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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첫번째로 꼽히는 한국의 보수 우파 신문 3대장

 

 


1. 개요


조선일보 방응모의 가족관계. 온양 방씨다.

 

신문사로서의 조선일보는 조중동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력이 강하지만, 반대로 혼맥은 조중동 가문 중 제일 단출하다.

(엄밀히 말해 조선일보 가문도 범GS가, 태평양화학, 영풍그룹(고려아연)등 다른 재벌들과의 혼맥이 있지만, 범삼성가 직계인 이건희 회장 가족과 혼맥으로 연결된 중앙일보 가문, 동아일보 가문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단출한건 사실이다.)

 

또한 중앙일보 가문이나 동아일보 가문과는 달리 조선일보 가문은 조선일보 말고 다른 기업을 경영한적이 없으며

(참고로 동아일보 가문은 동아일보 외에도 삼양그룹, 경방을 경영하고 있으며, 중앙일보 가문은 중앙일보(중앙그룹) 외에 BGF그룹을 경영하고 있다.)

, 준대기업 이상의 큰 기업을 소유, 경영하거나, 억만장자를 배출한 적이 없다.

 

실제로 조중동이라는 말은 90년대 만들어진 말로, 김성수의 집안에서 이어진 동아일보 가문, 범삼성가의 사돈이자 측근이었던 홍진기 집안의 중앙일보 가문와 달리 조선일보는 80년대 이전까진 한국일보에도 밀렸지만, 신군부의 비호를 통해 급격히 위세가 커졌기 때문이다.

 

밤의 대통령 집안답게 전성기때는 정권과 신경전을 할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신문을 잘 안 보고, 신문 구독자들도 꽤 이탈했으며, 여론을 이끄는 주체가 신문사에서 방송사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등 소위 SNS로 넘어가면서 위상이 예전만은 못하다는 평이 있다. 이는 다른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인데, 신문산업 자체가 사양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사에 비하면 여전히 규모, 영항력이 꽤 있는 편이다.

 

방씨조선이라는 멸칭도 있다. 같은 메이저 언론가문인 중앙일보, 동아일보 일가와는 달리 조선일보 가문은 장자연 사건, 조선일보 손녀 갑질 논란, 방용훈 부인 자살 사건 등 온갖 사건들이 쏟아지는지라 많은 비판을 받는다. 재벌가들 중에서 품위 없고 인성 안좋기로 유명한 범한진가 못지 않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는 방씨 집안의 저택이 있는데, 수천평에 달하는 대저택으로 오랫동안 서울에서 가장 비싼 단독주택으로 꼽혔었다.


2. 가계도


◇방계준(方啓畯)

△1남 방응곤(方應坤)

◎2남 방재윤(方在胤) (1901 ~ 1940)

△2남 방응모(方應謨) (1883 ~ 1950) 조선일보 사장 / 妻 승계도(承啓道, 연일 승씨) (1886 ~ 1974)

◎ 양자 방재윤(方在胤) (1901 ~ 1940) / 妻 이성춘(李成春, 수안 이씨) (1906 ~ 1973)

◆1남 방일영(方一榮) (1923 ~ 2003) 조선일보 회장 / 妻 박현숙(朴賢淑, 밀양 박씨) (1926 ~ 1986)

▽1녀 방을생(方乙生) (1945 ~ )

▽1남 방상훈(方相勳) (1948 ~ )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 / 妻 윤순명(尹旬明, 해평 윤씨) (1946 ~ )

ㅇ1남 방준오(方準梧) (1974 ~ ) 조선일보 부사장 · 조선경제아이 대표이사 / 妻 허유정(許有廷, 김해 허씨) (1974 ~ )

ㅁ1남 방인성(方寅誠) (2001 ~ )

ㅁ2남 방현성(方玹誠) (2003 ~ )

ㅁ3남 방진성(方辰誠) (2010 ~ )

ㅇ1녀 방경원(方卿瑗) (1976 ~ ) / 夫 한상원(韓相遠, 청주 한씨) (1971 ~ ) 한앤컴퍼니 대표이사 사장

ㅁ1남 한용호 (2003 ~ )

ㅁ2남 한성호 (2006 ~ )

ㅇ2남 방정오(方正梧) (1978 ~ ) 前 TV조선 대표이사 전무 / 妻 이주연(李柱燕, 광주 이씨) (1981 ~ )

ㅁ1녀 방선윤(方宣允) (2009 ~ )

ㅁ1남 방주성(方胄誠) (2010 ~ )

▽2남 방용훈(方勇勳) (1952 ~ 2021) 前 코리아나호텔 회장[12] / 妻 이미란(李美蘭, 경주 이씨) (1962 ~ 2016)

ㅇ1녀 방지원(方智媛) (1984 ~ ) / 夫 이해서(李海瑞, 전주 이씨) (1974 ~ )

ㅇ2녀 방지윤(方智玧) (1985 ~ ) / 夫 천호전(千豪全, 영양 천씨) (1979 ~ )

ㅇ1남 방성오(方誠梧) (1988 ~ ) 코리아나호텔 사장

ㅇ2남 방지오(方智梧) (1993 ~ )

▽3남 방준경(方俊卿) (1959 ~ )

ㅇ1녀 방윤선(方允宣) (1988 ~ )

ㅇ1남 방원오(方源梧) (1990 ~ )

▽4남 방문석(方文奭) (1961 ~ ) 서울대 의대 교수

ㅇ1남 방영오(方寧梧) (1992 ~ )

ㅇ2남 방수오(方壽梧) (1996 ~ )

▽5남 방문기(方文基) (1964 ~ )

ㅇ1녀 방윤서(方胤瑞) (1998 ~ )

ㅇ2녀 방윤제(方胤濟) (1999 ~ )

▽2녀 방** (1969 ~ )

▽3녀 방** (1971 ~ )

▽6남 방** (1973 ~ )

◆2남 방우영(方又榮) (1928 ~ 2016) 조선일보 명예회장 / 妻 이선영(李鮮暎, 경주 이씨) (1937 ~ )

▽1녀 방혜성(方惠聖) (1960 ~ ) 태평양학원[19] 이사 / 夫 서영배(徐榮培, 이천 서씨) (1956 ~ ) 태평양개발 회장

ㅇ1남 서상범 (1985 ~ )

ㅇ1녀 서수연 (1990 ~ )

ㅇ2남 서상욱 (1992 ~ )

▽2녀 방윤미(方允美) (1961 ~ ) / 夫 김백균(金栢均, 의성 김씨) 뉴욕 심장&정맥류전문의

▽3녀 방혜신(方惠信) (1965 ~ ) / 夫 정연욱(鄭然旭, 연일 정씨) (1962 ~ ) 경남에너지 부회장

▽1남 방성훈(方聖勳) (1973 ~ ) 스포츠조선 대표이사 부사장/ 妻 최강민(崔江旻, 해주 최씨) (1979 ~ )

ㅇ1녀 방정원(方涏瑗) (2006 ~ )

ㅇ1남 방찬오(方贊梧) (2008 ~ )

ㅇ2남 방석오(方碩梧) (2010 ~ )

◆1녀 방순영(方純榮) (1934 ~ ) / 夫 김형태(金炯台, 김녕 김씨) 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총회장

◆2녀 방선영(方善榮) (1938 ~ ) / 夫 김창호(경주 김씨) (1935 ~ ) 일신방직 명예회장

◎1남 방재선(方在璇) (1944 ~ ) 방응모기념사업회 이사장 / 妻 김하자(金夏子, 충주 김씨), 김명희(金明禧, 파평 김씨)

◆1남 방진영(方振榮) (1968 ~ ) / 妻 김성희(金成姬, 김해 김씨)

◆2남 방인영(方寅榮) (1971 ~ )

◆1녀 방민영(方旻榮) (1992 ~ )

◆2녀 방원영(方元榮) (1994 ~ )

◆3녀 방하영(方何榮) (1995 ~ )

◎2남 방재효(方在孝) (1946 ~ ) / 妻 조민효(趙民孝, 풍양 조씨)

◆1녀 방소영(方昭榮) (1977 ~ )

◆2녀 방혜영(方惠榮) (1986 ~ )

◎3남 방재휴(方在畦) (1948 ~ ) / 妻 김경희(金慶姬, 광산 김씨)

◆1남 방윤영(方胤榮) (1981 ~ )

◆2남 방신영(方信榮) (1983 ~ )


3. 조선일보 가문 기업 임원단


 


1. 개요


 

일제강점기와 한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제9대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했다(1933년 3월~1950년 7월).


2. 생애


1883년 평안북도 정주군 고안면 소암동#에서 방계준(方啓畯)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다가 대차게 말아먹고, 대신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에 뛰어들어, 교동광산에서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2.1. 언론인 방응모


1933년에 공금횡령사건과 자금난으로 어려워진 조선일보를 조만식[2]으로부터 인수했고, 항일 민족지 성향의 조선일보를 친일 신문으로 바꿔버렸다. 이때 김성수가 소유한 동아일보,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와 경쟁하면서 조선일보 사옥을 증축하고 신문지면을 확대하고 1935년에 《조광(朝光)》을 창간하는 등 조선일보를 번창하도록 하는데에 주력하였다. 1936년에는 동방문화학원을 설립했다.


2.2. 친일 행적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8년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거나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등의 다양한 친일 행위를 하였다. 1942년 6월에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여러 친일 단체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되었다. 그나마 같은 언론인 친일파였던 김성수는 변절 전에는 독립유공자이기도 했고 친일파였을 때도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였으나 방응모는 처음부터 포탄에 맞아죽는 순간까지 반민족행위자였다.


2.3.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후 8월 말과 9월 초에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 건준 활동은 안재홍의 권유로 활동한 거다.)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1월 조선일보를 복간했고, 귀국한 김구를 적극 후원하면서 1946년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맡아 아주 잠깐 활동했다. 1946년 8월 25일에 게재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개최에는 방응모(方應謨)의 이름이 있다.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유해봉환 사업을 후원하기도 했고 김구의 반탁운동을 지원하여 반탁운동단체의 간부와 독립촉성회의 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때, 1946년 겨울, 그가 운영한 동방문화학원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마포구 대흥동인 곳의 대규모 부동산을 헐 값에 구입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땅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였다. 그래서 미군정청이 인가한 몇 안되는 학교 중 하나인 "숭문상업학교"를 구입해 지금의 성동구 금호동에 있었던 "숭문상업학교"를 이곳 대흥동으로 이전시키고 땅을 관리하게 하였고, 몇 개월 후 학교를 6년제로 바꾸면서 명문학교로 개선 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학교가 현재의 숭문중고등학교가 되었으며,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이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 김구가 노선을 바꾸어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면서 그를 지지하던 우익 세력이 떨어져 나가자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직접 나서서 "김구 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구와의 결별 이후 한국독립당을 탈당해 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49년 김구의 장례식 때는 상무위원을 맡았다.


2.4. 정치행적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경기도 양주군 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사회당 조시원 후보에 밀려 2위로 낙선했다.


2.5. 최후


6.25 전쟁이 일어난 뒤 북으로 끌려가던 중 1950년 9월 28일 북한 경기도 개성시 서흥동 송악산 부근에서 트럭에 실려 수송되던 도중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하였고, 시신은 서흥동 부근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하여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지 않았다면 죽을 일도 없었다고 하지만, 미군이나 북한군도 민간인에게 실수 혹은 고의로 포격이나 폭격을 한 것도 꽤 된다. 반드시 납북자 무리라든지 그런 것에 해당되지 않아도 죽은 사람이 많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사주가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 기간만료로 실종처리되었다.

 

한편, 방응모와 함께 납북되었다 탈출한 계광순 전 국회의원은 방응모와 평양까지 같이 끌려가 수감되었으나, 방응모는 병환으로 거동을 못해 타 수용소에 이감되지 못한 채 헤어졌다고 하며, 이 때문에 정황상 평양의 수용소에서 옥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여 다른 주장을 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측은 1970년 방우영이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1면 판권지에 방응모 명의를 빼지 않았다.


3. 여담


한편 환갑이 다 되도록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방재윤을 양자로 삼았는데, 환갑이 지난 1944년에서야 친아들 방재선을 보았다. 그러나 납북 당시 방재선의 나이는 불과 7세, 양손자 방일영은 28세였고, 양자인 방재윤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결국 조선일보의 경영권은 방일영 측으로 넘어가 지금에 이르렀고 양자와 친자 집안 사이에는 소유권 분쟁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 벽초 홍명희와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만해가 심우장에서 살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준 적도 있다.

 

시인 백석의 일본 유학 자금을 후원했다. 백석의 부친은 한때 조선일보 사진부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정주 동향 사람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방응모와 백석의 밀접한 관계는 시 <고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

 

2015년작 영화 암살에서 이경영이 연기한 강인국의 실제모델 중 하나라고 한다.


4. 조선일보의 주장과 반론


방일영이 사망했을 때도 조선일보 계열은 역시나 방응모의 아들. 독립운동가인데 억울하게 인정을 못 받는다고 주장했다.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을 때, 방응모의 손자인 방우영과 조선일보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소송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0년 12월, 재판부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라며 판결했다. 이어 재판부는 '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은 극동 평화를 확립시키려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적극적으로 활동 했다.'고 인정했다.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는 걸 덮고, 북한에게 고문받아 죽었다면서 졸지에 항일 운동가에 반공 투사라고 주장한 적도 있다. 그러자 동아일보도 언론인으로서 긍지를 버렸다라고 주장했다.[6]

 

방재윤이 죽을 때에도 독립운동가 방응모 선생 아들이라고 자랑하던 것들이니. 앞서 말했듯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던것에 대해서는, 김구 선생의 비서였던 신창균이 정지환 기자와 인터뷰했을 때도 방응모가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에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 이유는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한쪽에 기반을 둔 조선일보가 기반이 무너지게 되니까 김구의 한독당에 접근한 것. 거기다 동아일보의 김성수가 이승만에 접근한 상황이라. 물론 한독당이 미군정의 탄압을 받자 1~2달 만에 나가버렸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이라는 자리가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성격이었으며 조선일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방응모가 무슨 한독당 재정부장인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어 신창균은 '조선일보는 방응모와 김구를 엮지 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친아들인 방재선은 안티 조선일보 시민단체들이 벌인 조선일보 친일반민족행위 민간 모의법정에 증인으로 참석해 아버지의 친일 행위에 대해 밝히고 사과하였다. 때문에 방일영이 죽자[7] 문상하러 갔다가 쫓겨났다. 방상훈은 방재선에게 방응모의 친일행위 발언을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방재선 왈 "친일 한 것은 한 것이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이외에도 방재선이 방상훈을 상대로 탈세,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고소한 일도 있었으나 무죄로 드러났다.

 


 


1. 개요


1948년 2월 6일, 전 조선일보 대표이사 방일영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경복고등학교, 오하이오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오하이오 대학교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조선일보 사장을 거쳐 2016년 조선일보 이사를 역임했다. 한겨레 김의겸 전 기자 칼럼에 따르면 초년 이름은 방갑중, 경영에 뛰어들기 전엔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였다고 한다.

 

2001년 조선일보 사장 역임 당시 국민의 정부에서 시행한 세무조사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았다. 이 재판에서 조세포탈 및 횡령 혐의로 집행 유예 및 벌금 25억원을 선고받고 신문 발행인 자격이 박탈되었으나,.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특별사면을 받았다.

 

방응모의 증손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친손자는 아니고 친형의 증손자다. 형의 자식(조카)인 방재윤의 아들이 방일영이고, 방일영의 장남이 방상훈이기 때문이다.

 

장자연 사건 당시 피의자로서 '황제조사'를 받았다는 논란이 있다.

 

2021년, 진행 중인 징벌적 손해제를 포함한 '언론 개혁'에 대해 “시민단체로 위장한 이념단체들과 권력의 편에 선 매체들을 동원해 진실을 수호하려는 언론들에게 ‘적폐’이자 ‘말살되어야 할 악’이라는 오명을 씌우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언론의 자유마저 이념과 진영논리로 오염시켜 흔들어대는 참으로 부도덕한 일들” “이런 시도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위험한 징조이며 자칫 ‘민주주의의 종언’을 부를 수도 있다”며 창간 101주년 기념사에서 비판하였다. 동시에 “사회 곳곳이 포퓰리즘과 위선, 거짓으로 흔들릴 때 우리는 버팀목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우리는 늘 언론으로서 할 말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징벌적 손배제’ 겨냥 방상훈 사장 “민주주의 종언” 비판 왜?

 

그에 대해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에게 “언론의 자유를 이용해 이 나라를 이념과 진영논리로 오염시켜 공동체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은 조선일보 등 수구족벌언론들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가” “ABC협회를 이용해 광고주들을 속이고 언론소비자들에게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기질은 과연 언론의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고 비판을 받았다.

 

서울중앙지검장 재직 시절의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비밀 회동을 가졌다는 의혹이 나와, 일부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한 감찰을 요구했다.


2. 경력


(1993년 ~ 현재) 한국기원 이사

(1993년 3월 ~ 현재)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

(2004년 ~ 2006년) 학교법인 동방문화학원(숭문중고등학교) 이사장

(2003년 ~ 2006년)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센터 이사장

(2002년)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2002년) 아시아신문재단 한국위원회 이사

(2000년) 한국신문협회 이사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 수석부회장

(1998년) 아시아신문재단 한국위원회 이사

(1998년 5월) 제9대 전국재해대책협의회 회장

(1997년) 연암상록재단 이사

(1997년 3월 ~ 2000년 3월) 한국신문협회 회장

(1993년) 방일영 문화재단 이사

(1992년 4월) 한국데이타베이스산업진흥회 회장

(1992년 12월)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센터 이사장

(1989년 7월 ~ 2006년) 조선일보 발행인 · 인쇄인

(1989년 ~ 1990년 12월) 조선일보 편집인

(1988년 3월 ~ 1993년 3월) 조선일보 대표이사 부사장

(1984년 ~ 1988년 2월) 조선일보 대표이사 전무

(1984년 8월 ~ 1984년) 조선일보 전무이사

(1975년 ~ 1984년 8월) 조선일보 상무이사

(1973년 ~ 1975년) 조선일보 이사

(1972년 ~ 1973년) 조선일보 기획관리실장

 


 


1. 개요


사실에 대한 믿음, 할 말은 하는 용기

아침의 베스트셀러, 조선일보.

 

대한민국의 조간 일간 신문. 강경한 보수주의 우파 반공주의 성향의 신문사이자 댓글로 욕을 많이먹는 곳 이다. 한국의 보수 우파 신문 3대장인, 이른바 조중동 중에서 언제나 첫 번째로 꼽히는 언론이다. 실제 언론사 자체적으로도 보수주의 성향을 표방한다. 1920년 일제강점기 중 소위 문화통치 시기에 언론 탄압이 완화되었을 때 탄생하여, 2020년 3월 5일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2019년도 한국 ABC협회 유료부수 통계에서도 2위 동아일보와 상당한 격차를 벌린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국 각 지역별로도 부산일보가 1위인 부산광역시와 매일신문이 1위인 대구광역시를 제외한 모든 시도 지역에서 일간지 유료부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후술된 내용이나 신문 항목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렇게 알려진 유료부수나 발행부수의 대부분이 뻥튀기 부수인 것은 이미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쨌든 1970년대 말 발행부수 1위를 기록한 이래로 줄곧 발행부수나 유료부수가 제일 많으며, 따라서 적어도 신문사 가운데에서는 가장 큰 매체 영향력을 발휘하는 언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스스로 '1등 신문'임을 내세운다. 물론 200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신문 자체가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매체로써의 신문 영향력 또한 급격히 쪼그라드는 세상이 된 터라, 과거처럼 '신문 중의 영향력 1위'가 더이상 '언론 중의 1위'가 아니게 되었다. 일례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매년 조사하여 발표하는 '언론수용자 조사' 통계를 보면,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조선일보가 모든 매체를 통들어 영향력 및 신뢰도 조사 모두에서 줄곧 3위 안에 꼽혔으나, 2020년 현재 통계 기준으로 보면 여러 지상파 채널 및 종편과 포털 사이트에 밀려 영향력 및 신뢰도 조사 순위 모두에서 10위로 추락했다.

 

박정희의 집권 시기인 1960~7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같은 독보적인 1등 신문은 아니었지만, 박정희 정권과 깊게 결탁하는 한편, 이를 통해 마련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동아일보에 버금가는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된다. 이후 조선일보가 본격적으로 급성장하게 된 계기는 전두환의 집권과 제5공화국 시기로 볼 수 있다. 12.12 쿠데타 이후에는 전두환 신군부에 적극 영합하면서 피해를 보지 않았고, 조선일보는 80년대 전두환 정부 시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방우영은 전두환이 집권을 위해 만든 초법적 통치기구인 국보위에 입법위원으로 참여하며 노골적으로 결탁했을 정도였으며, 특히 전두환이 집권을 눈앞에 두었던 시기인 8월 23일에는 그 유명한 '인간 전두환 -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이라는 용비어천가급 특집 기사를 쓰며 전두환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 전력을 쏟았다.또한 조선일보가 80년대에 급성장 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언론통폐합 이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주요 경쟁지인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방송사를 KBS에게 강제로 헌납했고 한국일보 역시 자매지인 서울경제신문의 사업을 접어야하는 등 모두 언론통폐합으로 엄청난 재산을 뺏긴 반면, 조선일보는 일부 개혁 성향의 기자들만 해직시키는 선에서 처리했고, 전두환 정부에 깊이 참여하는 등 5공과 지속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전성기는 1990년대로 꼽을 수 있는데, 1987년 6월 항쟁으로 언론 자유화가 되고 지면 제한이 없어지자 의욕적인 확장에 나서서 발행 부수가 200만 부를 넘겼고, 보수 정치권이나 경제계와 결탁하여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한편, 당시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미디어 광고 시장의 수혜도 톡톡히 누렸다.

 

또한 1987년 민주화 직후부터 1990년대 초중반기에 걸쳐 김대중을 적극적으로 비토해서 反DJ 정서를 고착시키는 한편, 1990년 3당 합당과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김영삼을 적극적으로 편들어 준 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매체 영향력을 입증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당시 조선일보의 논조는 제14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터진 초원복집 사건 관련 보도 사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심지어 정치 권력을 옹립하는 기능으로써의 거대 언론 권력이 최초로 부각된 사례가 김영삼 정부와 조선일보의 결탁이었다는 분석이 이후 언론학계에서 나올 정도였다.] 이 덕분인지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바로 다음날 서울 흑석동에 있는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의 집을 방문하여 만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가 가졌던 막강한 권력을 보여준 단적인 장면이었다.

 

거기에다가 이 시기는 언론 통제도 누그러질 때라 정치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도 덤이었다. 물론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도 같이 200만부를 넘겼기 때문에 혼자 독주를 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영향력으로나 매출액으로나 이때 만큼의 전성기는 없었다. 사실 이 전성기 시절에도 조선일보가 능력있는 기자들을 많이 보유했던 것과는 별개로 오보를 많이 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어쨌든 시간이 훌러 1997년 대선에서도 조선일보는 이회창과 이인제를 놓고 이회창을 선택했고, 한동안 이인제가 승승장구해서 지지율이 이회창을 크게 앞섰을 때에도 중앙일보와 합작해서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도 했지만, IMF 외환위기가 한창 닥쳐왔던 때라서 표 분산을 완전히 막지 못한 채로 결국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발행부수가 200만부를 여전히 넘을 정도로 영향력이 강했기에 국민의 정부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비토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2001년부터는 동아일보도 보수 진영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며 이른바 조중동 3사가 전부 한나라당과 한나라당 총재이자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을 밀어주는 스탠스가 되었다.

 

조중동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널리 정착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절정에 이르렀던 2001년에는 발행부수가 248만 부에 달했고,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을 당선시키지는 못했지만, 이후 각종 이슈를 만들어내면서참여정부의 지지율을 하락시켰으며,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이후로는 박근혜를 밀어주면서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종편 출범 이후부터는 TV조선도 50대 이상 보수층에게 꽤나 강력하게 어필하면서, 여전히 종이신문 자체 발행부수에 비해 보수층에서 만큼은 높은 매체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일보 전성기의 마지막 시점은 대략 2000년대 초반 즈음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례로 2001년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한 변용식 기자가 어느 인터뷰에서 "전국 국민의 4분의 1이 같은 시간에 조선일보 기사를 본다", "영향력 면에서 정치권력을 능가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여 구설에 오를 정도였으며,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각종 언론 비평에서 '천만 독자 조선일보'라는 표현이 간혹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초고속 인터넷과 컴퓨터의 보급이 점차 이뤄짐에 따라 언론매체의 환경 또한 온라인으로 점점 이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는 스마트폰의 급격한 보급과 함께 통신 환경 또한 모바일 위주로 급변하기 시작하면서 신문 구독률이나 열독률이 급락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조선일보의 매체로써의 영향력도 함께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조선일보가 기사를 쓰면 여론이 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였지만, 세월이 흘러 현재는 조선일보가 1면에 뭘 쓰든, 사설에 뭘 쓰든 여론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특히 2010년대 중반 이후 부터는 매체 영향력의 확연한 축소세와 더불어 취재력의 한계 또한 뚜렷하게 관측되는데, 이는 종이신문 산업 전체의 영향력 축소와도 직접적으로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발행부수나 유료부수 집계는 신문 업계에서는 이미 가짜 유료부수 만들기로 허수와 다름 없이 인식된 지도 오래이고, 조선일보의 유료부수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약 120만 부 정도와는 다르게 100만부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ABC 공사에서 발표하는 유료부수는 신문대금의 45%만 지불해도 유료부수 1부로 집계해 주고, 짧은 집계 실사 기간동안 신문 사측에서 보급소로 강제 밀어넣기 영업을 통해 유료부수를 부풀리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에, 발표 자체의 공신력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례로 종이신문의 가구 구독률이 약 60% 가량 되던 2000년 경 조선일보의 유료부수가 약 200만 부였는데, 종이신문 구독률이 6.3%로 떨어져 종이신문 구독률 자체가 과거에 비해 약 10분의 1 수준이 된 2020년에 조선일보의 유료부수가 약 119만 부로 발표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이에 대해서는 급격히 줄어든 가구 구독 대신 영업장 구독 쪽에 집중하여 유료부수 숫자를 어느 정도 방어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지만, 영업장 구독 확대를 통한 부수 방어에도 한계가 있고, 또한 영업장 구독은 그 특성상 신문 독자가 제대로 특정되지 않기 때문에 매체의 집중도와 독자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미약해지므로, 줄어든 유료부수나 구독률보다도 훨씬 더 매체 영향력이 더욱 쪼그라들었다는 것이 중평.

 

실제 조선일보의 매체 영향력 상실은 객관적인 통계 자료로도 입증되는데, 단적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매년 수행하는 언론 수용자 조사의 결과를 보면, 2010년의 신문 열독률 조사에서 조선일보의 열독율이 17.7%로 조사 되었던 것이, 10년 후인 2020년의 조사에서는 3.2%가 나왔다. 10년 만에 열독률이 5분의 1 이하로 급락한 것이다. 물론 이는 종이신문 산업 전체가 쪼그라들어서 그런 것인지라 모든 신문사가 전반적으로 비슷한 비율로 열독률이 줄어든 것인데, 특히 종이신문 업계 선두주자이던 조선일보는 열독률에 관한 절대 수치에서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2016년 제20대 총선,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로는 2010년대 전반기에 비해서도 영향력이 크게 줄어든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평이 많으며,전통적인 보수층에서도 상당수가 조선일보가 박근혜를 비토한 것에 배신감을 느끼고 다양한 극우파 인터넷 대안 언론이나 극우 유튜브 등으로 갈아타는 현상이 관측되기도 했다.

 

한편 종편 채널인 TV조선이 탄생하면서 완전히 레거시 미디어로 전락한 종이 신문에서 벗어나 방송으로 진출한 후, 60대 이상의 노년층을 타겟으로 하는 전략이 성공하여 2020년 들어서는 JTBC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시청률 경쟁을 하고 있다. 물론 광고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숫자인 '2049 타켓 시청률'면에서 보면, JTBC가 지상파 3사나 tvN과 비슷한 레벨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에 반해 TV조선은 해당 청년 세대에게는 존재감이나 소구력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참고로 20대 초반에서 40대 후반까지는 소비 성향이 크고, 문화 생활의 동향 및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방송국에 광고를 내는 광고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대인데, 당연히 이 세대를 타겟으로 한 광고나 프로그램은 광고 효과가 크므로 단가 또한 상당히 비싸다. 종편 경쟁사인 JTBC의 채널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진 판이어서, 중장기적으로는 방씨 가문 우위의 조중동 체제가 홍씨 가문 우위의 중조동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현재 조선일보 계열에 대한 가장 불안한 지점은 방송통신위원회 차원에서의 TV조선의 방송 재허가 취소와, 사주 가문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이다. 실제 TV조선은 늘 방송 재허가 여부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또한 방상훈 회장의 아들인 방준오와 방정오에 대한 지분 상속 작업이 제대로 아직 이뤄지지 않은 터라, 계열사 분할-합병 작업이나 지분 상속 사항 등에 따라 앞으로 상속 및 승계의 불법성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인터넷 언론 시장을 내다보고 상당히 이른 시기인 1995년에 조선일보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전자책 국내 도입 초기에 선제적으로 전자책 단말기를 만들기도 하었다. 오랫동안 여러 한자검정시험들을 후원하고 있다.

 

2017년 6월 24일, 대한민국 최초로 지령 30000호를 넘었다. 2020년 3월 5일,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