국국민당 총재를 지낸 정치인이며, 작은아버지 김종식도 정치인이다.

 

김승연 회장을 비롯한 범한화가는 꽤 독실한 모태 성공회 신자들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어머니와 아내도 독실한 신자다. 국내에는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보다 인지도가 다소 밀리는 성공회에서 가장 유명한 신자일 듯. 소년 시절엔 성공회 성당에서 복사 활동을 했으며, 1997년에는 성공회대학교 이사장이었고, 성공회대에 일부 대금을 면제해 주는 형태로 대학본부 건물을 지어주어서, 건물 이름이 승연관이 되었다.


2. 평가


2.1. 긍정적인 면


2.1.1. 의리 있는 남자


언론에서 의리 있는 남자라고 자주 다룬다. 화끈한 성격으로 유명해서 고객에 대한 신용과 의리를 강조한다는 식으로 홍보한다. 한화그룹의 가족적인(?) 분위기나 그에 따른 회장님의 여러 일화를 봐도 그렇다.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서울 프라자호텔 전면 리모델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텔 문을 3개월 동안 닫게 하자, 개장공사가 끝날 때까지 쿨하게 모든 직원(600여명)에게 유급휴가를 줬다. 또한 IMF 외환위기 당시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넘길 때 돈을 20~30억 덜 받더라도 100% 고용승계를 반드시 지키라는 조건으로 매각협상을 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이 부도위기에 처했을 때 자금지원도 하고, 진보적인 학회를 후원하기도 했으며, 진보지(예를 들어 월간 말)에 꾸준히 그룹 광고를 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과학과 신학 등에서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대학인 성공회대를 후원하고 있고 이사장까지 지냈다. 아무리 성공회 신자라지만 재벌 총수가 진보 성향이 강한 대학, 더 정확하게는 학교 경영권이나 금전적 혜택을 기대하지 않고 이런 기부를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1995년 뉴욕 미주본부로 발령을 보냈지만 교통사고로 하반신 척수마비가 되어 제대로 일을 못하게 된 이모 직원을 임원으로 승진시키고 계속 근무하도록 미국 지사로 보내주었다. 또한 징역 기간이 끝나자 그 동안 심려끼쳐 죄송하다며 한화 전 직원에게 보너스를 얹어주기도 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북한의 잠수한 경로를 한국에 유출해줘 간첩 혐의로 처벌받은 재미동포 로버트 김은 감옥도 가고 한국 정부도 선을 그어서 어려운 상태였는데 딱히 인연도 없던 김승연이 애국 동포라고 생활비를 대줘서 어려움을 넘겼다.기사

 

1999년 지금은 대전의 자랑이 된 대덕테크노밸리가 세워진 것도 김승연의 결단 덕분이었다. 한화 이글스의 우승 축하 파티에서, 홍선기 전 대전시장으로부터 산업단지로 개발하려는데 한화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다. 사업성이 낮다며 그룹 내부에선 난색을 표했지만, 김승연은 대전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사업분석과 시행을 지시했다. 그 결과 2016년 기준 연매출 17조 원, 임직원 3만 2천 명에 이를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2003년 6월 30일 전 한화 이글스의 투수였던 진정필이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등지자 그 동안 누적되었던 치료비와 장례비까지 모두 지원했다고 한다.

 

2009년 4월 예술의전당은 한화그룹의 후원 10주년을 맞아 감사의 뜻으로 종신회원증을 전달했다. 후원에 어려움을 겪은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를 위해 10년 동안 단독으로 후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기관지 파열로 8강전을 포기한 복싱 선수 백종섭에게 위로금 3,000만원을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이 발생한 후 1년 지난 2011년 3월 20일 천안함 승조원 유가족을 한화그룹 계열사에 우선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에 46명의 천안함 희생자 중 36명의 유족이 희망했으며, 이중 2010년도에 취업을 희망한 가족 5명 전원이 입사해 다니고 있으며, 2021년 현재 7명이 한화에 근무하고 있다. 2015년 2월 총 12명이 각 계열사에서 근무중이며, 2월 초에 2명을 추가채용하였다. 즉 5년 동안 꾸준히 채용 중이라는 것.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개념찬 행보인데, 한화 이글스 경기에 천안함 유가족을 초청하여 시구,시타 행사도 진행하고 의리의 한화, 천안함 유가족 초청 행사 실시 한화, 현충일 홈경기에서 천안함 유가족 특별 시구·시타 실시 초등학생, 중학생을 대상으로 천안함 견학도 하고 한화그룹, 대전 초ㆍ중등 학생과 '천안함' 견학 임직원들이 천안함 묘역을 찾아가기도 한다. 천안함 묘역 찾은 한화임직원 도 역시나 유가족들을 초대해 격려했다. 천안함을 잊지 않고, 그 유족들을 확실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9월 14일,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있던 최동원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치료비는 물론 그룹 차원에서 장례식 비용 지원을 지시했다. 이 모습은 최동원의 친정팀이던 롯데의 행태와 그야말로 극과 극의 비교가 되며 야구 팬들과 여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한편 팀이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당시에는 전 직원들에게 수십만원씩 특별 포상금을 준 바 있다. 그것도 정직원뿐만 아니라 협력직이며 미화직이며 한화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줬다.

 

2014년 한화건설의 이라크 공사 현장을 방문하면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광어회 600인분을 떠 가지고 비행기로 실어갔다고 한다. "회는 활어회지~!"를 외치며 비행기에 광어 수조와 요리사를 태워 비행기에서 회를 떠서 전달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사막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고 하니 사막이라 회를 먹고 싶어한다는 말에 "그럼 여기서 떠 가지고 가지."라며 쿨하게 지시했다고. 넌센스인 것이 해외 다른 기업들은 직원의 생명을 우선해서 이미 철수를 완료한 시점이었다는 것. 목숨을 걸고 잔류한 댓가로 광어회에 감격한 직원이 얼마나 될지 모르나 홍보 효과는 뛰어났다.

 

2015년 7월 3일 울산광역시 소재 한화케미칼 폭발 사고로 협력업체 직원 6명이 숨지자, 한화그룹 임직원에 준하는 보상을 지시했다. 비슷한 사례에서 협력업체 직원들은 보상에서도 차별받는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그래도 이번에도 의리있게 대처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죽기 전에 제대로 안전한 환경을 제공했어야 했다는 점 보다 오히려 칭찬을 받게 유도하는 홍보가 대단하다.

 

아래에 서술할 무지막지한 흑역사들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게 잊혀지지 않고 이미지의 일부로 강하게 자리잡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보 때문인지 다른 재벌가에 비해서 그렇게까지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상술한 사례 이외에도 긍정적인 미담들이 여럿 나오기 때문에, 돈만 많고 개념없는 졸부가 아니라, 자기만의 특이한 원칙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든지 튈 수 있는 복잡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 가장 크다.

 

김승연이 이렇게 의리를 강조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이자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종희의 영향이 크다.


2.1.2. 스포츠 기여


해외에서도 여러 스포츠단의 스폰서로 참여하고 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스폰서로 활동하면서 구장 광고권을 따내기도 했고[10] 축구에도 볼튼 원더러스나 함부르크 SV, 유벤투스 FC의 스폰서 계약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추어 복싱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복싱에도 관심을 많이 두고 있다. 1982년부터 1988년,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복싱협회장을 역임했다. 사실 야구단 창단 전부터 시작하고 있던 게 아마복싱 후원이었다.

 

사격에도 관심을 두고 지원을 아끼지 않아서, 한화그룹이 사격연맹 회장사를 맡아 자금 지원을 해 주는 등의 활동으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사격이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의 호성적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2.1.2.1. 한화 이글스


손수 한대화에게 퇴직금을 주는 모습 2012년 5월 16일, 한대화 당시 감독에게 격려금을 전달하는 모습.

 

 

 

구단주답게 야구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 부문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편. 한화 이글스의 프런트가 FA인 이범호를 놓치는 일을 포함하여 몇 가지 사고를 터뜨리자 2011년 5월 프런트를 전면 교체하고 야구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팬들에게 약속했다. 직접 잠실 야구장에 행차해서 팬들에게 "김태균이 잡아올게"라고 단번에 OK 사인을 내는 등.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014시즌 한화가 또 꼴등에 그치자 김성근을 데려와 달라는 팬들의 영상 릴레이, 1인 시위가 빗발쳤다. 프런트 측에서는 팬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내부승진을 밀었으나, 김승연의 강력한 요청으로 2014년 10월 25일, 기어코 한밭구장에 그 때까지만 해도 야신이었던 김성근을 데려온다. 게다가 16일 뒤인 2014년 11월 10일부로 구단 대표이사에 자신의 비서실장 출신인 김충범을 내정하는 초강수를 덤으로 두기도 했다. 2015년 FA시장에서도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러나 2016년 들어 한화 이글스가 그렇게 팬들이 불러서 뽑은 감독의 독단적인 전권 장악, 미치광이 혹사와 시대착오적 전략, FA 영입 선수들의 잇다른 먹튀, 노쇠화 되어버린 선수층 등으로 다른 팀 다 상위권 다툼 벌일 동안 혼자 하위권에서 노닥거리며 팀이 나락에 빠짐과 동시에 야신이라 칭송받은 자의 더러운 실체가 드러나자 프런트를 무시한 권력 남용, 당장의 성적에 눈이 멀어 팀의 미래를 내다버린 선택 등으로 나쁜 의미로 재평가를 받으며 비판받고 있다.

 

김승연의 문제점은 허구연이 지적한 바 있듯이 일단 야구를 좋아하긴 하나 정작 야알못이라 팀의 현실을 모른다는 것.이 때문에 한대화와 김응용 등을 연달아 거치며 팀을 추슬러야 하는 선택의 순간 별 생각없이 유명인사(김성근)에게 의존해 버렸고, 그 결과가 토탈 700억 쏟아붓고 7위 경쟁한 16시즌의 한화다. 매년 100억대의 적자가 나는 프로야구단에 끊임없이 투자를 해 주는 애정은 분명 높이 살만하나 팀의 내실을 키우기보단 당장 성적에만 눈이 가서 효율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

 

결국, 2017년 5월 23일에 김성근이 자진 사퇴의 탈을 쓴 경질로 퇴출됐다, 김성근과 단장과의 마찰로 인한 여러 일들에 격분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결국 그룹 차원의 내부감사 후 경질이 됐다. 그룹의 내부감사가 진행됐고, 21일 벤치 클리어링이 빌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팀 내부 사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리빌딩을 비롯한 장기적인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을 감독으로 기용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아들여서 한용덕을 감독으로 임명했으며, 한용덕은 오랜 부진에 시달렸던 한화 이글스를 포스트 시즌으로 진출 시키는데 성공했다.

 

2018년 한화 이글스가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자, 11년간 비밀번호를 찍을때 기다려준 팬들에게 고맙다며 장미꽃 13,000송이를 선물했는데, 이 비용 4,000만원을 사비로 냈으며, 1차전에 직관하러 왔다.

 

그리고 2018시즌 종료 후 아예 팬들에게 그 동안의 암흑기 속에서도 팀을 믿고 응원해줘서 감사하다는 한화 이글스 단독 광고를 제작해 지상파 황금 시간대에도 편성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때문에 광고 단가가 매우 비싸기로 유명한 주말 저녁드라마 시작 전 광고 타임때 여러 대기업들의 주력 제품 광고 사이에 한화 이글스 광고가 등장해 여러 커뮤니티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중앙일보의 2020년 기사에 의하면, 구단 주식의 10%를 가지고 있는데, 이걸 27년째 팔지 않고 있다고 한다.


2.1.3. 일가의 깨끗한 병역사항


자신은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했고, 아들 셋도 병역 의무를 이렇다 할 잡음 없이 깔끔히 마쳤다. 이는 한화의 근원이 한국화약이라는 방산업체이기 때문에 김승연이 병역 문제에 대해선 확실하게 해야한다는 지론 때문. 면제가 판치고 끽해야 공익근무 출신이 섞인 다른 재벌가 총수와 자제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부분 중 하나. 맏아들 김동관과 둘째 아들 김동원은 각각 하버드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처럼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했다. 이 집안은 특이하게도 ROTC는 없이 학사장교로만 복무한 듯한데 뭐 장교는 장교니. 사실 해외 대학교를 나왔으니 ROTC는 당연히 못한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나온 셋째 아들 김동선은 현역 출신은 아니지만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승마 금메달리스트로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았으므로 별다른 논란이 없다. 김동선은 꾸준히 승마 선수로 활동하며 2010, 2014년에도 모두 금메달을 땄고 2016 리우 올림픽에도 대표로 출전했다. 다만 불편한 진실로, 승마 종목은 좋은 품종의 말을 구해서 관리하는 비용이 막대한 특성상 애초에 재벌가, 왕족처럼 최상류층 출신 선수들이 90% 이상이다. 물론 메달 자체는 실력으로 따는 거니 비리라고 할 순 없다. 정유라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돈과 권력으로 밀어줘도 애초에 실력이 없으면 안되는건 안된다. 연습이야 많은 비용을 들여서 하는 것이지만 실제 아시안 게임 등 국제 대회에서는 선수 개인 소유의 말이 아닌 주최측에서 제공한 말을 랜덤으로 배정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병역기피로 의심을 받을 만한 과거가 있는데, 1995년 5월~1996년 12월 사이에 당시 주한 그리스 대사의 양아들로 들어가면서 그리스로 귀화했었다. 한화그룹 측에 따르면 "그리스 대사가 (김)동선이를 친아들처럼 귀여워해서 잠시 양자로 보내줬다"고 했다.

 

사실 재벌가의 병역 문제가 비리 의혹 때문에 불거지는 것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병역비리 문제와 김승연 일가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지금은 빙그레로 분리해 나간 동생 김호연 일가도, 김호연 본인은 김구의 차남인 전 공군참모총장 김신의 사위이며, 장인처럼 공군 장교로 복무해 중위로 만기전역했다. 김호연의 둘째 아들 역시 공군 장교로 복무했고 심지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누나 김영혜도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 김호연의 장남은 공익 근무긴 하지만 김호연 일가는 한화그룹 소속이 아니니까 상관이 없을듯. 그래도 안가려고 기를 쓰는거 보다는 공익이 더 낫다.


2.2. 부정적인 면


1998년 IMF 시기에는 가장 적극적으로 정리해고를 한 공으로 정부에게서 상까지 받았다. 정리해고는 일괄 사직서를 제출하게 하고 무급휴직을 수개월간 한 후 수리하고 전화로 통보하는 방식이었는데 주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 하에서 자신보다 큰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등 급속히 사세를 불려나갔다.

 

2007년 둘째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상대로 특수폭행 보복 사건을 일으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항목 참고. 이 사건이 청계산에서 일어났기에 국내야구 갤러리와 각 팀별 갤러리에서는 한화 이글스가 경기에서 못할 때마다 "청계산 가야겠네"라는 드립을 치고 있다. 2012년 들어서는 경기간 나오는 이니스프리 광고 때문에 '숲으로 와~' 드립이 야구 커뮤니티 등에서 성행했다.

 

2012년 8월 17일에 배임혐의로 법정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되었다. 보통 재벌 수장들이 비슷한 혐의에 집행유예가 선고된 전례를 볼때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볼 수 있겠으나, 아니나 다를까 2014년 2월 11일 파기환송심에서 집행유예 및 벌금 선고를 받고 석방됐다.


2.2.1. 자식들의 이미지


병역 문제가 깨끗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빠따갑인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둘째와 셋째 아들이 사고를 많이 치는 편이다. 그 대표적인 일화가 바로 밑의 사건. 기업을 이어받을 장남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나머지 둘은 자유분방하게 키워서 그런 건지, 재벌 3세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 때문인지 차남은 밑의 보복 폭행사건 뿐만 아니라 대마초를 피우다 적발된 적도 있다. 2019년 현재 한화생명 상무로 재직 중이다. 2014년 2월 김승연 회장 차남 대마초 혐의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2011년에는 교통사고를 내고 구호조치 없이 도망가서 뺑소니 벌금 700만 원이 선고된 전력도 있다. 셋째도 역시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 전적이 있다. 2010년에 서울 용산구의 한 호텔 주점에서 여종업원을 성추행하고 보안직원 2명을 폭행하고 유리창과 집기를 부순 혐의 등으로 불구속 입건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2017년 1월 5일 새벽 3시 30분에는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한 술집에서 술에 취해 종업원의 뺨 2대를 때리고, 다른 종업원의 머리를 2∼3차례 때렸다. 김동선은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돼 경찰서로 호송되던 중 순찰차 내부 유리문을 걷어차고 카시트를 찢기도 했다. 김승연 3남 김동선 술집 난동, 한화家 사건사고 보니…보복폭행·대마초까지 이외에도 문제가 많다.

 

참고로 장남 김동관은 어린 시절부터 전교 1등은 도맡아 했으며, 하버드대 유학 중에도 한인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경영 승계를 위해 실무를 익히고 있다. 직급에 상관없이 자신의 직원들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하는 등 사내문화 개선에도 힘쓰고 있다. 게다가 아버지와 동생들과는 다르게 별다른 구설수 없이 독서가 취미이며, 운동은 주짓수와 스키를 즐긴다고 알려져 있다.

 

김동선은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마장마술 단체전에 최순실의 딸 정유라와 함께 출전해 금메달을 딴 승마 국가대표 선수 출신이다.

여담으로 리우 올림픽에 승마 선수로 출전 당시 대한승마협회의 일 때문에 약간 고생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예선 탈락이 확정적이고 (예선 최종 순위 43위) 때마침 조모상이 겹치면서 귀국하게 되었다. 한화그룹 3남 김동선, 리우에 날아든 비보에 조기 귀국

 

2017년 9월 말 서울 종로구 소재 한 술집에서 열린 대형로펌 김앤장 소속 신입 변호사 10여 명의 친목 모임에 동석해서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남아있던 변호사들은 김씨를 부축했는데 그 남자 변호사의 뺨을 때리고, 한 여성 변호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등 폭언과 함께 폭행했다고 한다. 한화家 3남 김동선, 또 음주 폭행 물의 김앤장 신입 변호사라면 사실상 그 나이 또래 중 나름 자기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리 중 하나인데 그래봤자 결국 부모 잘 만난 금수저에게는 똑같은 월급쟁이들일 뿐이며 재벌 회장의 가족이면 김앤장 변호사에게 그 어떠한 부조리함를 저질러도 그냥 눈감고 아무런 조치없이 그냥 넘어가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화.

 

이에 대해 김앤장측의 일방적인 주장과 재벌 회장의 직계 아들이 관여돼서 김동선 측에 일방적으로 갑질 논란을 씌운 것이라는 기사 보도도 있긴 하다. 김앤장 변호사들이 먼저 김동선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근데 김동선 이력을 보면 무시할만도 당시 김동선을 김앤장 변호사들의 술자리에 동석시킨 지인이 일찍 나가버리면서 혼자 남았는데 김앤장 변호사들이 김동선을 그냥 제껴두고 자신들끼리만 대화를 하며 무시했다는 것. 일각에선 이것이 김앤장 변호사들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는데도 한화측에 강하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로 유력시되고 있다. “변호사가 먼저 무시했다” 한화 김동선이 처벌 안 받은 결정적 이유 그렇다 하더라도 단순히 무시한 것으로 폭행을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며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2.2.2. 1993년 횡령혐의


김승연은 6공 실세라던 박철언 전 장관과 친하며 그의 사조직 "월계수회"의 자금줄이었다. 그러나 박철언이 당시 민주자유당 내에서 김영삼과 권력투쟁을 벌였다가 민자당을 탈당했고 이후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이 이끌던 통일국민당에 들어가 김영삼을 디스한다.

 

그런데 1992년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집권하자 박철언은 "슬롯머신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김승연도 회사 돈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는 정치 보복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2.2.3. 동생과의 재산권분쟁


동생 김호연과 재산권 분쟁이 일어나 한화그룹을 반분했다. 수 년의 법정 공방 끝에 결국 그룹 분할에 합의하여 유명했던 빙그레를 비롯한 여러 계열사를 동생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빙그레 이글스가 한화 이글스로 야구 팀 명칭까지 갈아치우게 된다.


2.2.4. 2007년 보복 폭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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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8일, 새벽 서울 청담동 S클럽에서 술을 마시던 김승연의 둘째 아들이 북창동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8명과 시비가 붙어서 싸움을 벌였다가 집단 폭행을 당하는 바람에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불만있으면 와보라는 식으로 종업원이 던지고 간 명함에 격노한 김승연은 아들을 폭행한 인물에게 보복을 가하기 위해 아랫 사람들을 시켜 G노래방을 통해 S클럽 종업원들을 불렀다. S클럽 종업원들은 자신들 5명에 노래방 종업원 3명을 끼워서 대신 내보냈으며, 그들은 김승연 경호원들에게 붙들려 산으로 끌려가 폭행을 당했다. 이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실 폭행을 저지른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고 호소하자, 김승연은 이젠 경호원들을 이끌고 가게로 쳐들어갔다.

 

북창동 S클럽에 도착한 김승연은 '내 아들 폭행한 놈들'을 끌고 오라고 말했고,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가게 측이 폭행 가담자를 데려오자, 김승연의 아들 김동원이 자신을 폭행한 사람에게 직접 주먹으로 보복을 가했다고 한다. 이 때 종업원들도 경호원에게 두들겨 맞았다. 이 과정에서 쇠파이프와 전기 충격기까지 동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김승연은 술값이라면서 카운터에 100만 원을 던져 놓고 나갔다.

김 회장은 "내 아들이 눈을 다쳤으니 네놈들도 눈을 좀 맞아야겠다"라면서 가죽 장갑 낀 손으로 두 팔이 붙들린 종업원들의 눈을 집중 가격했다. 낮은 신음소리가 연신 터져나왔다. "저희는 전무님이 가서 사과하고 오라 그래서 왔을 뿐이에요" (중략) 김 회장 아들 폭행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조 전무"가 김 회장 앞으로 불려왔다. 김 회장은 조 전무를 룸 안으로 데려갔다. 곧이어 고성과 함께 뺨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세 차례 들려왔다. 김 회장은 곧이어 새벽에 폭행을 당했던 아들을 불러서 "네가 맞은 만큼 때려라"고 일렀다. 곧 룸 밖에서도 분명히 들을 수 있는 "퍽, 퍽, 퍽" 하는 폭행 소리가 새어나왔다.

한겨레, 2013년 4월 5일.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정치권에서까지 논의가 될 정도였다. 하술할 실상이 알려지기 전 국민들의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고 공개되고 나서도 반응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조폭과 다를 바 없는 폭행에 이어 경찰까지 움직여 없는 사건으로 처리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두둔하는 사람들은 "서민 부모는 자식이 집단 폭행을 당해도 합의금만 받고 분을 삭힐 수밖에 없는데 능력이 있는 부모라면 당연히 때린 놈들 사지를 분질러 놓아야 한다"면서 그런 행위를 한 김승연을 칭찬했다. 대중 뿐 아니라 김구라,복거일 등 유명인들도 김승연 회장을 옹호했다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이들의 변호역시 원칙적으로 하면 안되는 일을 옹호했기 때문에 비난받았을 뿐이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저랬겠느냐?"는 식으로 "분명히 잘한 행동은 아니지만 이해는 된다"면서 공감하는 반응들이 적잖았는데 "내 자식이 두들겨 맞고 왔으면, 재벌 회장이든 아니든간에 가해자를 한 대 쥐어박고 싶지 않겠냐?"는 식의 여론이 상당수 었던 것이다.

 

이런 반응이 시사하는 의미는 사건상 최초 피해자인 차남의 경우가 결투에 준하는 1:1 대결 끝에 패배했거나 쌍방 폭행 중 폭행 피해를 입은 정황이 아니라 1:8의 상황에서 일방적 집단 린치를 당했으므로 비겁한 클럽 종업원들이 보복의 명분을 제공했다는 인식상 조건이 여기서 갖춰졌다는 것이기도 하였다.

 

가해자들은 한화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저질렀다고 한다. 사실 워낙에 김승연이 보복폭행 출구전략을 범죄적으로 해서 묻히는 부분이지만, 보복피해자들도 죄질이 나쁘다. 시비가 붙은 게 누구의 잘못인가를 떠나서 8명이 한 명을 집단으로 구타한 것인데, 피해자가 재벌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서민이었다면 두들겨 맞고 합의금 몇 푼에 분을 삭혀야 했을 것 아닌가. 앞선 여론들의 경우도 분명 있지만 이런 사건은 대한민국 내에선 하도 조직폭력배나, 학교폭력같은 문제 때문에 학을 뗀 사람들이 많아서, 보복 폭행의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피해자가 동정받는 경우도 드물고 김승연이 특권계층이 아닌 오히려 일반인이었다면 여론은 반분되지 않고 오히려 절대적 영웅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특권계급으로 행세하던 재벌의 일탈 및 비행이 아니라 더 정치권으로 까지 비화된 까닭이 있다.

 

김승연은 단순히 사적제제로 보복 폭행 사건만을 저지른게 문제가 아니라 폭행 과정에서 뒤처리를 대신 해 줬던 조직폭력배 맘보파 두목 오 모에게 1억 1천만원을 지급했다. 이 사건에 관한 소문이 언론에 퍼지기 전후로 5억 8천만원을 뇌물로 뿌려서 전직 경찰청장을 비롯한 전 현직 경찰 간부들을 동원하여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 했고 이런 죄상이 드러나면서 이는 게이트가 되었다. 경찰이 한 달 넘게 사건 처리를 미적미적거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는 변호인과 상의도 없이 피의자 심문 중에 뜬금포로 검사에게 "검사님은 복싱에 대해 많이 아십니까?"라고 반문하며 "아구 몇번 돌렸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거기다 이를 설명하며 '오른손, 왼손'이라고 말하며 잠시 복싱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변호인들이 진짜 혼이 나갈 정도로 경악했다고.. 또한, 쇠파이프와 전기 충격기 사용에 있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다가 사실로 드러나자 겁만 주려는 용도로 썼다고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또한 기사 내용에선 '귀싸대기, 놈, 맞짱' 드립까지 여과 없이 나오는 바람에 "재판 중인데 나이 먹고 철이 없는 드립을 쳤다"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재판 중에는 힘들다면서 턱을 괴고 거의 드러누운 자세로 재판을 받다가 재판장에게 주의를 받고 저지를 당했다. 이 결과 1심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는데,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양로원에서 사회봉사를 열심히 했다. 그 덕분인지 2심에선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200시간이 선고 되었다. 그리고 돈을 받고 뒤를 봐준 전직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은 9월~1년 사이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2007년 이후로도, 10년이 넘어도 계속 회자되는 사건이다. 위에서도 말한 SK 회장 최태원의 사촌동생 최철원의 재벌 2세 야구방망이 구타사건, 소위 말하는 2010년 "맷값 폭행" 사건이 이것과 거의 유사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잊혀질 타이밍을 놓친 것도 있겠지만, 한화 이글스가 죽을 쑬 때마다 "한화에서 유일하게 빠따 좀 휘두를 줄 안다는 인간이 타자를 안 뛰고 있기 때문이다(...)."라면서 비웃음이 섞인 비아냥을 듣는 통에 잊힐 리가 없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 사건 이후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청계산"은 한화 그룹의 회장이자 한화 이글스의 구단주인 김승연 회장을 통칭하는 별명이 되었으며. 청계산으로 끌려간다는 드립 또한 종종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2.2.4.1. 외신 반응


이 때, 김승연은 자택을 취재하는 기자들과 방송국 취재진을 한화그룹 직원들을 동원해 막았는데 CNN등의 외신에선 김승연의 이러한 행각을 들어 크게 보도하면서 "한국의 마피아"라고 뉴스 타이틀을 내보냈다. 외신들은 김승연이 폭력배를 사서 폭행 사건을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회사 내 고용관계에 있는 한화 직원들을 "회사 업무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동원해서 물리력으로 쓰는" 김승연의 행동에 더 주목한 것인데, 그들은 이러한 행동을 마치 러시아의 마피아나 남미의 카르텔처럼 여기고 김승연과 한화그룹을 그에 빗댄 것이다.

외신들의 이런 반응은 한국의 9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2.2.5. 배임 사건


2012년 8월 16일 부실 차명회사 불법지원과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승연 회장은 실형인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2013년 1월 4일에 위독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구치소에서 구속집행정지 건의서를 제출한 상태라고. 결국 1월 8일 구속집행정지가 내려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이에 대해 재벌 회장 등 유명인들이 건강 문제를 핑계로 법적 구속 및 처벌을 회피하는 사례가 자주 있어서 김승연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여론도 존재했다. 방어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근데 공판에 출석한다고 한다. 결국 2013년 4월 1일 병상에 누워 법정에 출석했고 징역 4년과 벌금 1,500억 원을 구형받았다.

 

2013년 12월 26일 검찰에 의해 징역 9년이 구형되었고, 2014년 2월 11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1억원이 선고되었다.

 

결국 김승연은 한화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서 모두 물러났다.

 

그러나 2014년 12월 사실상 경영에 복귀했다. 비공식적으로 막후 경영을 하다가 취업제한이 끝나는 2020년 2월부터 정식으로 복귀했다.


3. 여담


유전적으로 재벌도 막을 수 없는 무서운 병인 탈모가 있어 노안이다. 덕분에(?) 아들 세 명 또한 훤칠함과는

별개로 탈모 진행형으로 극강 노안을 자랑한다.

 

회장은 물론이요, 아들들의 전적도 화려하다. 위에 언급된 둘째 아들 김동원은 청계산 사건, 대마초 흡연, 뺑소니를 저질렀다. 셋째 아들의 사건사고는 김동선 문서 참조. 유일하게 장남 김동관만 스캔들 하나 없는데, 장남(+그룹 후계자)이기 때문에 유독 공을 들여서 키웠다고.

 

아내 사랑이 각별한 듯하다. 서울대 약대를 수석 졸업한 자신의 아내 머리를 닮아서 아들들, 특히 그룹 후계자가 될 장남이 하버드대를 졸업한 수재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장서기금을 조성하여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많은 장서를 갖출 수 있게 해 주었다(실제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가보면 '김승연장서기금' 스티커가 붙은 책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우천 법학관'이라는 건물을 지어주었다. "于泉"이 김승연의 아호라고 한다.

재계 내에서도 손윗 격인 총수들에 대해서는 제법 예절을 갖추는 것으로 보이는데, 삼성 이건희와는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내서 사적으로는 한화 이글스 하와이 전지훈련 때 자기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이건희가 수백만 원 어치의 양주를 한화 측에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사업적으로도 많은 조언을 구했는지, 현재는 한화그룹에서 없어선 안될 가장 중요한 회사가 된 대한생명이 매물로 나왔을 때도 이건희를 찾아가 "금융업에 대한 노하우를 가르쳐주시면 형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잘 해보겠습니다."고 허심탄회하게 간청했다고 한다. 이에 이건희는 김승연에게 금융 사업의 노하우를 전달했고 김승연은 대한생명을 인수했다. 이후 한화생명을 중심으로 한 한화그룹의 금융 사업은 그룹의 3대 사업축으로 성장했다. 그 이후로도 이건희가 쓰러지기 전까지 김승연과 승지원에서 자주 만남을 가지는 등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이건희가 김승연을 극진히 아꼈다. 그리고 2020년 이건희가 사망하자 직접 조문하기도 했다.

 

성격이 화통한 면이 있어서 상술된 것처럼 직원들의 복리후생을 잘 챙겨준다. 다만 본인은 세간에 알려진 이런 이미지를 조금 부담스러워 한다. 2010년 인터뷰에서는 기자에게 "주변에서 이미지 관리 좀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좀 묻고 싶다."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 그렇듯 끽연가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신도 담배를 즐겨 피는 듯. 일례로 대통령과 기업총수들 간의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행 버스에 오르기 전에 담배를 꺼내문 사진이 기자들에게 찍혀 기사화되었다. 건물에 나와 천장은 있으나 옆은 뚫린 공간으로 흡연 구역은 아닌지라 옆에 있던 직원이 바로 제지해 담뱃불은 붙이지 않은 채 담배를 수거했다.


4. 어록


4.1. 한화그룹 창립기념사 발언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 시대다.”

2005년

“글로벌시대에는 ‘둥지만 지키는 텃새보다는 먹이를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의 생존본능’을 배워야 한다."

2006년

"시대에 역행하는 익숙했던 과거와 단절이야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2007년

"조직의 노화를 부추기는 관료주의, 적당주의, 무사안일주의를 배척하고 세월을 거슬러 영원한 청춘기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의 한화가 꿈꾸고 만들어갈 모습이다."

2016년


4.2. 신년사 발언


 

"동란의 초토 위에 사업보국의 일념으로 기적의 역사를 창조했던 화약인들의 ‘프런티어’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한화인 모두 견지해야 할 일류정신의 표상이다."

2006년

"세계 속의 한화를 이끌기 위해 국적, 학력, 나이와 같은 불필요한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겠다."

2007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여명이 동터 오듯이 이제 우리 한화는 새로운 희망을 여는 대한민국과 함께 ‘비극태래’의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2008년

"지금은 숲보다 나무에 집중해야 할 시기이며 작은 구멍 하나에 거대한 배도 침몰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방산•유화부문은 규모의 경쟁력을 넘어 실질적 시너지 확대에 주력해야 한다. 태양광부문은 글로벌 녹색성장을 주도하는 초일류 기업을 목표로 도전하고 해외시장에서 미래 사업기회를 모색하는 금융부문도 글로벌 경영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

2016년

"새는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 어떤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을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지금 세상 밖에서 불어오는 위기의 바람 또한 우리가 더 강한 기업으로성장하는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2017년


5. 수상경력


체육훈장 백마장 (1982)

철탑산업훈장 (1983)

체육훈장 맹호장 (1984)

그리스 피닉스 대훈장 (1986)

체육훈장 청룡장 (1986)

금탑산업훈장 (1995)

그리스 대훈장 (1996)

대한적십자사 유공장 (1998)


 


1.개요


범한화계 유제품 특화 식품업체로,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순우리말 회사명을 가진 기업 이기도 하다. 노조는 한국노총 식품노련 소속이다.


2. 상세


1967년 홍순지 창업주가 대일양행으로 창업해 1971년 대일유업으로 이름을 바꿨다. 1972년에 미국의 퍼모스트(Foremost)사와 기술제휴로 아이스크림과 우유를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유제품 사업의 시작이었다. 한국에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을 들여온 기업이기도 한데, 그 제품이 바로 투게더.

 

1973년에는 경영부실 때문에 한국화약그룹에 인수됐고, 기술 제휴를 한 김에 퍼모스트사의 상표도 빌려 쓰며 1976년 1월부터 '대일퍼모스트유업'으로 사명을 갈았다. 퍼모스트사와 제휴 기간이 끝나면서 상표를 빙그레로 바꾸고, 법인명도 대일유업으로 회귀했다. 1979년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경기도 남양주군에 도농 2공장을 준공했고, 1981년 프랑스 소디마 사와 유제품 기술 제휴를 맺은 뒤 1982년 회사 이름도 빙그레로 바꿨다. 1982년 경남 김해공장, 1986년 경기 광주공장을 각각 세우고 1987년에는 식품연구소를 설립했다. 1992년 한화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6][7] 이듬해 경산 물류센터를 세웠고, 1994년 로고를 바꾸며 진로종합식품으로부터 유제품 사업 부문을 인수하고 1997년 썬메리제과로부터 사업권을 양수했다. 1998년 1월에는 한화그룹으로부터 공정거래법상 계열 분리되어 11월에 물류사업부문을 떼내 '선일물류'로 독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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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갈 때는 유제품과 빙과류 외에도 과자, 라면 등 여러 식품 분야에 사업을 확장했으며, 1985년에 일본 닛신식품과 합작하여 라면 시장에 진출할 당시에는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 결과 중 하나가 빙그레 초창기 라면 라인업 중 하나인 마이컵으로, 저 유명한 닛신의 대표 플래그십 브랜드 <컵누들>의 라이센스 제품이었다. 생산은 경기 광주공장에서 전담했다.

 

라면 중에서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사람들을 공략한 불고기 맛 라면인 이라면, 최초의 무 MSG 라면이었던 뉴면, 무난한 맛으로 호평 받은 맛보면, 콩기름 라면이라는 새로움과 신라면에 대한 공격적인 마케팅을 내세운 매운콩이 선전했었으나, 21세기 초 경영 적자가 지속되자 2003년 라면 사업은 전면 철수했고, 광주공장의 라면 생산라인은 스낵공정으로 전환됐다. 과자 / 스낵 사업은 크라운, 해태에서 위탁생산 하는 형식 으로 그나마 꽃게랑, 스모키 베이컨칩, 쟈키쟈키 등 히트 제품만 남긴 채로 명맥을 유지하는 중이다. 현재는 냉장과 냉동 유통이 중요한 유제품과 빙과류를 주력으로 생산, 제조, 판매하고 있다. 또 제과점 프랜차이즈 '썬메리' 역시 2001년 삼립식품에 팔았다.

 

빙그레는 서울우유, 남양유업, 매일유업 다음가는 국내 제4의 우유 생산업체이다. 하지만 흰 우유보다는 바나나맛우유로 대표되는 가공유, 요플레로 대표되는 요구르트, 그리고 각종 아이스크림이 포함된 빙과류로 더 알려진 회사이다. 특히 바나나맛우유나 요플레는 각각 가공유와 발효유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로 회사의 대표 상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빙과류 분야에서도 투게더나 요맘때, 메로나 등의 유명한 제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다 보니 상위 3개 우유 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본래의 생산품인 우유 쪽은 많이 밀리는 편이다. 회사에서도 큰 기대는 안하는지 21세기 들어 생우유 쪽은 별다른 마케팅도 하지 않는 편이다.

 

1988 서울올림픽 때는 공식 아이스크림 공급업체로, 1993 대전 엑스포 때 공식 아이스크림/라면 공급업체로 각각 지정됐으며, 과거부터 독립유공자를 지원하고 있었다는 기사가 2019년에 보도되었다.

 

2020년 4월 매각대금 1,400억원에 해태아이스크림을 인수하게 됐다.


2.1. 마케팅


2.2. 빙그레 이글스


올드 야구팬들에게 '빙그레'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바로 빙그레 이글스인데, 바로 현재의 한화 이글스이다. 빙그레는 과거 한화그룹에 소속되어 있었고, 한화그룹 내의 소비재 기업은 빙그레 뿐이었기에 이를 홍보하기 위해 '빙그레'를 구단명에 붙였다. 후술할 사건으로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떨어져 나가며 이름이 바뀌었을 뿐 이글스 구단은 처음부터 한화그룹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이다.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떨어져나가게 된 이유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 빙그레 김호연 前 회장 두 형제 간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한화그룹의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이 유언장 없이 사망하면서 두 형제가 그룹 소유권을 두고 소송을 진행했기 때문. 절반으로 공평하게 나누면 소송까지 갈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형 김승연이 혼자 독식하려고 소송을 걸었기 때문에 문제. 결국 동생 김호연이 빙그레 식품을 가지고 독립하는 걸로 합의했다.


2.3. 아르바이트


만약 빙그레 관련 아르바이트를 찾다보면, 보통 유통과 관련된 물류창고 아르바이트와 생산에 관련된 생산직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 있다. 그 외 폐기 제품 처리라던가, 방범을 담당하는 아르바이트도 가끔 자리가 있다.

 

물류창고 아르바이트의 경우, 유제품 물류창고와 빙과류 물류창고로 나뉘는데, 빙과류 물류창고의 경우 -8℃ ~ -18℃ 정도로 유지되는 냉동창고에서 주문이 들어오는 제품들을 주문한 수량에 맞게 담아 포장한 뒤 유통 준비를 하는 아르바이트이다. 주문이 도매급으로 대량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팔다리의 근력도 많이 요구된다. 주로 편의점이나 대형 슈퍼에서 들어오는 주문의 경우 아이스크림 한 종류당 10박스 이상씩, 여러 종류를 주문하기 때문에(총 60~70박스 정도) 정해진 시간 내에 포장을 마치기 위해선 한번에 아이스크림을 5~10박스씩 운반해야 하며, 이는 약 15~25kg 정도로 상당히 무겁다.

 

게다가 냉동창고의 바닥은 빙판이고, 그 빙판 위에서 지게차와 함께 일하기 때문에 부상의 위험도 상당히 크다. 여기에 냉동창고 내부가 대단히 춥기 때문에 보통 1시간 반 작업 + 30분 휴식을 하며 휴식실에서는 한 여름에도 보일러와 온풍기를 틀어놓아 저체온증과 동상을 예방한다. 물론 한여름에도 방한 장비를 풀장착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방한 장비를 모두 갖추고 냉동창고에 들어가면 처음엔 별로 춥지 않지만, 작업을 시작하면 체온이 올라가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그 땀이 또 얼어서 정말 추워지므로 휴식 시간에 최대한 몸을 풀어두는 게 좋다. 포장중 파손된 아이스크림 박스는 보통 폐기처분하지만, 몰래 먹어도(...) 큰 탈은 없으므로 아이스크림은 정말 원 없이 먹어볼 수 있다. 가끔 재고로 나온 바나나우유 등의 유제품도 맛볼 수 있으니, 자신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체력이 좋다면 해볼 만하다. 다만 먹고 싶은 걸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게 흠. 타 아르바이트에 비해 상당히 고된 알바라 그런지 시급은 타 알바에 비해 약간 높은 편으로, 대략 상하차 아르바이트 정도의 시급을 받을 수 있다.


3. 역대 임원


대표이사 회장

김호연 (1992~2008)

부회장

신종훈 (2000~2001)

정수용 (2008~2012)

대표이사 사장

홍순지 (1967~1975)

김영찬 (1975~1976)

임영대 (1976~1981)

오태환 (1981~1983)

신종훈 (1992~2000)

정수용 (2000~2008)

이건영 (2008~2015)

박영준 (2015~2018)

전창원 (2019~ )

대표이사 부사장

오재덕 (1983~1986)

박정수 (1989~1991)

공태근 (1991~1992)

대표이사 전무

박정수 (1986~1989)


4. 주요 생산제품


 


아이스크림


끌레도르

메로나

붕어싸만코

투게더

슈퍼콘

엑설런트

빵또아

비비빅

엔초

요맘때

쿠앤크

더위사냥

뽕따

캔디바

생귤탱귤

제티 아이스

카페오레

꽃보다 인절미

디핀다트

슈팅스타 트리컬러

붕바 베리파인

키위아작

누가바

부라보콘


유제품


빙그레 바나나맛우유

밀크타임

참맛딸기/초코

초코레떼

참맛우유

굿모닝우유

검은깨콩두유

메로나 보틀

요플레

쥬시쿨

뽀로로와 친구들

빙그레 요구르트


커피/음료


아카페라

따옴

사과랑 야채

빅썬

메로나 제주 스파클링

맑은하늘 도라지차

옐로우카페

쥬시쿨 에이드

달콤커피 블랙아메리카노

헤이젤리

뷰티인사이드 곤약젤리

티로드 콤부차


스낵/디저트


 

꽃게랑

야채타임

스모키베이컨칩

뽀로로와 친구들 비스킷

뽀로로와 친구들 요구르트 젤리

쫀득한 슈

쟈키쟈키

빵또아 케이크


7. 기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항일독립운동 사업에 대한 재발굴과 독립유공자들과 유공자 후손에 대한 생계·장학사업 지원을 계속 하고 있는 기업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지원 사업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김호연 전 회장의 가족 관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판촉을 위해 1993년부터 2004년까지 14세~20세의 응모자를 대상으로 미스 빙그레 선발대회를 개최했는데, 그 수상자들 중 김소연, 이인혜(이상 제1회(1994)), 윤채영(제6회(2000년)), 한효주(제9회(2003년))는 나중에 유명 배우가 되었다.

스페인 출신 가수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의 'Rhythm Divine' 뮤직비디오를 보면(01:47부터 02:14까지) '생큐 칼슘알파'라는 한글 간판이 나오는데, 빙그레에서 한때 판매했던 유제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