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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부동산 경제 정보

한국의 보수 우파 신문 3대장 조중동 동아일보 가문 (삼양, 경방)

 

 

 

동아일보 가문 기업 창업주들.

왼쪽부터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 김성수의 매제 김용완 경방 창업주.


1. 개요


동아일보 김성수의 가족관계. 울산 김씨다.

 

정치인으로는 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원을 배출해낸 가문으로, 혼맥도 꽤 화려하다.

 

동아일보, 고려중앙학원, 삼양그룹과 경방을 소유 및 경영하고 있고, 그 외에도 JB금융지주를 사실상 소유하고 있으며, DB그룹, 현대성우그룹등이 혼맥으로 얽혀있다.


2. 상세


김성수는 1903년 13세에 고정주(高鼎柱)의 딸이며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장인 고정주는 장흥 고씨로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으로 규장각 제학을 역임한 인사였다. 또한 전라남도 창평군(현 담양군)에서 지주이자 관료로 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1919년 고광석과 사별후 8살 연하인 이아주(李娥珠]와 재혼했다. 이아주가 3.1운동에 참여 했다 일제에 구속 돼서 옥고를 치른 후 1920년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해 있을 때 김성수가 문병을 갔던 계기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고광석 여사 사이에서 4남1녀 이아주 여사 사이에서 5남3녀 모두 9남 4녀를 뒀다. 장남 김상만, 장녀 김상옥, 차남 김상기, 3남 김상선, 4남 김상흠, 차녀 김상숙, 5남 김상오], 3녀 김상현, 6남 김상종(1929년생), 7남 김남, 8남 김상석, 9남 김상겸, 4녀 김순민이다. 이 중에 4남 김상흠은 동시기에 연희전문 재학 중 항일운동으로 해방까지 옥고를 치렀고 해방후 국회의원을 역임했는데 이 사실은 그다지 언급이 되지 않는다.

 

그의 동생 수당 김연수는 삼수사(三水社)라는 회사를 세웠고, 이는 후에 삼양그룹이 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대학교, 동아일보, 경방, 삼양그룹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친일행각에 있어서 이쪽도 빠질 수 없어서 김연수의 경우도 친일행위로 얻은 토지를 환수한 것에 대해서 적법하다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김연수는 슬하 7남을 뒀는데, 김연수의 차남 김상협은 고려대학교 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연수의 3남 김상홍이 30대부터 부친 수당 김연수와 같이 경영에 참여했다.

 

장흥 고씨 일가와 인연이 많은 편이다. 김성수의 어머니와 아내 고광석, 장인 고정주도 장흥 고씨였고, 고광석의 친조카이자 고정주의 친손녀인 고귀현은 가인 김병로의 맏며느리이자 김종인의 큰어머니다. 맏아들 김상만도 장흥 고씨 종손이자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고영완(高永完)의 여동생 고현남(高賢男)과 혼인하였다. 넷째 아들 김상흠도 고영완의 여동생 고완남과 혼인하였다. 참고로 고영완의 막내 사위인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2014년부터 인촌기념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고광석의 조카인 고재욱이 김상만과 같이 동아일보를 경영했다.

 

해평 윤씨 일가와도 인연이 있다. 아들 중 김남은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를 지냈으며, 또 다른 아들 김상석은 윤치영의 딸과 결혼해 사돈 관계가 된다.


3. 가계도


김명환 첨추(僉樞)

김요영 부경(副景)

김경중 (1863 ~ 1945) 가선대부 / 妻 장흥 고씨 (1862 ~ 1938)

4남 김성수 (1891 ~ 1955) 제2대 부통령, 동아일보 사장 / 妻 고광석 (1886 ~ 1919)

1남 김상만 (1910 ~ 1994) 동아일보 회장 / 妻 고현남

1남 김병관 (1934 ~ 2008) 동아일보 회장 / 妻 안경희 (1939 ~ 2001) 前 일민미술관장

1녀 김태령 (1963 ~ ) 現 일민미술관장 / 夫 함기석

1남 김재호 (1964 ~ )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 妻 이정원 (1967 ~ )

2남 김재열 (1968 ~ )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마케팅 연구부문 사장 / 妻 이서현 (1973 ~ )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겸 리움미술관 운영위원장

1녀 김지이 (2001 ~ )

2녀 김지수 (2003 ~ )

3녀 김지후 (2006 ~ )

1남 김성준 (2007 ~ )

1녀 김명의 (1939 ~ )

2녀 김명진 (1941 ~ )

2남 김병건 (1943 ~ )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3녀 김명초 (1946 ~ )

1녀 김상옥 (1916 ~ 2011) / 夫 유씨

1녀 유영희 (1936 ~ 2009) / 夫 김창근 (1930 ~ 1991) 국회의원, 교통부장관

2녀 유경희 (1940 ~ )

2남 김상기 (1918 ~ 2011) 동아일보 회장 / 妻 원종숙

1남 김병국 (1959 ~ ) 초대 국립외교원장 / 妻 주영아

2남 김병표

1녀 김창원

2녀 김영원

3녀 김효신

3남 김상선 (1919 ~ ?)

4남 김상흠 (1919 ~ 1991) 동아일보 편집국장, 국회의원 / 妻 고완남

2녀 김상숙 (1922 ~ 2010) / 夫 이병린 고려중악학원 이사 (1915 ~ 2004)

1남 이준 전 서울은행지점장

2남 이욱 수풍상사 부장

3남 이완 고려대학교의료원 사무국장

1녀 이진

5남 김상오 (1924 ~ 2004) 인촌기념회 이사 / 妻 홍정임

1녀 김동순 (1948 ~ )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및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명예교수 / 夫 박정의 (1949 ~ )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및 삼성서울병원 순환기내과 명예교수

1남 김병철 (1949 ~ ) 고려대학교 제18대 총장 겸 식육공학과 명예교수, 동아일보 이사 및 殿 서울대학교 이사 / 妻 김명희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공학과 명예교수

2녀 김창희 (1952 ~ ) 재미교포

2남 김병제 (1955 ~ ) 재미사업가 / 妻 안병효

3남 김병준 (1959 ~ ) 강남대학교 실버산업학과 교수 / 妻 김선주

3녀 김상현 (1926 ~ )

6남 김상종 (1929 ~ )

7남 김남 (1930 ~ )

8남 김상석 (1933 ~ )

9남 김상겸 (1935 ~ 2004)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남 김병호 현대성우오토모티브 부사장

1녀 김수혜 (1963 ~ ) / 夫 정몽용 (1961 ~ ) 현대성우그룹 회장

1남 정인선 (1990 ~ )

2남 정호선 (1994 ~ )

4녀 김순민 (1937 ~ )

5남 김연수 (1896 ~ 1979) 삼양사 회장 / 妻 박하진

1남 김상준 (1918 ~ 2004) 삼양염업 명예회장

1녀 김정희 (1948 ~ ) / 夫 김준기 (1944 ~ ) 前 DB그룹 회장

1녀 김주원 (1974 ~ ) / 前夫 김주한

1남 김남호 (1976 ~ ) DB그룹 회장 / 妻 차원영 (1979 ~ )

1녀 김** (2015 ~ )

2남 김상협 (1920 ~ 1995) 제16대 국무총리 / 妻 김인숙 (1924 ~ 2019)

1녀 김명신 (1948 ~ ) / 夫 송상현 (1941 ~ ) 전 서울대 법대 교수, 전 국제형사재판소장

1남 김한 (1954 ~ ) 前 JB금융지주 회장 / 妻 김영란

3남 김상홍 (1923 ~ 2010) 삼양그룹 명예회장 / 妻 차부영 (1927 ~ 2015)

1녀 김유주 (1950 ~ ) / 夫 윤영섭 (1947 ~ ) 고려대 교수

1남 김윤 (1953 ~ ) 삼양그룹 회장 / 妻 김유희 (1960 ~ )

1남 김건호 (1983 ~ ) 삼양홀딩스 상무

2남 김남호 (1986 ~ )

2남 김량 (1955 ~ ) 삼양홀딩스 부회장 / 妻 장영은 (1960 ~ )

1녀 김남희 (1989 ~ )

2녀 김주희 (1993 ~ )

3녀 김율희 (1999 ~ )

2녀 김영주 (1958 ~ )

4남 김상돈 (1925 ~ ?) 삼양염업 회장

5남 김상하 (1926 ~ 2021) 삼양사 대표이사 회장 / 妻 박상례 (1931 ~ )

1남 김원 (1958 ~ ) 삼양홀딩스 대표이사 부회장 / 妻 배주연 (1965 ~ )

2남 김정 (1960 ~ ) 삼양패키징 부회장 / 妻 안혜원 (1967 ~ )

1녀 김희원 (1993 ~ )

1남 김주형 (1997 ~ )

2남 김주성 (2000 ~ )

1녀 김영란 (1962 ~ 2014) / 夫 송하철 (1961 ~ ) 항소 대표이사

6남 김상철 (1938 ~ 2007)

1남 김형석 ING 은행 상무

1녀 김의선

7남 김상응 (1946 ~ 2002) 삼양사 회장

3녀 김점효 (1901 ~ 1995) / 夫 김용완 (1904 ~ 1996) 경방 명예회장

1남 김각중 (1925 ~ 2012) 경방 명예회장 / 妻 차현영 (1937 ~ )

1남 김준 (1963 ~ ) 경방 회장 / 妻 임진희 (1968 ~ )

1녀 김나연 (1999 ~ )

2남 김담 (1965 ~ ) 경방 타임스퀘어 대표이사 사장 / 妻 문화 류씨 (1968 ~ )

1녀 김지영 (1970 ~ ) / 夫 이승호

1녀 김현중 (1927 ~ ) / 夫 이임성 삼성전자 초대 미주법인장

2녀 김인중 (1930 ~ ) 세브란스병원 의사 / 夫 성주호 (1927 ~ ) 창성학원 이사장

3녀 김봉애 (1938 ~ ) / 夫 한만청 (1943 ~ ) 서울대학교병원장

4녀 김명애 (1941 ~ ) / 夫 이중홍 (1941 ~ ) 前 경방 회장

 


4. 동아일보 가문 기업 회장단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1. 개요


세상을 보는 맑은 창, 신뢰받는 신문 東亞日報

동아일보 비전

출처 입력

 

 

대한민국의 조간 종합 일간 신문.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창간호. 전라도 지역의 부호였던 김성수 가 설립하였다. 그래서인지 1980,90년대에는 "전라도 사람은 껌은 해태 껌을 씹고 신문은 동아일보를 본다"는 말도 있었다. "동아일보"라는 명칭은 창간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유근이 지었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중앙 일간지 중에서는 서울신문, 조선일보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가 오래 된 일간지다. 처음부터 민족지로 창간되었고 조선인들을 잘 대변해주어서였는지 1928년 총독부 경무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동아일보의 발행부수는 4만868부로 매일신보(2만3946부), 조선일보(1만8320부)보다 많았다.

 

사실 1980년대 이후 전두환 정부와 결탁한 조선일보가 급속한 성장세로 구독 부수 1위를 기록하며 신문 업계의 원톱이 되기 이전까지는 한국일보와 더불어 구독 부수나 매체 영향력 면에 있어서 쌍두마차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강한 신문이었고 사실상 신문 업계에서 2위 없는 압도적 1위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2020년 현재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 우파 성향의 3대 신문사로 꼽힌다. 그렇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종이신문 산업 자체가 하락세를 타면서 동아일보도 유료부수나 신문의 열독률이 급격하게 감소하였고 전반적으로 과거에 비해 매체의 존재감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일례로 2019년 기준 신문 열독률이 2.6% 수준에 불과하다.물론 이것은 종이신문의 얘기이기 때문에 온라인 상에서의 독자층도 미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노조는 미가맹이다. 원래는 언노련 소속이었지만, 2000년 민주노총 산하의 산별노조화면서 탈퇴했다.


2. 사시


 

 

▲ 동아일보 창간호 1면에 실린 동아일보의 사시

 

1. 본보는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2. 본보는 민주주의를 지지함

3. 본보는 문화주의를 제창함

동아일보 사시

출처 입력

주지를 밝히노라

主旨를 宣明하노라

 

(1)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을 자임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소수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단일한 전체로서의 2000만 민중의 기관으로 자임하니, 그 의사와 이상과 의도와 운동을 여실히 표현하며 보도하고자 한다.

 

(2)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이는 국체(國體)니 정체(政體)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다. 곧 인류 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을 배척하고 인격의 고유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국내 정치에 적용하면 자유주의며, 국제정치에 적용하면 연맹주의요, 사회생활에 적용하면 평등주의요, 경제조직에 적용하면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라.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서는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 가운데 친목과 단결을 의미하며, 세계 전체에 있어서는 정의와 인도(人道)를 승인한 가운데 평화와 연결(聯結)을 의미한다. (중략)

 

(3) 문화주의를 제창한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함과 오묘함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하게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을 높이 제창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조선 민족의 사명이며 생존의 가치라고 사유한 까닭이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사 중 일부

출처 입력


3. 사가


 

3.1. 옛 버전


작사는 춘원 이광수, 작곡은 김영환이 맡았으며, 1926년부터 제정되어 1985년까지 사용했다.

1절

삼천만 가슴속에 졸던 자유혼

깨어라 소리치어 자유의 소리

나날이 새힘자라 새는 날마다

영원히 외치도다 자유의 소리

 

2절

이 붓대 보았는가 정의의 붓대

의 아닌 것 보고는 못 참는 붓대

차라리 의에 싸워 꺾일지언정

곧고 곧은 그 절개 꺾지 못하네

 

3절

횃불은 들렸도다 진리의 횃불

삼천만 우리 강산 두루 비치러

옛 역사 새 정신 타는 광명은

천만대 내리 전할 진리의 횃불

 

4절

원컨대 복이 되어 사랑의 꾸리[8]

끝없는 실을 끌고 동포의 가슴

낱낱이 들어나어 삼천만 혼을

짜리라 새 조선의 빛난 깃발로

 

후렴

동아일보 동아의 종소리 자유종 소리

삼천만 자유혼의 외치는 소리

만국에 울려라 만세에 울려라

출처 입력


3.2. 새 버전


1985년 창간 65주년을 맞이해 제정되었으며, 작사는 강인섭, 작곡은 김성태, 편곡은 장일남이 맡았다.

1절

동녘의 빛이어라 민족의 길 밝힌 등불

삼일정신 받들어 새벽을 헤쳐오다

밝히리라 온누리에 자유의 횃불

누구도 영원한 그 앞을 막지 못하리

 

2절

나라가 없을 때도 깨어있던 종소리

진리와 함께 가는 보람찬 길이로다

외치리라 온누리에 민주의 소리

누구도 의로운 그 붓은 꺾지 못하리

 

3절

아― 세계로 뻗어가는 겨레의 기상

시대에 앞장서서 문화의 발을 간다

알리리라 진실이 무엇인가를

천 년 뒤 만나도 살아있는 글자기를

 

후렴

동아일보 겨레의 얼 나날이 새로와라

나라 위한 바른 말 역사에 전하리라

출처 입력


4. 사옥


 

광화문 동아일보 구 사옥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52 (세종로)

 

세종로 동아일보 동아미디어센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 (서린동)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9 (충정로3가)

 

상암동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75 (상암동)

건축적으로는 2000년 완공된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빌딩 옆에 1926년에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마코토가 설계한 구사옥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데, 근대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이 나란히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광화문 구 사옥은 현재 일민미술관과 신문박물관으로 사용되고있고 국내에 남아있는 언론사 건축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참고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중동이라고 불리던 신문사들 중 구 사옥은 사라지고 신 사옥만 번듯하게 있는 조선일보, 일찍 폐간되어 농협으로 사용되는 구 사옥만 남아있는 조선중앙일보 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1992년 완공한 충정로 사옥이 있다. 원래 동아일보는 충정로 사옥 완공 이후 이곳으로 본사를 이전하였으나, 광화문 구 사옥 옆에 동아미디어센터가 건설되자 다시 이곳으로 본사를 옮겼다. 2014년에는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채널A와 함께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를 신축하였다.

 

 

 

2019년 3월 20일부터 2020년 12월 31일까지 프랑스의 현대 미술가 다니엘 뷔렌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사옥의 외벽을 미술작품으로 바꾸었다. 한국의 색, 동아일보 X 다니엘 뷔렌


5. 오너 일가


김명환 첨추(僉樞)

김요영 부경(副景)

김경중 (1863 ~ 1945) 가선대부 / 妻 장흥 고씨 (1862 ~ 1938)

4남 김성수 (1891 ~ 1955) 제2대 부통령, 동아일보 사장 / 妻 고광석 (1886 ~ 1919)

1남 김상만 (1910 ~ 1994) 동아일보 회장 / 妻 고현남

1남 김병관 (1934 ~ 2008) 동아일보 회장 / 妻 안경희 (1939 ~ 2001) 前 일민미술관장

1녀 김태령 (1963 ~ ) 現 일민미술관장 / 夫 함기석

1남 김재호 (1964 ~ )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 妻 이정원 (1967 ~ )

2남 김재열 (1968 ~ )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마케팅 연구부문 사장 / 妻 이서현 (1973 ~ )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겸 리움미술관 운영위원장

1녀 김지이 (2001 ~ )

2녀 김지수 (2003 ~ )

3녀 김지후 (2006 ~ )

1남 김성준 (2007 ~ )

1녀 김명의 (1939 ~ )

2녀 김명진 (1941 ~ )

2남 김병건 (1943 ~ )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3녀 김명초 (1946 ~ )

1녀 김상옥 (1916 ~ 2011) / 夫 유씨

1녀 유영희 (1936 ~ 2009) / 夫 김창근 (1930 ~ 1991) 국회의원, 교통부장관

2녀 유경희 (1940 ~ )

2남 김상기 (1918 ~ 2011) 동아일보 회장 / 妻 원종숙

1남 김병국 (1959 ~ ) 초대 국립외교원장 / 妻 주영아

2남 김병표

1녀 김창원

2녀 김영원

3녀 김효신

3남 김상선 (1919 ~ ?)

4남 김상흠 (1919 ~ 1991) 동아일보 편집국장, 국회의원 / 妻 고완남

2녀 김상숙 (1922 ~ 2010) / 夫 이병린 고려중악학원 이사 (1915 ~ 2004)

1남 이준 전 서울은행지점장

2남 이욱 수풍상사 부장

3남 이완 고려대학교의료원 사무국장

1녀 이진

5남 김상오 (1924 ~ 2004) 인촌기념회 이사 / 妻 홍정임

1녀 김동순 (1948 ~ )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및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명예교수 / 夫 박정의 (1949 ~ )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및 삼성서울병원 순환기내과 명예교수

1남 김병철 (1949 ~ ) 고려대학교 제18대 총장 겸 식육공학과 명예교수, 동아일보 이사 및 殿 서울대학교 이사 / 妻 김명희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공학과 명예교수

2녀 김창희 (1952 ~ ) 재미교포

2남 김병제 (1955 ~ ) 재미사업가 / 妻 안병효

3남 김병준 (1959 ~ ) 강남대학교 실버산업학과 교수 / 妻 김선주

3녀 김상현 (1926 ~ )

6남 김상종 (1929 ~ )

7남 김남 (1930 ~ )

8남 김상석 (1933 ~ )

9남 김상겸 (1935 ~ 2004)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남 김병호 현대성우오토모티브 부사장

1녀 김수혜 (1963 ~ ) / 夫 정몽용 (1961 ~ ) 현대성우그룹 회장

1남 정인선 (1990 ~ )

2남 정호선 (1994 ~ )

4녀 김순민 (1937 ~ )

5남 김연수 (1896 ~ 1979) 삼양사 회장 / 妻 박하진

1남 김상준 (1918 ~ 2004) 삼양염업 명예회장

1녀 김정희 (1948 ~ ) / 夫 김준기 (1944 ~ ) 前 DB그룹 회장

1녀 김주원 (1974 ~ ) / 前夫 김주한

1남 김남호 (1976 ~ ) DB그룹 회장 / 妻 차원영 (1979 ~ )

1녀 김** (2015 ~ )

2남 김상협 (1920 ~ 1995) 제16대 국무총리 / 妻 김인숙 (1924 ~ 2019)

1녀 김명신 (1948 ~ ) / 夫 송상현 (1941 ~ ) 전 서울대 법대 교수, 전 국제형사재판소장

1남 김한 (1954 ~ ) 前 JB금융지주 회장 / 妻 김영란

3남 김상홍 (1923 ~ 2010) 삼양그룹 명예회장 / 妻 차부영 (1927 ~ 2015)

1녀 김유주 (1950 ~ ) / 夫 윤영섭 (1947 ~ ) 고려대 교수

1남 김윤 (1953 ~ ) 삼양그룹 회장 / 妻 김유희 (1960 ~ )

1남 김건호 (1983 ~ ) 삼양홀딩스 상무

2남 김남호 (1986 ~ )

2남 김량 (1955 ~ ) 삼양홀딩스 부회장 / 妻 장영은 (1960 ~ )

1녀 김남희 (1989 ~ )

2녀 김주희 (1993 ~ )

3녀 김율희 (1999 ~ )

2녀 김영주 (1958 ~ )

4남 김상돈 (1925 ~ ?) 삼양염업 회장

5남 김상하 (1926 ~ 2021) 삼양사 대표이사 회장 / 妻 박상례 (1931 ~ )

1남 김원 (1958 ~ ) 삼양홀딩스 대표이사 부회장 / 妻 배주연 (1965 ~ )

2남 김정 (1960 ~ ) 삼양패키징 부회장 / 妻 안혜원 (1967 ~ )

1녀 김희원 (1993 ~ )

1남 김주형 (1997 ~ )

2남 김주성 (2000 ~ )

1녀 김영란 (1962 ~ 2014) / 夫 송하철 (1961 ~ ) 항소 대표이사

6남 김상철 (1938 ~ 2007)

1남 김형석 ING 은행 상무

1녀 김의선

7남 김상응 (1946 ~ 2002) 삼양사 회장

3녀 김점효 (1901 ~ 1995) / 夫 김용완 (1904 ~ 1996) 경방 명예회장

1남 김각중 (1925 ~ 2012) 경방 명예회장 / 妻 차현영 (1937 ~ )

1남 김준 (1963 ~ ) 경방 회장 / 妻 임진희 (1968 ~ )

1녀 김나연 (1999 ~ )

2남 김담 (1965 ~ ) 경방 타임스퀘어 대표이사 사장 / 妻 문화 류씨 (1968 ~ )

1녀 김지영 (1970 ~ ) / 夫 이승호

1녀 김현중 (1927 ~ ) / 夫 이임성 삼성전자 초대 미주법인장

2녀 김인중 (1930 ~ ) 세브란스병원 의사 / 夫 성주호 (1927 ~ ) 창성학원 이사장

3녀 김봉애 (1938 ~ ) / 夫 한만청 (1943 ~ ) 서울대학교병원장

4녀 김명애 (1941 ~ ) / 夫 이중홍 (1941 ~ ) 前 경방 회장

 


6. 지배 구조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7. 상징


 

▲ 동아일보의 로고

 

왼쪽의 에메랄드색 원형 로고는 1920년 창간 당시부터 사용해왔던 오래된 로고이며 타원 속에 한자 '東(동녘 동)'이 가로세로로 반복된 형태이며 45도로 기울여 보면 亞(버금 아)자 형태도 드러나는 그 당시엔 보기 드물게 꽤 복합적이고 모던한 형태의 로고다. 1920년 이후 단 한 번도 바뀌거나 폐기된 적이 없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로고이다.

 

창간 당시 서화협회에 위촉해 협회 회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東'자를 도형으로 도형화하자는데 의견을 모았으며 이것을 본사가 채택함으로써 결정됐다. 처음에는 배달부의 배달용 덧저고리에 마크로 새겨 사용했다. 동아일보 지면에 로고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22년 10월 15일자 3면으로, 동아일보 후원으로 열렸던 제3회 전선(全鮮)야구대회의 동아일보에서 제정한 우승기 사진이 실렸다.


8. 역사


8.1. 1920년 창간 ~ 1936년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 놀란 일제는 조선의 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바꾸기로 했고 이 일환으로 민간 신문들을 허가하게 되었다. 민간 신문이 허가될거라는 소문에 민족계 신문을 창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최두선은 김성수에게 이런 움직임을 전하면서 민족계 신문 창간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당시 김성수는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던 중이었다. 최두선이 "학교도 급하지만 이것은 당장 급한 일이다. 또 마침 일본 관헌이 민간신문을 한두 개 허락한다니 이 틈에 애국진영, 민족진영에서 하나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김성수는 처음엔 "내가 신문에 생소하고, 그러자고 할 것 같으면 여러 가지 준비가 있어야 될텐데 간단하지 않다."며 사양했다. 그러나 유근과 이상협도 창간을 권유하자 김성수는 마침내 이를 수락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는 10여건의 신문 창간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김성수는 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하여 일제가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박영효를 사장으로 내세웠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이상협이었다. 유근이 "동아일보"라는 이름을 제안하여 그대로 정하고 1919년 10월 9일에 총독부에 신청서를 냈다. 그 후 김성수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동아일보를 차리기로 결정하고 동아일보의 창간 취지를 설명하며 전국에서 주주 모집에 나섰다.

 

1920년 1월 6일 총독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의 창간을 허가했다. 3.1 운동을 본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표출 창구 없이 계속 틀어막기만 하다간 언젠가 폭발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당시 조선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는 동아일보 창간에 항의하는 일본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아일보는 조선민족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가스를 배출하는 굴뚝이다. 가스는 배출하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서 끝내는 폭발한다.

 

출처 입력

 

그리고 일제가 조선을 차별없이 통치하고 있다고 국내외에 선전할 명분으로 삼을 의도도 있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민족주의 진영의 신문으로서 동아일보 창간을 허가해주는 한편 일제를 대변할 신문 2개(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조선일보, 역시 친일단체인 국민협회의 시사신문) 이렇게 총 3개 신문의 창간을 허가한 것이었다.

 

원래는 3.1 운동 1주년에 맞춰 1920년 3월 1일에 창간할 계획이었으나 사옥 마련과 설비 마련에 시간이 부족하여 1달 뒤인 4월 1일에 창간호를 냈다. 발행인 겸 편집인에 이상협, 인쇄인 이용문, 주식회사 발기인 대표 김성수, 사장 박영효, 편집감독 유근, 양기탁, 주간 장덕수, 편집국장 이상협, 영업국장 이운이었고 기자 16명이 있었다. 이 문서 2번째 문단에 있는 "주지를 밝히노라"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창간사는 장덕수가 썼다. 창간 당시는 석간 신문이었다.

 

창간 당시 기자였던 김동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일보에 모인 사람들은 그 때 3.1 만세 직후여서 누구나 애국심에 불타고 있었다. 직장으로 동아일보를 택했다기보다 "남은 감옥에 가서 고생도 하는데 이렇게 편안히 앉아 문필보국을 한다. 그런데 뭐가 괴로우냐."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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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11일부터 3차례에 걸쳐 "조선인의 교육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함을 폐지하라"는 사설을 실었다.상 중 하

 

1920년 4월 15일에 평양에서 만세 소요가 일어났고 수십명이 체포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하여 총독부로부터 첫 발매 금지를 당했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수시로 발매 금지와 기사 삭제를 당했다.

 

5월 8일에는 조선의 유림들이 중국만 빨아대는 사대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한 "가명인두상에 일봉"이라는 논설로 인해 유림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게되어 해명 사설을 냈으나 그래도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박영효가 사과문을 게재할 것을 지시했지만 사원 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박영효는 자리에만 앉아있는 이런 바지사장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며 사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 뒤 창업주 김성수가 2대 사장에 올랐다.

 

도쿄유학생들 모임인 학우회가 동아일보의 지원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하던 중 서울집회에서 "조선산업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하다가 '불온한 언사'라며 경찰에 의해 강연이 강제 중단되었다. 동아일보는 1920년 7월 22일자 신문에서 이를 비판하였다가 다시 발매 금지를 당했다.

 

1920년 9월 24일 장덕수가 쓴 "제사 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에서 텐노의 상징인 삼종신기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첫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다. 당시 제사 문제를 놓고 기독교계와 유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 때 동아일보가 저 사설에서 조상을 기념하는 것과 우상숭배의 구별에 대해서 논하면서 "설령 사람의 형태를 본떠 만든 우상은 없을지라도 혹은 거울로, 혹은 주옥으로, 혹은 칼로, 그밖에 어떤 모양으로든 물건의 형태를 만들어 어떤 곳에 받들어 모신 뒤 '신이 여기에 있다', 혹은 '영혼이 여기에 있다'하며 이를 숭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썼는데 여기서 '거울', '주옥', '칼'이 바로 텐노의 삼종신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1921년 1월에 정간이 해제되었으나 정간의 타격으로 인해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바로 속간 하지 못하고 한달 뒤인 2월 21일에서야 속간했다.

 

1920년 10월에 일본군이 북간도 일대의 조선인 2200여 명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덕준이 룽징으로 가서 일본영사관과 토벌군사령부에 대해 취재를 하다가 여관에서 11월 초에 행방불명됐다. 한국 언론사 최초의 순직 기자였다. 당시 여러 정황과 현지인, 가족 등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4월 23일엔 대한독립단이 친일행각을 하는 조선인을 포살할 것을 선언했다는 보도를 했다가 압수당했다.

 

2차 주식 모집 후 1921년 9월에 동아일보는 비로소 주식회사가 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사장에서 이사진으로 물러나고 그의 절친한 동지인 송진우가 3대 사장에 올랐다.

 

1922년 2월 3일에는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라는 사설을 실었다.

 

1923년 1월부터는 물산장려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2월에 경찰이 물산장려회의 시가행진을 금지하자 이를 비판하는 보도를 했다가 발매 금지를 당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나 총독부의 보도통제로 며칠지나서야 보도를 할 수 있었다.

 

1923년 5월에는 1000호를 기념해 민족 지도자들에 대한 지지도를 알아보는 "현대인물 투표"를 기획했는데 총독부의 간섭으로 첫날만 시행하고 중단되었고 첫날 투표 결과는 총독부에게 검열되어 지워진 상태로 나갔다. 하얗게 검열된 모습. 투표가 중단됐음을 알리는 기사. 첫날 투표의 실제 결과는 이승만이 49표로 1위, 최린 25표, 안창호 22표, 최남선 18표, 서재필 17표, 이춘재 12표, 이상재 10표, 이동휘 7표, 여운형 강일성 각 6표, 이승훈 김원봉 윤상은 신흥우 각 4표, 김좌진 3표였다고 한다.

 

1923년 6월 30일에는 여성의 지위향상과 계몽을 위해 전조선여자정구대회라는 최초의 조선인 여자 스포츠 대회를 열었다.

 

1923년 9월 관동대학살이 일어나자 이상협이 급히 일본으로 가서 학살을 취재했으나 일본의 강력한 통제로 생존자 명단 정도 외에는 보도할 수가 없었다. 동아일보는 9월 8일에 이재조선인 구제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보낼 구원금을 모금했는데 9월 10일 내보낸 "참화에 죽어가는 동포를 위하야"라는 기사에서 '다소 귀에 들리는 소식으로도 당국의 금지로 인하야 터지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무릎 밑에 집어넣는 형편이라'는 부분에서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모금운동마저 총독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1924년 1월 2일 이광수가 쓴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설의 요지는 '정치적 결사, 산업적 결사, 교육적 결사를 조직해야한다. 지금까지 해온 정치적 운동으로는 계속 비밀결사의 형태일 수 밖에 없으며 새 활로를 모색하려면 조선 내에서 허용되는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 정치 결사를 조직해야 장래 정치운동의 기초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광수는 그 전해인 1923년 10월에 중국으로 가서 안창호를 만났는데 당시 안창호는 국내 산업개발과 교육진흥을 강조하고 있었고 이 사설도 그런 노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설의 주장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겨져 거센 공격을 받았다.

 

1924년 3월, 각파유지연맹이라는 단체가 한일병합은 합당하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자 동아일보는 이를 비판했다. 그 후 김성수와 송진우가 각파유지연맹의 이풍재에게 연락을 받고 식도원이라는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그러자 옆방에 대기하던 각파유지연맹원들이 몰려와 총으로 위협하고 물건들을 깨부수고 구타하며 해당 기사를 취소하고 3000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결국 송진우는 "주의 주장은 반대하나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하지 못한 줄로 증함"이라는 쪽지를 적어 건네주었고 김성수는 3000원은 자기 개인 재산에서 주겠다고 얘기했다. 그 후 이 식도원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안재홍을 비롯한 수십명이 언론탄압 반대 대규모 민중 집회를 조직했으나 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는 송진우가 건넨 그 쪽지를 서약서라고 대서특필하며 동아일보를 공격했다. 동아일보는 이런 행태를 강력하게 규탄하고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기사를 1924년 4월 11일자로 내보냈다. 그러나 정작 동아일보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상협이 송진우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상협은 결국 퇴사했고 여러 간부들도 이상협을 따라 회사를 떠났다. 송진우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1924년 5월 14일에 이승훈이 4대 사장에 올랐고 홍명희가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4년 10월부터는 다시 김성수가 사장을 맡았다.

 

1925년 1월에 한국 언론사 최초로 신춘문예를 열었다. 윤석중도 이 1회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상자였다.

 

1925년 3월 19일에 동아일보는 전국여자웅변대회를 열었다. 같은 해 허영숙이 신문사상 첫 여성 부장에 올랐다.

 

1926년 3월 5일에 소련 국제농민회본부가 조선 농민에게 보낸 "오늘 귀국민의 슬픈 기념일을 맞아 세계 40개국의 농민단체를 대표하여 가장 깊은 동지로의 동정을 농업국민인 조선동포에게 드린다. (중략) 자유를 위하여 죽은 이들에게 영광이 있을지어다. 감옥에 있는 여러 동지와 분투하는 여러 동지에게 형제적인 사랑의 문안을 드리노라."는 내용의 축전을 실었다가 두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다.

 

1927년 1월 15일에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간디의 메세지를 실으며 간디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했다.

 

1927년 10월에는 앞서 언급한 식도원 사건 이후 물러났었던 송진우가 다시 사장에 올랐다.

 

1928년 3월 16일에 동아일보는 창간 8주년인 4월 1일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할 것임을 발표했으나 총독부의 중단 명령으로 시작 3일전 무산되었다.

 

1929년 4월 2일에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전해준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는 메세지를 실었다. 흔히 더 긴 버젼의 글이 타고르의 글이라며 알려져있는데 그건 누군가에 의해 짜깁기된 것이고 원문은 동아일보에 실린 저것이다. 다음날인 4월 3일에는 타고르의 영어 원문도 실었다.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그 다음해인 1920년 4월 1일에 동아일보가 민주주의, 신문화 건설, 민중의 표현기관이라는 3대 강령을 걸고 탄생하얏다. 세계대전과 조선민족의식의 각성,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동아일보다. 그 때부터 조선과 조선인은 동아일보를 통하야 그 재생(再生) 과정의 의사와 감정을 표현하얏고 아울러 조선과 조선인의 역사를 기록하얏다. 동아일보의 10년은 곧 조선민족의 10년이엇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 사설 중.

출처 입력

 

 

1930년 4월 16일 미국 '네이션'지의 주필 빌라즈가 보내온 창간 10주년 기념 축사를 실었다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삭제되고 세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다. 해당 축사는 현 조선의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사명이 중대하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으며 조선민족과 그 사명을 위해서 분투하기 바란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1931년부터 일어난 만주사변을 전후해 더욱 심해진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동아일보를 포함한 민간 신문들은 극도로 위축되었고 동아일보는 문화운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일환으로 1931년 7월부터 제1회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으로 1933년까지 3회의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다. 또 지금은 없어진 박문사[23]에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을 단죄한다는 목적으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쇼를 벌였는데 이 쇼를 일제강점기 유력언론들 중에서 유일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1935년 ~ 1936년에 걸쳐 정인보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 44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연재는 후에 "조선사연구"라는 책으로 간행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자 이를 보도했는데 손기정의 유니폼에 달린 일장기를 흐릿하게 삭제한 사진을 내보냈다. 교과서에서도 등장하는 일장기 말소사건이다.사실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하는 일이 기존에도 허다했다. 1932년 LA 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의 사진을 실을때도 일장기를 말소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별 탈없이 넘어갔었지만 1936년 당시는 그 이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사장이던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말하며 역정을 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해 오는 미나미 총독이 폐간과 같은 극단적인 태도로 나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군벌은 미친 개여서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도 말했다. 결국 총독부는 8월 29일 동아일보에 대해 네번째 무기 정간을 시켰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10여명이 연행되었다. 일제는 현진건, 이길용, 신낙균, 서영호, 최승만에게 앞으로 언론기관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고 동아일보에서 쫓아냈다. 사장 송진우를 비롯하여 부사장 장덕수,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도 모두 쫓겨났다. 김성수는 갖고 있던 동아일보 주식을 모두 내놓아야 했다. 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동아일보의 실권을 김성수와 송진우 일파의 수중에서 완전히 절리시켰다."고 나온다.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복간된 후 이 때 쫓겨난 직원들 중 희망자들을 전원 복직시켰다.


8.2. 1937년 ~ 1940년


백관수를 사장에 앉히는 조건으로 1937년 6월 3일 속간된 이후부터 1940년 폐간전까지 이 3년간 동아일보는 완전히 총독부 영향력 하에 놓이게되면서 친일지로 전락하였다. 한겨레를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동아일보 창간부터 이 시기 전까지 16년간의 민족지로서의 행적은 애써 숨긴채 이 기간의 행적만을 강조해 동아일보가 일제시대 친일 어용지였다고 매도하곤 하지만 진영논리를 제거하고 보면 실제 동아일보는 오랜기간 분명히 민족지였고 단지 중간에 이 3년의 짧은 암흑기를 거쳤다고 보는게 이성적이다. 1937년 6월 3일 속간되었는데, 속간 공지 중 원래는 "언론기관으로서의 공정한 사명을 기하려 하오니"라는 부분이 일제의 강요로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통치의 익찬을 기하려 하오니"라는 내용으로 변경되어 실렸다. 1938년 2월에는 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동아일보를 포함한 모든 신문사는 조선춘추회라는 어용단체에 가입했다. 2월 10일부터는 기존에 제호 배경에 있던 한반도와 무궁화 그림도 삭제되었다. 남경함락을 축하한다는 삼하인단주식회사의 광고를 싣기도 했다.

사옥에 내선일체, 보도보국이라는 간판이 걸려있기도 했다.

 

 

1937년 6월 5일에는 김일성이 보천보를 습격한 것을 보도했다.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며 분위기가 좋았던 1998년 당시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이 김정일에게 보천보 전투를 호외보도한 기사를 새긴 금판을 기증하기도 했다.물론 이후에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급정색했지만.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1939년 11월 총독부는 동아일보의 폐간을 종용했다. 자진 폐간을 하면 총독부가 모든 직원들의 1년치 봉급을 지급하고 윤전기도 사들이겠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폐간을 거부하고 6개월을 버텼으나 총독부는 회계 부정을 구실로 경리부장을 구속하고 보성전문학교에 2만원을 빌려준 사실을 구실로 사장인 백관수와 고문 송진우, 상무 임정엽, 영업국장 국태일을 체포 구금했다. 그 후 임정엽의 명의로 폐간계가 제출되었고 1940년 8월 11일자 신문을 끝으로 동아일보는 폐간되었다. 폐간 공지 폐간사

 

이 마지막 1940년 8월 11일자 신문에서 차마 직접적으로 외치지는 못하고 뜬금없이 포도송이 사진을 올려놓은 뒤 "포도송이처럼 서로 정답게 엉키라"라는 말로 간접적으로 민족의 단결을 외쳤다.# 복간된 뒤인 창간 30주년 1950년 4월 1일 신문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8.3. 1945년 광복 이후


1945년 12월 1일에 사장 송진우, 주간 설의식, 편집국장 고재욱 체재로 재정비하고 드디어 복간되었다. 중간사에서 창간 때의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함"을 다시 쓰며 창간 정신을 되새겼다.

 

1945년 12월 27일에 동아일보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일어났다.# 고의적인 오보는 아니었으나 이 사건은 한국 근현대사를 완전히 바꿔났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대사건이었다. 쉽게 말해서 분단의 시초가 된 사건이며 이 사건으로 좌우익은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져 싸워 결국 찬탁하는 북한과 반탁하는 남한으로 분단되게 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당시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를 오보라고 시인하며 극렬한 반탁운동을 삼갈 것을 촉구하다가 반탁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김성수가 다시 사장을 맡았다.

 

1950년대 이후로는 미군정과 6.25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신문 중 경향신문과 함께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반(反)독재지로 자리매김한다. 이 당시 동아일보는 '반(反)독재 민주화'를 내걸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아일보의 창립자인 김성수의 정치행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내기반이 전무했던 이승만은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과 김성수와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승만이 초대 내각 구성 당시 한국민주당은 내각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이때부터 동아일보는 이승만과 결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성향이 심화된 것은 김성수의 부통령 취임 이후였다. 6.25 전쟁 도중 국민방위군 사건에 실망한 이시영이 부통령을 사퇴하자, 국회에서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김성수에 우호적인 세력들이 제2대 부통령으로 김성수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이승만과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던 김성수는 결정적으로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반발하면서 부통령을 사퇴하고 반(反)이승만 노선을 걷게 된다. 당연히 동아일보도 이승만 독재를 공격하면서 김성수 계열이 주도한 민주당에 우호적인 신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고바우 영감이라는 시사만화가 연재되고 있었는데 1958년 1월 23일자에 실린 만화가 경무대의 심기를 거슬리게했는지 정부는 '허위사실 유포'라는 혐의로 김성환 화백을 즉결심판에 처해 벌금을 먹였다. 이후 동아일보는 시사 풍자 만화를 가지고 허위보도라니 졸렬하다며 까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1960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의 부정선거 준비 실태를 보도하고 사설을 통해 부정선거와 정부를 규탄했다.#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진압을 보도하고, 정부가 마산 시위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자 "마산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지 말라"는 사설을 냈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치밀한 언론 탄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대표적인 탄압이 바로 19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반발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면서 투쟁하자 정권의 외압으로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전면 백지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시민들이 기자들을 지지하며 동아일보에 개인광고를 내주는 등 지원을 했으나 유신체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결국 경영진의 굴복으로 1975년에 일부 기자들이 해직되었다. 이때 해직된 기자들을 주축으로 13년 뒤인 1988년에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었다.

 

박정희가 암살당한 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서고 정부는 또다시 언론 탄압과 통제에 나섰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다음날인 19일 이 사태에 대한 사설을 썼다. 당시는 계엄령 중이었기 때문에 모든 기사는 정권의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고 이 과정에서 사설의 중간중간이 뭉터기로 잘려나갔다. 이런식으로 잘려나간 사설을 싣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동아일보는 항의의 의미로 19일부터 23일까지 아예 사설 없이 신문을 발행했다.

 

외압과는 그다지 관련은 없지만 서울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면서 광화문 사옥이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의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그 유명한 발언을 하였다. 동아일보는 1월 16일부터 부검의 오연상과 박종철의 삼촌인 박월길 등의 증언을 상세히 보도하며 단순 사망이 아님을 피력했다. 그리고 1월 17일에는 김중배의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칼럼을 실었다. 그리고 1월 19일에는 "물고문으로 질식사"를 1면 탑기사로 실으며 대서특필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박종철 형의 인터뷰. 당시 이런 기사들을 보고 동아일보로 많은 시민들의 격려 전화가 왔다고 한다. 특히 동아일보의 이 보도는 6.10 민주 항쟁을 촉발한 결정적인 보도였다.

 

그 후 5월 18일 김승훈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사건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은 일부 언론에서 '사제단이 이러이러하다고 주장했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보도만 나오고 제대로 보도되지 않다가 5월 22일 동아일보에서 경찰의 사건 은폐와 가담자 축소 사실의 구체적인 내용을 처음으로 대서특필하고 이후에도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나갔다. 이 보도들로 동아일보 취재팀은 1987년에 한국기자상을 받았고 1988년에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원래는 김대중의 주요 지지언론이었으나 2000년 즈음부터 김대중 정부와 각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홍보수석인 이동관이 대표적인 동아일보 출신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최순실 게이트와 탄핵 정국에서 동아일보는 딱히 중요한 역할을 하진 못했으며 그나마 채널A가 단독 보도를 많이 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가 독자 브랜드 구축에 성공했으며, 김순덕 논설위원은 반(反)문재인 정부 스탠스를 강고히 유지하면서 도널드 트럼프의 북미협상을 적극 반대하며 조 바이든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다소 특이한 스탠스를 견지했다.

 

 


9. 성향


 

동아일보는 대표적인 보수 성향의 신문 중 하나다. 같은 보수 언론으로 평가받는 조선일보가 주로 북한 같은 안보 문제를 다루고, 중앙일보가 경제 문제를 다루는데 비해 동아일보는 문화 방면을 더 다루는 경향이 있다. 창간 당시 사시(社是)가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였는데 일제강점기 당시에 검열이 심하니까 민족주의, 민주주의보다는 문화주의가 강조되어 발행되었다. 딱히 큰 공연이 없어도 항상 2면 이상을 문화면에 할애한다.

 

2001년 세무조사 사건 이전까지는 지금보다 좀 더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김대중의 주요 지지언론이기도 했고 서중석이 10여 년 동안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나중에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는 송건호도 원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6개월 정도 했었다. 유시민이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5월 19일부터 5일간 전두환 정권의 검열에 저항하는 의미로 사설을 싣지 않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여러 지면을 할애하여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바 있다. 그 후에도 지역기반이 같은 김대중을 적극 지지해 주었으며 김대중 정권 초기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대중도 동아일보의 창업주였던 김성수를 적극적으로 감싸주었는데 실제로 김대중은 1980년대 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동아일보의 창업주이자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로 중흥시킨 김성수를 친일파라며 규탄했을 때 김성수를 옹호해주면서 그 고대생들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김대중,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동아일보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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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는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는 그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맞는 새천년에도 참으로 합당하다."라고 동아일보와 인촌 김성수를 칭찬하였다.

 

김대중이 1987년 대선에서의 실패 이후로 여러차례 위기에 빠졌음에도 제1야당을 전두지휘하는 인물이자 차기 대권주자로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데에는 호남권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동아일보가 김대중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사들의 논조를 보면 조선일보야 말 할 것도 없고, 중앙일보도 14대 대선과 15대 대선에서 김영삼, 이회창을 대놓고 밀어주었을 정도로 김대중에게 영 고까운 시선을 보냈던데다가 방송사들의 논조도 김대중과 민주당에게 친화적이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일보와 친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김대중과 야권이 버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것이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 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는데,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가 호남출신이고 역시 호남 기반의 김대중이 김성수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고는 하지만 신문 창간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서 동아일보 일가의 후손들은 호남과 민주당 쪽에 대한 특별한 정서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동아일보는 김대중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을 이어나갔는데 그 후 김대중 정권은 2001년 언론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나섰다. 이 세무조사 때 동아일보 회장의 부인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모욕감을 느껴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동아일보의 관계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로 틀어졌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군부독재정권 때부터 이미 5년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고 최초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시절에만 중단되었었기 때문에 기업이라면 원래 받아야할 세무조사를 시행한 것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김대중이 추진하던 대북사업 관련 기업에는 세무조사를 자제하라고 국세청장이 지시했고 집권층 내부에서 특정 신문사들 이름을 거론하며 "당장 작살내겠다", "두세 달 내에 그냥 안 둔다. 국세청 상속세로 뒤집어버리겠다" 등의 발언이 나왔던 것을 보면 김대중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보복 의도도 분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가 이전보다 더 보수 쪽으로 이동하게된 계기로 평가된다.

 

단, 많은 한국인들이 '진보 = 민주화 세력' '보수 = 독재 세력' 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지만 실제론 과거 독재 정권 당시의 구도는 민주 vs 반민주 로 보는게 맞지 진보 vs 보수 로 보는것은 맞지 않다. 그러므로 동아일보도 과거엔 진보였다가 지금 보수로 변했다는 말은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런 착각 때문에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보수진영에서 활동하는 과거 민주화 운동가 출신들을 '배신자', '변절자'로 모는 이상한 풍토가 생긴 것이다. 민주화 세력들 안에서도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당연히 진보가 있고 보수가 있다. 이건 독재, 반독재와는 전혀 다른 얘기다. 보수 정치인인 김영삼만 해도 김대중과 함께 군부 독재시대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이렇게 볼 때 동아일보는 대북정책문제, 노동문제 등에서 과거에도 보수에 가까운 신문이었다.

 

어쨌거나 동아일보는 2000년대 이후 친재벌 성향으로 더 변화하게 되는데 그 이유로 꼽히는게 삼성그룹과의 관계이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 동아일보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가 삼성생명으로부터 500억 긴급대출을 받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대출의 배경에는 삼성 오너 이건희와 동아일보 오너 김병관의 사돈 관계가 있다. 김병관 회장의 차남인 김재열이 1999년 이건희의 2녀인 이서현과 결혼한 것이다. 김재열은 이후 제일모직 사장, 삼성엔지니어링 경영기획총괄 사장을 거쳐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이 된다. 이 때문에 중앙일보만큼이나 삼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으로 꼽힌다. 그리고 외환위기로 인해서 경제가 심각하게 위축되고 개인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몇몇 대기업 광고에 대한 재정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지게 되었다. 말 그대로 비판 기사 한 번 썼다가 대기업에서 광고 빼버리면 회사가 흔들리기 때문에 언론사들이 대기업 눈치를 보면서 알아서 기는 행태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뉴라이트의 등장 때에 특집기사로 스포트라이트를 주었으며,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보수 노선이 상당 부분 강조되면서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조선일보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까지 있었다. 이는 박근혜 정부 때에도 계속되었고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기사들이 많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에는 고공행진하는 지지율과 함께 문재인이 직접 동아일보 지령 3만호 기념 축사를 보내고, 비판의 수위도 상당히 낮아져서 과거 친민주당 성향으로 돌아가는게 아닌가하는 말도 있었으나 2018년 말부터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보수 신문으로 돌아왔다.# 다만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전두환에 매우 비판적이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이라며 갈수록 보복과 혐오와 갈라치기의 정치를 하자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김대중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10. 논란 및 사건사고


10.1. 일장기 말소사건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렸던 하계올림픽 대회 당시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했던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어있는 일장기(日章旗)를 동아일보에서 지워버리자,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탄압을 가한 언론탄압 사건.


10.2. 신탁통치 오보사건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사들로부터 오보된 초대형 사건.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실제로는 미국이 주장, 소련이 반대했는데 정반대로 소련이 주장, 미국이 반대한다고 오보한 것이다. 그 외에도 신탁통치가 강대국들의 새로운 식민통치라는 뉘앙스로 보도된 것도 오해를 키웠다.

 

해방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 정부수립에서 본격적인 좌우 대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한반도의 분단이 내•외부적인 이유가 뒤섞인 것도 이 오보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너무나도 기가 막힌 사건이라 누군가 배후에서 고의적으로 오보를 냈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도 퍼져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후술할 '남한 우파/미군정 배후설'과 '북한 좌파/소군정 배후설'이 있다..


10.3.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1974년 12월 경 부터 1975년 1월 초에 걸쳐 일어난 박정희 정부 초유의 언론탄압 사건. 흔히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라고도 불리는데 계약된 광고들이 모조리 해약되어 광고면이 백지로 나갔기에 이렇게 칭한다.


10.4.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 지역감정 조장 기사


2000년 9월 9일 대구·부산 지역경제의 침체만을 강조한 기사를 써 의도적으로 지역 감정을 조장했다. 기사 제목, 방향과는 달리 곧이 사실을 따져보면 광주의 부도율이 가장 높았다. 통계를 차치하고라도 IMF 외환위기속에서 대한민국 전체가 시름하는 상황이었다. 교묘하게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근거지인 호남과 줄곧 대통령을 배출해오다가 한번 정권교체를 당한 영남 지역 둘을 이간질하기 위한 기사로 평가된다.


10.5. 굿모닝 시티 정치권 로비 오보


2003년 7월 16일자 기사로 당시 굿모닝시티 분양사기 사건의 핵심인물인 윤창열 회장으로부터 이해찬, 김원기, 문희상, 신계륜 열린우리당 소속 정치인과 한나라당 소속의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형 등이 금품을 수수받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보로 밝혀졌고 동아일보는 24일자 신문 1면에 정정보도를 내며 해당 기사의 오보 사실을 알리고 사과를 했다.# 그래놓고 자사가 1면에 정정보도를 했다며 자화자찬까지 했다.


10.6. 전교조 명단 공개사건


2010년 4월,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던 교직원들의 명단을 공개하였다. 이 때 동아일보의 인터넷 사이트인 동아닷컴은 조전혁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그대로 게재하였고, 결국 전교조에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패소하면서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었다. '전교조 명단 공개' 조전혁 의원 3억 배상


10.7.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황당 발언' 보도


수사 초기 박 경정은 한창 조사를 하던 검사와 수사관에게 뜬금없이 “우리나라의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면서 박근혜 정부의 권력 지형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윤회 씨의 전 부인이자 고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 씨가 1위, 정(윤회) 씨가 2위이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허위로 결론 난 ‘정윤회 동향 문건’만큼이나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근거를 대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단독]박관천의 황당한 ‘권력서열’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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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희대의 자충수이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평가되는 보도다.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이 2016년 10월 최순실 특검이 결정된다. 새누리당조차도 당시에는 박관천 경정의 발언에 대해 정치 공작, 음해성 발언, 배후 음모설을 주장해왔었지만 결국 2016년 10월 26일 긴급 총회를 열어 특검을 수용한다.

 

당시 진보 언론을 제외한 다른 언론들에서도 해당 폭로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동아일보처럼 크게 이슈화 하면서 비판하진 않고 '이러이러한 발언을 했다. 다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식으로 기사를 내보내는 정도에 그쳤다.


10.8. 삼성 장충기 문자 청탁 사건


2017년 8월, 뉴스타파의 보도로 밝혀진 삼성그룹에서 보도청탁한 언론계 인물들 중에서 동아일보에서 오랫동안 주필을 맡아왔던 배인준 씨가 있는 것이 드러났다. 관련 기사 동아일보는 특히나 김재호 사장의 동생인 김재열이 제일기획 사장으로 삼성그룹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삼성그룹으로부터 청탁을 받아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10.9. 김재호 사장 딸 관련 논란


 

 

 


10.9.1. 사장 딸 입사 아빠 찬스 의혹과 제보자 고소


 

사주인 김재호 사장의 딸이 동아일보에서 인턴을 거쳐서 동아일보 기자로 합격해 입사했다. 부정 채용이라는 근거는 없으나 동아일보 사장의 딸이 동아일보에 지원한 것에 대해 공정성에 대한 의혹 제기와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보통 오너 일가의 경우 타 회사에 입사한 뒤 경력직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장 중앙이나 조선일보 일가도 이와 같이 했으며 대부분의 재벌가문이 이 방식을 택했으나 동아일보 김재호 사장의 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 회사가 아닌 동아일보에서 경력을 시작했기에 논란이 된다.

 

이에 대해 "아빠 찬스"라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그와중에 동료 인턴이 아빠 김 사장 딸의 합격 과정이 과연 투명하고 공정했는지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에 대해 동아일보에서 형사 고소를 하여 논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턴 기자를 언론사가 직접 고소했다고 보도한 MBC에 대해서도 소송을 냈다.


10.9.2. 사장 딸 부정 입시 의혹/내부 고발자 형사고소


 

 

 

 

동아일보 김재호 사장의 딸이 하나고등학교 부정 편입 고발 사건에 연루되었다. 입시과정에서 면접점수가 불명확한 이유로 변경된 것인데, 검찰은 점수가 바뀌었더라도 합불에는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며 불기소 처분했다.

 

2021년 1월 국정감사에서 편입학 당시 서류와 면접 평가표에 평가위원이 아닌 제3자가 서명한 것이 드러나거나 별 다른 이유 없이 채점 기준이 바뀌었고, 이 과정에 학교장 결재도 없었던 사실을 확인되는등 등 추가 의혹이 불거져 재수사에 착수했었다.# 당시 김재호 사장의 딸은 2014년 하나고 편입학 일반전형의 유일한 합격자였다.

 

이후 명문 사립고인 하나고에 김재호 사장의 딸이 편입학할 때 성적 조작을 통해 부정하게 입학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부정 입학 의혹을 제기한 내부 고발자를 형사고소 했다고 MBC에서 2021년 5월 25일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기소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해당 의혹을 보도한 mbc에 의하면 2021년 5월 25일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불과 3개월밖에 안남았다고 한다.


10.10. 역술인과 미신


2018년 5월 30일 <'김일성 사망' 적중 역술•무속인들의 예언…"김정은, 내년 결정적 위기">란 기사를 실었는데 당연히 비과학적인 내용이라 논란만 되고 기사는 내려졌다. 자매사인 채널 A도 몇해 전 이름 궁합이나 역술인을 섭외해 정치 평론을 하는 등 동아일보는 미신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아예 안영배라는 논설위원이 '도시와 풍수'라는 시리즈물을 연재하고 있을 정도다.[2]

 


11. 기획·특집기사


1987년 고문근절 추방캠페인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동아일보에서 대대적으로 벌였던 캠페인 특집기사이다. 본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가장 먼저 보도했으나, 대대적으로 전두환과 군부정권에 반기를 들고 보도를 쏟아낸 것은 동아일보였다. 이 기사는 특히 6.10 민주 항쟁을 이끌어낸 원동력 중 하나로도 꼽힐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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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 2019

창간 98주년 기획특집기사로, 과거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부당한 악습들을 타파하는 내용이 많아 호평을 받았다. 특히 추석편은 간소한 차례상에 관한 이야기를 실어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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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창간 99주년, 3.1 운동 100주년 기획특집기사로, 3.1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과정, 의의 등을 재조명하였다. 특히 이 기사와 연계하여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학술회의를 개최하였고, 동아닷컴에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전시관'이라는 3.1 운동 데이터베이스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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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

고령화사회를 맞아 연재된 특집기사이며 기자가 직접 노인과 비슷한 조건으로 도심을 걸어다니며 느낀 체험내용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다. 노인들에게 위험한 구조물이나 시설 등을 주목하여 많은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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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 사라진 사람들

2020년에 5회에 걸쳐 연재된 시리즈. 대법원에서 실종 선고된 6,000여명의 판결문을 분석하여 그 중 자발적 실종 즉, '증발'해버린 사람들을 추적해 그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냈는데 일러스트와 그래픽적 요소가 결합되어 일반적인 보도글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고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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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다. 본관은 제주, 호는 심강(心崗)이다. 인촌 김성수의 처조카로, 그의 본처 고광석의 조카였다.


2. 생애


1903년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삼천리(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에서 태어났다. 창평학교(현 창평초등학교)와 중앙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자부(麻布)중학교 , 야마가타(山形)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를 졸업하였다. 193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 1940년 편집국장이 되었으나 같은해 조선총독부에서 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하자, 고향에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6.25 전쟁 후 동아일보의 주필(主筆)이 되었다. 1961년에 부사장을 겸하였다. 1965년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1943년 만주국 선양에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제물포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학부 및 동 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켄트 주립대학교 정치학 석사, 피츠버그 대학교 정치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한편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를 역임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직을 사임하지 않아 논란이 되었다. 1988년 초 서독 뮌헨 대학교,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유학을 이유로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노태우 대통령의 사회담당 보좌관을,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인천대학교 총장을,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에 앉았고,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동아일보 대표이사,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부터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회장도 4년간 맡았다.

 

2011년부터 아시아기자협회 이사장을 맡으며 2013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 박근혜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 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한국현대사학회의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역임했고, 2017년부터 2년 간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1. 개요


삼양홀딩스를 주축으로 한 식품/화학특화 기업집단으로, 넓게 보면 동아일보 가문의 일원으로 동아일보, 고려중앙학원, 경방과 더불어 이 가문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일제 시기 세워진 민족기업 중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기업이다.

 

흔히 삼양식품, 삼양통상 등과 혼동되는데 서로 뿌리부터 다른 완전히 별개의 기업이다. JB금융지주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금호그룹, 교보생명그룹, 대상그룹, 쌍방울, 하림. 부영, SM그룹등과 더불어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2. 역사


1924년 경성방직 사장 수당 김연수가 세운 '삼수사'가 그룹의 기원이다. 창업 초기에 전남 장성농장 등 가문 소유 농장 관리를 해 오다가 1931년 '삼양사'로 사명을 변경하고 1934년에 합자회사로 전환했다. 1939년 만주에 남만방적을 세우고 최초로 민간장학단체 '양영회'를 세운 뒤, 1940년 만주 오리엔탈비어를 인수하고 이듬해 삼양상사를 세웠다. 1945년 8.15 해방 뒤 남북 분단으로 만주에서 철수하고 1948년 전북 고창에 해리염전을 준공하기도 했으나, 1949년 김연수 사장이 친일 행적으로 반민특위에 구속됐고 1950년에는 농지개혁법에 따라 농장 사업도 그만두었다.

 

이후 6.25 전쟁을 거쳐 1953년 삼양통상 및 서남수산을 세웠고, 1955년 울산 제당공장을 세워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한 뒤 이듬해에는 (자)삼양사와 삼양통상을 통합해 '(주)삼양사'를 출범시켰다. 1963년 삼양모방을 세워 섬유사업에 진출한 후 1975년 김연수가 명예회장, 김상홍이 회장이 되면서 2세 경영체제를 수립했다. 1977년 이천중기를 인수하여 기계사업에도 손을 뻗고 1979년 삼양종합연구소를 열었다. 1984년 삼성그룹으로부터 선일포도당을 인수한 뒤 1988년 호남정유와 합작해 삼남석유화학을 세웠으며, 같은 해 신한제분을 인수하고 그룹회장제를 도입해 기업집단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췄다. 1989년에 삼양화성을 세워 식품/화학사업군을 이뤘다.

 

1992년 삼양메디케어를 세워 제약사업에도 진출했다. 1993년 대전 대덕에 그룹연구소를 세우고 1995년 삼양데이타시스템을 세워 전산사업에도 진출했다. 2004년 그룹 로고를 소문자로 바꾸고 2011년에는 기존 삼양사 법인을 지주회사 '삼양홀딩스'로 개편해 계열사들을 산하에 두었다.


3. 로고 변천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썼던 구 로고. 그 이전인 1931년부터 1984년까지는 마름모 안에 三이 들어간 형태의 로고를 사용했다.

 

 

2016년부터 사용 중인 로고. 이것은 2004년부터 쓰던 기존 로고를 손질한 것이다.


4. 삼양정신


 

삼양훈: 1931년 제정.

안분이양복 관위이양기 생비이양재(安分以養福 寬胃以養氣 省費以養財)

출처 입력

 

기업상 (1993 ~ 2004)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세계 속의 초일류기업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삼양

세계로 뻗어나가는 삼양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삼양

출처 입력

 

 

경영이념 (1993 ~ 2004)

창조적 혁신경영, 풍요로운 사회건설, 행복한 생활지향

출처 입력

 

슬로건: 2004년 제정

생활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는 기업

출처 입력

 

비전

Vision 2010: 기존사업의 다각화, 사업분야의 고도화, 해외진출을 통한 Globalization (2004 ~ 2010)

출처 입력

Vision 2015/2020: 핵심사업의 견고한 성장 달성, 신사업분야 미래 성장 플랫폼 확보 (2010 ~ )

출처 입력

 

 

전사전략

선택과 집중

핵심시장 내 선도적 시장 지위확보

신성장동력 기반 구축

혁신을 통한 차별화

출처 입력

 

삼양가치

신뢰, 도전, 혁신, 인재 + 고객중심, 성과중심

 

출처 입력

사가: 작사는 조병화, 작곡은 김동진이 각각 맡았으며, 1974년에 제정되었다.

(1절)겨레와 더불어 자라오는 우리의 창업 / 나라와 더불어 성장하는 창창한 기상

푸른 몸 푸른 꿈 무한의 빛 보람찬 생명 / 아-아 오랜 역사 솟은 삼양 시대선구자

 

(후렴)사랑하세 부강하세 우리 삼양가족 / 키워 넓히세 창업정신 양복, 양기, 양재

 

(2절)겨레의 행복을 지켜오는 우리의 창의 / 나라의 번영을 키워가는 뜻 어린 사명

세워서 영원한 삼양의 기 쉼 없는 전진 / 세계로 이끌세 푸른 삼양 아람한 역사

출처 입력

 


5. 계열사 목록


5.1. 지주회사


삼양홀딩스: 구 삼양사. 각 사업부문은 2011년 (신)삼양사에 넘겼다.


5.2. 화학


 

삼양사 화학부문

케이씨아이: 화장품 원료 생산업체이다.

크리켐: 장섬유 강화 열가소성 플라스틱 생산업체이다.

삼남석유화학

삼양화성

삼양이노켐

삼양화인테크놀로지: 일본 미쓰비시화학과의 합작법인이다.

삼양공정소료(상해)유한공사: 중국 상하이 현지법인이다.


5.3. 식품


 

삼양사 식품부문

삼양F&B: 세븐스프링스 운영사였으며, 2020년 해당 브랜드 철수 후 법인만 잔존중이다.


5.4. 패키징


삼양패키징


5.5. 의약/바이오


삼양바이오팜

메디켐

삼양바이오팜 USA: 미국 현지법인이다.


5.6. 개별


삼양데이타시스템

삼양사 H&B부문

우리: 김연수 창업주의 증손자 김건호 상무의 개인기업으로, 업종은 비주거용 건물 임대업이다.

 


5.7. 산하 기관


삼양종합연구소


5.8. 관계사


유클릭

휴비스: SK케미칼과의 합작법인이다.

JB금융그룹


5.9. 공익사업


양영재단: 구 양영회

수당재단: 구 수당장학회.


5.10. 과거


남면방적: 만주 현지 방적업체로, 1945년 철수함.

대동화섬: 선경직물, 대한모방, 한국모방 등 3개사와 합작설립한 공판업체로, 1973년 청산됨.

디완 살만 파이버: 파키스탄 현지법인으로, 2004년 지분매각됨.

삼양메디케어(현 에스와이메디케어): 2001년 제일약품에 매각됨.

삼양모방: 1977년 (구)삼양사에 합병됨.

삼양밀맥스: 구 신한제분. 2014년 (신)삼양사에 합병됨.

삼양상사: 1950년 해체됨.

삼양상회: 만주 오리엔탈비어 판매업체로, 1945년 철수함.

삼양수산: 1965년 (구)삼양사에 합병됨.

삼양엔텍: 구 이천중기-삼양중기. 2014년 삼양홀딩스에 합병됨.

삼양웰푸드: 구 한국하인즈 유지사업부문. 2014년 (신)삼양사에 합병됨.

삼양제넥스: 구 선일포도당. 2015년 (신)삼양사에 합병됨.

삼양제넥스바이오: 2013년 삼양바이오팜에 합병됨.

삼양종합금융: 구 전북투자금융. 1998년 퇴출 후 이듬해 청산됨.

삼양테크힐: 2000년 조흥화학공업(현 조흥)에 매각된 후 이듬해 합병됨.

삼양텍스: 2003년 청산됨.

삼양텔레콤: 1998년 청산됨.

삼양통상: 1956년 (구)삼양사에 합병됨.

삼양푸드앤다이닝: 베이커리 카페 'Cafe Mix&Bake' 운영사로, 2014년 세븐스프링스에 합병됨.

삼양EMS: 2013년 (신)삼양사에 합병됨.

서남수산: 1961년 (구)삼양사에 합병됨.

아셉시스글로벌: 2015년 삼양패키징에 합병됨.

오리엔탈비어: 만주 맥주업체로, 1945년 철수함.

SY텍스타일: 베트남 현지법인으로, 2002년 지분매각됨.

 

 

 


1. 개요(경성방직)


대한민국의 방직업체로 삼양그룹과 더불어 현존하는 일제 시기에 한국인이 세운 기업들 중 하나이다. 매우 오래 전에 세워진 회사이기 때문에 근현대사를 배울 때 물산장려운동에서 이 회사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조흥은행에 이어 유가증권시장 상장업체 5호다. 현재의 사명인 경방은 경성방직의 줄임말에서 비롯됐다.


2. 역사


1919년에 인촌 김성수가 이강현의 조언으로 도산 위기에 있던 경성직뉴를 인수해서 재설립한 게 기원이다. 초기에는 경영상 적자를 겪었으나 1922년에는 관계사 경성직뉴 산하에 고무공장을 세워 '별표 고무신'을 생산했고, 1923년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에 공장을 연 뒤 직원을 100% 조선인으로 채우고 방직제품 생산을 개시했으나 일본제 면제품이 독점한 터라 시장진입에 어려움이 생겼다. 이에 따라 우리 풍토에 맞는 제품을 구상하여 농촌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고자 수십번 빨아도 해지지 않고 묵직한 중량 제품을 고안토록 했다. 심지어 상표명에도 1926년 나온 태극성 및 불로초 등과 같이 우리말 상표명을 적극 쓰기도 했다. 아래 사진과 같이 같은 시기에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했다.

 

 

1927년 경성 황금정 1정목에서 광교로 사옥을 이전한 후 1933년 영등포공장 증축 후 대규모 방직업체로 성장해 일본계 기업과 경쟁했으며, 1939년 만주국에 남만주방직회사를 세운 후 1944년 동광제사 및 중앙상공을 합병했고, 1945년 8.15 해방 이후 경성방직 출신 기술자들은 국내 면방직업 재건에 기여하기도 했다.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며 관리 미숙과 일부 시설 파손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영등포공장 일부 시설을 복구해 명맥을 이어갔다.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 설립 시 상장해 1962년 동일방직과 함께 동인염색공업을 인수한 후 1968년 면제품 판매체인 '경방써비스코너'를 열었고, 1970년 현 명칭으로 변경한 후 영국령 홍콩에 해외지사를 세웠으며, 1974년 경기 용인군에 공장을 세우고 1975년 경방고등공민학교를 열었다. 1984년 경기 안산 반월공장, 1987년 광주공장을 각각 세웠다.

 

다른 한편 1973년 태평증권, 1977년 새한패시픽 등을 각각 인수하고 1980년에는 경방코너를 독립법인으로 분사시켰고, 1990년 경방어패럴을 세워 패션업에도 진출하고 1994년 '경방필백화점'을 개점해 쇼핑사업에도 진출하고 관련 업무를 경방유통에 맡도록 했다. 같은 해 한강종합유선방송 설립에 참여해 지역 케이블SO 사업에도 손을 뻗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계열사들을 정리하며 2001년 우리홈쇼핑 설립에 참여했고, 2003년 경방상사를 합병하고 영등포 복합단지 개발계획 'K-Project'를 추진하며 영등포공장을 폐쇄했다. 2006년 우리홈쇼핑을 롯데쇼핑에 팔고 2007년 (주)신세계와 백화점 위탁경영 20년 계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경방필백화점을 폐점했고, 2008년 베트남 현지법인을 세웠으며 2009년에 영등포 경방 타임스퀘어를 개장했다. 2015년 경방유통을 합병하고 2019년에는 면방업계 사양화에 따라 용인 및 광주공장 생산업무를 중단시켰다.

 

현재 구 영등포공장 건물 중 사무동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타임스퀘어 뒤쪽에 보존되어 있다. 카페가 들어가 있다.


3. 기업정신


1968년에 제정됐다.

사훈: 인화로 단결하고 창의로 공부하여 책임을 여행하자

사가: 작사는 박목월, 작곡은 나운영이 맡았다.

(1절)희고도 깨끗한 실을 뽑아 / 겨레의 자급자족 다짐하던

그 전통 그 횃불이 오늘에도 휘황한 / 보람찬 업적이여 우리의 경방

 

(후렴)조국에 하늘에 영원토록 / 빛나리 태극성 찬란한 별아

 

(2절)올올이 정성을 다한 솜씨가 / 빛살로 뻗어가네 바다 너머로

가는 곳 곳곳마다 아름다운 수놓고 / 이름을 떨치리 우리의 경방

출처 입력


4. 역대 임원


명예회장

김용완 (1975~1996)

김각중 (2007~2012)

대표이사 회장

김용완 (1971~1975)

김각중 (1975~2007)

이중홍 (2007~2015)

김준 (2016~ )

대표이사 사장

박영효 (1919~1935)

김연수 (1935~1945)

최두선 (1945~1946)

김용완 (1946~1971)

조영구 (1971~1975)

박인환 (1975~1981)

김각중 (1981~1988)

고시대 (1988~1992)

장기주 (1992~1996)

백남진 (1996~2001)

이상선 (2002~2003)

이중홍 (2003~2007)

김준 (2007~2016)

김담 (2016~ )

대표이사 부사장

김담 (2009~2016)

 

 

 

5. 오너 일가


 

인촌 김성수

경방의 창업주 중 한 명. 경방 외에 동아일보, 고려대학교를 세웠다.

 

 

 

수당 김연수 (1896년생, 1979년 사망)

경방의 제2대 사장이자 삼양사의 창업주. 위에 언급된 김성수의 동생. 그러나 그는 일제 말기인 1939년부터 만주국 명예총영사와 중추원 참의를 맡고 군수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세우는 등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반민특위에 끌려간 흑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서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나름대로 자기 반성의 글을 썼다.

 

 

광산 김용완 (1904년생, 1996년 사망)

인촌이 경영하던 중앙고등보통학교(現 중앙고등학교)의 학생(13회 졸업)이었으며 인촌의 막내여동생인 김점효와 결혼하였다. 히로시마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수학 선생으로 근무하려다 김연수의 권유로 경성방직에 입사했다. 1946년에 사장으로 취임하여 1975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6번이나 역임했다.

 

김각중 (1925년생, 2012년 사망)

김용완의 장남이며 서울 중앙고(33회 졸업)와 연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유타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쳤다.[2] 고려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근무하다가 회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75년에 부친의 뒤를 이어 경방의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했다. 1999년에 전경련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최초의 부자 전경련 회장 역임 기록을 세웠다.

 

김준 (1963년생)

김각중의 장남이며 고려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학에서 박사를 마쳤다. 경방 사장이며 섬유사업을 총괄한다

 

김담 (1965년생)

김각중의 차남이며 서울 경신고와 인하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입사했다. 경방 타임스퀘어를 총괄하고 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