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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현대가 기업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현대해상 HDC KCC 한라 현대그룹) 정몽구 정몽근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정인영 정상영

 

 

 

 

 

 

 

 

1. 개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가족 관계. 혈족은 하동 정 씨 지예 부사공파에 속한다. 언론 등지에서 범현대가, 현대 일가 등으로 불리고 있다. 다른 재벌들처럼 상당히 화려한 혼맥을 가지고 있다.

 

2. 돌림자

 

정주영 일가는 하동 정 씨 지예 부사공파로# 현대가의 자녀들, 특히 아들들은 돌림자를 쓴다.

 

 

1세대는 "O영(永)"자 돌림을 썼고 2세대는 "몽(夢) O"자 돌림을 썼다. 3세대는 아들은 "O선(宣)"자 돌림을 썼고 딸은 "O이(伊)"자 돌림을 썼다. 4세대는 아들은 "창 O"자 돌림, 딸은 "진 O"자 돌림을 쓴다.

 

 

사실 저 돌림자들이 하동 정 씨 지예 부사공파 문중에서 정한 항렬자는 아니다. 대부분 재벌들이 자신들의 성씨 일족에서 정한 항렬자를 쓰는 것과 대조적인 부분. 그냥 '범 현대가 일원'만 쓰는 돌림자로 보면 된다.

 

3. 병역

 

현대 가는 비교적 다른 재벌에 비해서 병역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편이다. 정몽구(현대자동차 회장)는 육군 병장 만기 제대했고 정몽준(현대중공업 회장), 정기선(현대중공업)은 ROTC 장교 출신이다. 다만, 정몽근(현대백화점)과 정의선(현대차)은 병역 면제자다. 직계 3세대 11명 중 정의선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병역을 마쳤다.

 

 

그 외에도 정몽주니어 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갑질 등의 횡포로 이슈가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정몽주니어의 경우에도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지 못하고 물의를 일으킬만한 말을 생각 없이 한 게 문제였을 뿐이지 그 자체로 갑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정몽주니어로 유명한 정예선은 물론, 그 아버지만 해도 최소한 학창 시절에는 서민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하니 최소한 교육 과정 자체에서는 재벌이라는 것을 크게 의식시키지 않는 편이다.

 

 

이는 현대가가 정치를 계속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 씨 가문이 직접 정치인이 될 생각은 없는 반면에 현대 가는 정 씨 집안은 정치인을 한적도 있고 대권에도 도전한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현대 가(家)는 해외보다는 국내 여론을 더 많이 신경을 쓰는 편이다.

 

4. 스포츠

 

가문 전체가 스포츠와 매우 깊은 인연을 자랑한다. 창업주 정주영은 1980년대 초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도 정부가 정주영에게 프로야구단 창단을 권유했지만 "서울 올림픽 유치와 개최 준비에 올인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면서 야구단 창단을 고사한 바 있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첫 해부터 흥행 대박을 터뜨리자 야구단 창단에 나서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됐고 결국 1983년 말 프로축구단을 만들고 십수 년 뒤인 1996년 프로야구단을 창단하는 것으로 과거의 아쉬움을 털게 된다.

 

 

현대그룹이 계열 분리되기 전에는 삼성과 더불어 굉장히 많은 팀들을 운영했고 당시 운영하던 팀들도 대부분 현재 이어져오고 있어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 운영팀 목록은 현대그룹 참고.

 

 

KBO 리그, K리그, KBL, V-리그 등 국내 주요 프로스포츠 리그에는 범 현대 계열 기업의 구단이 하나씩 다 있고

 

( 이 중 현대중공업 그룹 소유의 울산 현대, HDC그룹 소유의 부산 아이파크, KCC그룹 소유의 전주 KCC 이지스를 빼면 모두 현대자동차 그룹 산하 구단이다.)

 

각 그룹 차원에서 적극적인 투자를 해온 덕분에 구단들의 성적 또한 중상위권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범 현대가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해체된 구단도 있다. 2003년 이후 구단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2007년 시즌 후 해체된 현대 유니콘스다.

 

 

특히 현대 가는 유독 축구에 대한 인연이 남다르다. 정몽준은 1993년부터 2009년까지 대한 축구협회장을 지냈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는 FIFA 부회장을 지냈다. 특히 라이벌 일본보다 유치 경쟁을 훨씬 늦게 시작했음에도 2002 월드컵을 공동 유치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2002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덕분에 단숨에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올라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도 했다.

 

 

현재 정몽준이 울산 현대 대주주이고, 정의선이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 대한 축구협회장이자 FIFA 평의회 위원인 정몽규는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다.

 

 

아울러 범 현대가 계열 주요 그룹 중 하나인 현대중공업에는 현대스리가라고 불리던 부서별 축구대회가 오랫동안 진행됐는데 현대스리가 문서에도 나와있듯 그냥 평범한 동네 축구나 사내 축구대회 수준이 아니다. 특히 이 대회에는 정주영 당시 회장이 1회 대회 때 직접 선수로 뛰고 선수들과 막걸리를 먹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축구 외에 다른 종목도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있는데 다른 기업이 딱히 관심을 두지 않던 민속 종목 씨름에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 등을 통해 상당히 오랜 기간 후원을 했다. 이는 생전에 엄청난 씨름 팬이었던 정주영의 영향이 크다.

 

( 현대그룹 신입사원 연수 때마다 빠지지 않던 체육활동 중 하나가 씨름이었고 정주영 본인이 샅바를 직접 매고 경기에 나설 정도로 씨름 광팬이었다. 특히 1983년에 열린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VIP석에서 다 본 인물 중 한 명이다.)

 

 

또 양궁이 대한민국 올림픽의 전통적 효자 종목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현대가의 지원이 있었기에( 현대그룹 계열분리 전부터 대한 양궁협회장을 맡았으며 정몽준에 이어 정몽구가 이어받으면서 계열분리 이후 현대자동차 그룹에서 전담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그룹은 현대제철(남자)과 현대모비스(여자)를 통해 실업 양궁단을 운영하고 있다.)

 

가능했다.

 

5. 현대家 형제 기업 간 관계

 

왕자의 난으로 유명한 현대 가고, 이로 인해 현대그룹이 여러 기업들로 분할되었지만, 그럼에도 현대 가는 서로 간의 유대감이 깊은 편이다. 정주영 창업주의 제사일에는 정주영 회장의 직계 자손뿐 아니라 정주영의 동생들과 조카들도 참석한다. 또한 어느 한 기업이 위기가 왔을때는 범 현대가 기업들이 의기투합해 서로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한라그룹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때, 범 현대가 기업들이 도와줘서 한라그룹을 재건할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도 있는데 바로 현정은이 경영하는 현대그룹. 여기는 다른 현대가 기업들과 전부 사이가 좋지 않다.

 

 

범 현대그룹은 서로간의 거래가 많다. 범 현대그룹 계열사에 입사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현대와 함께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아침에 출근할 때 모는 자가용은 범 현대가 할인을 해주는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 제네시스에서 만든 차량일 것이고, 서울에서 근무한다고 통근버스를 탄다면 현대엔지니어링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탈 것이다.

( 추가로 현대자동차 그룹 계열사의 경우 본사 사옥이나 제조공장의 자산 포괄위탁(경비, 영선 등 각종 자산 관련 제반 관리)은 현대엔지니어링이 관리하고 있으며, 출입 게이트를 통과하려면 현대카드에서 만들어 준 M, M2 사원증을 찍고 들어가야 한다.)

근무하는 책상이나 기타 사무실 가구는 현대리바트 것이고, 구내식당은 현대그린푸드에서 운영하며, 각종 선물은 현대 H&S에서 주문한 물품이 온다. 제조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근무한다면 마찬가지로 현대 H&S가 납품한 근무복을 입고 안전화를 신을 것이다. 출장을 간다면 업무용 차량은 현대캐피털에서 렌트한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일 것이고, 보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현대해상에서 든 보0험이다. 종합 건강검진은 서울아산병원 등 아산병원에서 많이 한다. 만약 HDC그룹이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성공했으면 해외출장도 현대와 함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1남 정주영 (현대그룹)

정주영 프로필 출생 사망 호 직업 학력 부모 혀 제자 매 여동생 배우자 자녀 신체 

출생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 전면 아산리
사망
2001년 3월 21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 중앙병원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아산(峨山)
직업
기업인
학력
송전 공립 보통학교 (졸업)
부모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형제자매
남동생 정인영, 정순영, 정세영, 정신영, 정상영
여동생 정희영
배우자
변중석
자녀
장남 정몽필
차남 정몽구
삼남 정몽근
장녀 정경희
사남 정몽우
오남 정몽헌
육남 정몽준
칠남 정몽윤
팔남 정몽일
차녀 정정인
삼녀 정정임
신체
175cm, 72kg, AB형
의원 선수

 

 

 

정주영 1남 정몽필

전 현대제철 사장 정몽필 출생 사망 직업 학력 부모 형제자매 배우자 자녀 

출생
1934년 12월 11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사망
1982년 4월 29일 (향년 47세)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경부고속도로 김천분기점
직업
기업인
학력
경기상업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경영학 / 학사)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부모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형제자매
이복 남동생 정몽구,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이복 여동생 정경희, 정정인, 정정임
배우자
이양자(1943 ~ 1990)
자녀
장녀 정은희(1971 ~ )
차녀 정유희(1973 ~ )

 

1. 개요

1남 정몽필 (1934 ~ 1982) 인천제철 사장 / 妻 이양자 (1943 ~ 1990)

→ 1녀 정은희 (1971 ~ ) / 夫 주현 (1967 ~ ) 前 현대 IHL 대표

→ 2녀 정유희 (1973 ~ )[/ 夫 김지용 (1973 ~ ) 태아산업 부사장

→→1남 김진석 (2000 ~ )

→→2남 김진하 (2003 ~ )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주영의 장남이자 전 현대제철 사장.

 

현대가의 원조 축빠(축구광)로 알려져 있다. 그 영향으로 동생인 정몽준과 사촌동생인 정몽규가 차례로 대한 축구협회장을 역임했다.(현재로는 정의선이 전북 현대 모터스, 정몽준이 울산 현대, 정몽규가 부산 아이파크를 소유 중)

 

2. 생애

 

 

 

1934년 12월 11일, 강원도 통천군 출생. 정주영의 첫째 아들이다. 정주영과 변중석이 결혼한 날이 1936년 1월 8일이니, 변중석이 시집올 때 이미 태어나 있었던 셈이다. 애초에 변중석과 정몽필의 나이 차이가 13살밖에 나지 않는다.

 

 

정몽필의 생모는 정주영의 첫사랑으로, 정주영이 19세, 생모는 17세 때 정몽필을 낳았다. 하지만 정주영 집안에서 생모와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아 결혼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주영 집안은 몰락한 양반 가문으로, 집안의 장손이었던 정주영의 혼인 상대를 비슷한 계층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정몽필의 생모는 통천을 떠나게 되어 정주영과 헤어졌다.

 

 

1982년,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경부고속도로에서 현대 그라나다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가다가 트레일러와 추돌로 운전기사와 함께 사망했다.

 

( 12톤 트레일러를 추월하려고 하다가 옆구리를 들이받아 8m 정도 끌려가 낭떠러지로 추락해 연료탱크가 터지고 엔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운전기사와 정몽필 회장 모두 숨졌고, 차량은 정말 전소되었다.)

 

 

여담으로 부인 이양자도 위암으로 1990년 9월에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딸만 둘을 뒀는데, 장녀 정은희의 남편은 현재 현대자동차 계열사 대표이사로 재직한다. 차녀 정유희는 김석원 前 쌍용그룹 회장의 장남 김지용과 결혼했다.

 

 

이명박 前 대통령의 현대 시절 일화를 보면 아버지의 불같은 성질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 적혀있다. 이명박은 당시 대표이사 사장이었고 정몽필은 전무였는데

 

( 이명박 신입시절 때 현장소장이었던 정몽필에게 조인트를 중점적으로 까였다는 소문이 있으나, 본인이 부인하니 알 수 없다. 다만 영웅시대에선 이상구 소장(실제모델은 양봉웅)에게 쪼인트를 까인다)

 

아버지와 마찰을 한참 일으키고 있을 때인 데다가 중간에 커트를 하도 많이 해서 밑의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명박이 정몽필을 따로 불러 주의를 줬고, 그 이후로 정몽필이 현대그룹 아래 협조로 잘 순응하며 자기 후임으로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에 부임했다고 한다.

 

 

 

정주영 2남 정몽구 (현대자동차 그룹)

정주영 2남 정몽구 (현대자동차 그룹)  프로필 출생 직업 현직 부모 형제자매 배우자 자녀 

 

출생
1938년 3월 19일 (83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직업
기업인
현직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
학력
경복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공업경영학 / 학사)
부모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형제자매
이복형 정몽필
남동생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여동생 정경희
이복 남동생 정몽일
이복 여동생 정정인, 정정임
배우자
이정화(1939 ~ 2009)
자녀
장녀 정성이(1962 ~ )
차녀 정명이(1964 ~ )
삼녀 정윤이(1968 ~ )
장남 정의선(1970 ~ )
신체
177cm, 75kg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 전역
재산
57억 달러 (한화 약 6조 5,700억 원)

 

1. 개요

 

2남 정몽구 (1938 ~ ) 현대자동차 그룹 명예회장 / 妻 이정화 (1939 ~ 2009)

→ 1녀 정성이 (1962 ~ ) 이노션 고문 / 夫 선두훈 (1957 ~ ) 영훈 의료재단 선병원 이사장

→→ 1녀 선아영 (1987 ~ ) / 夫 길성진 (1985 ~ )

→→ 1남 선동욱 (1988 ~ ) / 妻 채수연 (1990 ~ )

→ 2녀 정명이 (1964 ~ ) 현대캐피털·카드·커머셜 브랜드부문장 / 夫 정태영 (1960 ~ ) 현대캐피탈·카드·커머셜 대표이사

→→ 1녀 정유미 (1989 ~ )

→→ 2녀 정유진 (1991 ~ ) 현대카드 디지털 사업실 사원

→→ 1남 정석준 (1997 ~ )

→ 3녀 정윤이 (1968 ~ ) 해비치호텔 앤드 리조트 전무 / 前夫 신성재 (1968 ~ ) 삼우 부회장

→→ 1남 신우진 (1993 ~ )

→→ 2남 신우택 (1996 ~ )

→→ 3남 신우현 (2004 ~ )

→ 1남 정의선 (1970 ~ )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 대한양궁협회 회장, KIA 타이거즈 구단주,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 / 妻 정지선 (1973 ~ )

→→ 1녀 정진희 (1996 ~ )

→→ 1남 정상철 (1998 ~ )

정몽구(鄭夢九, 1938년 3월 19일(음력) ~ )는 현대자동차 그룹의 초대 회장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함께 국내의 대표적인 재벌 총수 2세로 꼽히는 인물이다.

 

범현대가 중 가장 규모가 큰 현대자동차 그룹을 경영하고 있다. 왕자의 난 이전 정몽구가 현대그룹 회장직에 올랐다가 정몽헌에게 현대그룹의 회장직을 빼앗긴 후 현대자동차 그룹으로 분리해 나왔다. 이후 현대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정몽헌이 자살한 후 정몽헌의 부인 현정은이 현대그룹을 경영하다가 2010년대 해운업 불황으로 그룹이 몰락했다. 반면에 현대자동차 그룹은 2000~2010년대 전화기 호황으로 그룹이 급성장하고, 은행관리로 넘어간 현대건설을 인수하여, 현대그룹의 적통을 승계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2. 기업인 활동

 

 

강원도 통천에서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를 유례없는 단기간에 세계 5위 자동차 업체로 성장시킨 창의와 혁신의 리더십과 경영철학은 미국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서 MBA 필수 강의주제로 채택할 만큼 경영학의 교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정몽구 회장을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에 선정하기도 했다.

 

 

2000년 3월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다툼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정몽구는 같은 해 9월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철강 당진공장 인수, 현대제철 출범, 일관제철소 준공, 현대건설 인수 등을 통해 자동차, 철강, 건설이라는 세 축을 뚜렷이 만들어 현대자동차 그룹의 틀을 구축했다.

 

 

2020년 10월 14일부로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며 명예회장으로 남게 된다.

 

3. 학력

 

 

1959년 경복고등학교 졸업(34회)

 

1967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공업경영학(현 산업공학과) 학사

 

1989년 센트럴 코네티컷 대학교 명예 인문학 박사

 

2001년 몽골 국립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2003년 고려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2015년 한양대학교 명예 공학박사

 

4. 주요 경력

 

 

1970년 2월 ~ 1970년 9월 :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부품과 과장

 

1970년 10월 ~ 1970년 12월 :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부품과 차장

 

1972년 1월 ~ 1973년 2월 :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부장

 

1973년 3월 ~ 1973년 5월 : 현대건설 자재부 부장

 

1973년 6월 ~ 1974년 2월 :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이사

 

1974년 2월 ~ 1987년 : 현대자동차 서비스 대표이사 사장

 

1977년 7월 ~ 1987년 1월 : 현대정공 대표이사 사장

 

1981년 2월 ~ 1987년 1월 : 현대강관 대표이사 사장

 

1983년 1월 ~ 1984년 2월 : 제4대 한국 컨테이너 공업협회 회장

 

1984년 2월 ~ 1997년 2월 :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1985년 4월 ~ 1997년 1월 : 대한양궁협회 회장

 

1986년 11월 ~ 1987년 1월 :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사장

 

1986년 10월 ~ 1997년 11월 : 아시아양궁연맹 회장

 

1987년 1월 ~ 1998년 1월 :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

 

1987년 2월 ~ 1996년 1월 : 현대정공 회장

 

1987년 2월 ~ 1996년 1월 : 현대자동차써비스 회장

 

1987년 2월 ~ 1996년 1월 : 현대강관 회장

 

1987년 2월 ~ 1996년 1월 : 현대산업개발 회장

 

1987년 2월 ~ 1996년 1월 : 인천제철 회장

 

1993년 5월 ~ 1996년 2월 : 대한체육회 회장

 

1993년 9월 ~ 1999년 7월 : 국제양궁연맹 부회장

 

1994년 3월 ~ 1998년 : 현대 우주항공 회장

 

1996년 1월 ~ 2000년 3월 : 현대그룹 회장

 

1997년 1월 ~ 현재 : 대한양궁협회 명예 회장

 

1997년 2월 ~ 2017년 2월 :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1997년 3월 : 한러 경제협회 회장

 

1997년 11월 ~ 현재 : 아시아양궁연맹 명예회장

 

1998년 4월 ~ 2000년 3월 : 현대 경영자협의회 회장

 

1999년 ~ 2001년 :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부의장

 

1999년 1월 ~ 2002년 3월 : 한국표준협회 회장

 

1999년 3월 ~ 2020년 10월 : 현대자동차 회장[5]

 

1999년 7월 ~ 2009년: 기아자동차 회장[6]

 

1999년 7월 ~ 현재 : 국제양궁연맹 명예부회장

 

1999년 11월 ~ 2002년 12월 : 2010 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위원장

 

2000년 9월 ~ 2020년 10월: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

 

2004년 9월 : 한보철강 인수

 

2005년 1월 ~ 2010년 8월 : 동아시아재단 이사장

 

2006년 3월 : 현대제철 출범

 

2007년 2월 ~ 2010년 8월 : 2012 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고문

 

2007년 8월 ~ 2007년 12월 : 2012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명예 유치위원장

 

2008년 3월 : 2012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 명예 위원장

 

2010년 8월 : 동아시아재단 명예 이사장

 

2011년 4월 : 현대건설 인수

 

2020년 10월 ~ 현재 : 현대자동차 그룹 명예회장

 

5. 상훈

 

 

1979년 11월 : 수출산업포장

 

1981년 12월 : 새마을 지도자상

 

1985년 8월 : 철탑산업훈장

 

1986년 12월 : 체육훈장 맹호장

 

1989년 4월 : 체육훈장 청룡장

 

1989년 11월 : 동탑산업훈장

 

1996년 5월 :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

 

1997년 5월 : 한국 경영학회 한국경영자 대상

 

1998년 3월 : 제25회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

 

2001년 2월 : 올해의 자동차산업공헌상,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미국 자동차산업 공헌상

 

2004년 7월 : 몽골 정부 북극성 훈장

 

2004년 12월 : 2004년 자동차 부문 최고의 CEO (미국 비즈니스위크 선정)

 

2005년 7월 :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부문 아시아 최고 CEO

 

2005년 10월 : 인촌기념회 산업기술부문 인촌상

 

2005년 11월 :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인 42위

 

2009년 6월 :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티 밴 플리트상

 

2010년 7월 :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부문 아시아 최고 CEO

 

2011년 11월 :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부문 아시아 최고 CEO

 

2011년 12월 : 미국 모터트렌드 세계 자동차 업계 파워 리스트 2위

 

2012년 2월 :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2년 3월 : 이탈리아 인터 오토뉴스 글로벌 최고 경영인상

 

2012년 12월 :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세계 100대 CEO 6위

 

2020년 2월 :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7]

 

6. 자동차산업 기여

 

 

변방에 머물렀던 현대차를 글로벌 탑 5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재벌 2세였지만 창업 경영자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차 그룹은 계열분리 당시만 해도 계열사 10개, 자산 34조 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2019년에는 계열사 54개, 자산 234조 원을 보유했다.

 

 

생산 혁신, R&D 혁신, 서플라이 체인(Supply Chain) 혁신 등 공학과 경영을 결합한 과감한 시도와 성취는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다. 또한 자동차 산업과 소재, 전기, 전자, IT 분야의 창조적 융복합을 선도하고 있으며, R&D를 중심으로 미래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품질경영’ ‘현장 경영’으로 대표되는 경영철학이 대변하듯, 품질을 중시하고 현장에서 답을 찾고 있다.

 

 

자동차 생산 공정과정에서 최적화된 부품 공급 모듈화 시스템을 도입, 효율성을 최대화했으며, 전 세계 균일한 고품질의 생산공장을 적기에 건설할 수 있는 표준공장 건설 시스템을 확립하였다. ‘쇳물에서 자동차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완비, 그룹 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세계 최초로 친환경 자원순환형 사업구조를 갖춰 경제적 성과뿐 아니라 환경에 대한 책임과 지속가능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연구 역량 집적화와 고도화도 전세계 산업계가 주시한 혁신이었다. 남양에 세계 최대 규모의 R&D센터를 설립, 연구개발 역량을 집중하여 미래 성장기반을 확보하였고, 이는 독자 엔진 개발과 수소연료전지 파워트레인 시스템, 5.0 타우엔진, 1.6 감마엔진이 세계 10대 엔진에 선정되는 쾌거로 이어졌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만의 독자적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개발, 글로벌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으며, 궁극의 친환경차로 평가받는 수소 전기차를 세계 최초로 양산하는 결실을 낳았다.

 

 

해외 공장 건설 시 국내 부품업체들의 대규모 동반 진출은 사실상 현대기아차에서 최초로 시도한 독창적 협력체계로 산업사적 의미가 지대할 뿐 아니라, 동반성장 의지의 일환이었다. 정몽구 회장은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는 통찰력과 전략적 결단으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역발상 경영인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의 ‘10년 10만 마일’ 보증 실시 승부수는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강자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전례가 없는 최단기간 내에 글로벌 생산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 현대·기아차를 내수기업에서 세계 유수의 경쟁업체들과 겨루는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세계 언론이 관용어로 사용하는 ‘현대 스피드’는 이 같은 정몽구 회장의 추진력에 대한 평가다. 그 결과,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브랜드 40위, 기아자동차는 74위를 기록하는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미국 품질조사기관의 신차품질 조사에서도 현대자동차는 일반 브랜드 부문 1위를 획득했다.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회공헌 철학도 실현하고 있다. 사재를 출연하여 ‘현대차 정몽구 재단’을 설립하고, 저소득층 미래 인재 육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 업적을 인정받아 1996년 한국의 경영자상, 1998년 금탑산업훈장, 201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으며, 해외에서도 2001년 자동차 업계의 노벨상인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선정 ‘자동차산업공헌상’ 수상, 2004년 미국 비즈니스 위크 ‘2004 최고경영자’, 2005년 미국 오토모티브 뉴스 ‘2005 자동차 부문 아시아 최고 CEO’, 2009년 미국 벤플리트상 수상,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 미국 모터트렌드 ‘자동차산업 영향력 있는 인물’ 2위에 선정되었다.

 

 

 

정주영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그룹)

 

정주영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그룹) 프로필 나이 직업 현직 학력 부모 배우자 

출생
1942년 4월 11일 (79세)
직업
기업인
현직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
학력
경복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토목공학 / 학사)
부모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형제자매
이복형 정몽필
형 정몽구
남동생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여동생 정경희
이복 남동생 정몽일
이복 여동생 정정인, 정정임
배우자
우경숙
자녀
장남 정지선
차남 정교선
경력
현대건설 (1968.03 ~ 1973.12)
금강개발산업 이사 (1974.01 ~ 1974.04)
금강개발산업 대표이사 회장 (1987.01 ~ 2000.03)
현대백화점 그룹 대표이사 회장 (2000.04 ~ 2006.12)
병역
면제

1. 개요

3남 정몽근 (1942 ~ )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 / 妻 우경숙 (1951 ~ )

→ 1남 정지선 (1972 ~ ) 현대백화점그룹 대표이사 회장/ 妻 황서림 (1972 ~ )

→→ 1남 정창덕 (2004 ~ )

→→ 1녀

→ 2남 정교선 (1974 ~ ) 현대백화점그룹 대표이사 부회장 / 妻 허승원 (1975 ~ )[29]

→ 3남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백화점 그룹의 초대 회장이자 명예회장.

현대백화점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3세에 가장 빠른 2006년에 승계가 이뤄지기도 했다. 정몽근의 당시 나이는 64세로 상당히 이른 편이었다. 당시 장남과 차남에게 각각 유통과 비유통 부문을 나눠 승계한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공동 경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2. 상세

1942년 4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의 3남이다.

 

현대그룹의 유통업 계열사인 금강개발산업을 맡아서 현대백화점을 키웠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현대백화점 그룹의 회장직을 맡았으며, 현재는 현대백화점그룹의 명예회장이다. 현재 현대백화점그룹의 회장은 장남 정지선, 부회장은 차남 정교선이 맡고 있다.

 

형으로는 정몽필, 정몽구, 동생으로는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일, 정몽윤이 있다.

 

3. 학력

한양대학교 토목공학 학사

경복고등학교(36회)

형 정몽구와 고등학교-대학교 동문이다.

 

4. 경력

 

2006.12 ~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2000.04 ~ 2006.12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회장

 

1987.01 ~ 2000.03 금강개발산업 대표이사 회장

 

1974.01 ~ 1974.04 금강개발산업 이사

 

1968.03 ~ 1973.12 현대건설 근무

 

정주영 1녀 정경희

1녀 정경희 (1944 ~ ) / 夫 정희영 (1940 ~ ) 선진종합 회장

→ 1남 정재윤 (1969 ~ ) 선진종합 부회장[32] / 妻 김지향 (1971 ~ )

→ 1녀 정윤미 (1971 ~ ) / 夫 박승준 (1967 ~ ) 이건창호 사장

→ 2녀 정윤선 (1975 ~ ) / 夫 남석우 (1972 ~ ) 남영비비안 회장[33]

 

정주영 4남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정주영 4남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프로필 출생 사망 국적 직업 부모 

출생
1945년 2월 24일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90년 4월 24일 (향년 45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국적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본관
하동 정 씨
직업
기업인
학력
배재중학교 (졸업)
오산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영문학 / 학사)
부모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형제자매
이복형 정몽필
형 정몽구, 정몽근
누나 정경희
남동생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이복 남동생 정몽일
이복 여동생 정정인, 정정임
배우자
이행자(1945 ~ )
자녀
장남 정일선(1970 ~ )
차남 정문선(1974 ~ )
삼남 정대선(1977 ~ )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
2. 상세
1945년 2월 24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과 변중석 여사의 4남이다.

정몽우는 고교시절에 또래 친구들과 패싸움 도중에 머리를 크게 다치고 난 후 잠깐 우울증을 앓았었는데, 일상생활이 아주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는지 중앙대학교에도 들어가고 연애결혼으로 숙명여대 퀸카 출신인 이행자와 결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큰아들 정일선이 4살이 되던 해인 1974년부터 후유증 등이 재발하기 시작하여 이때부터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하튼 정신질환으로 작은 일도 못 맡자 아버지 정주영은 그런 정몽우를 굉장히 못마땅해했으며 정몽우는 수많은 자신의 형제들이 너무 유능해서였는지 반대급부로 자신이 무능한 것에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내 자식이라도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한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었지만 큰형이자 정주영의 장남인 정몽필이 교통사고로 죽자 그나마 정몽우에게 내준 게 고려산업개발 사장 자리다. 1987년 현대알루미늄 회장도 맡았으나 직함만 회장이었을 뿐 실제로 경영은 처남인 부회장 이진호가 맡았고, 본인은 경영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사실상 바지사장이었고, 당연히 정신적으로 상태가 좋지는 못했다. 1990년 4월 2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남서울 워싱턴호텔(현 르 메르디앙 호텔)에서 음독자살하였다.

 

4남 정몽우 (1945 ~ 1990) 현대알루미늄 회장 / 妻 이행자 (1945 ~ ) 前 고려산업개발 고문

→ 1남 정일선 (1970 ~ ) 현대 BNG스틸 대표이사 사장 / 妻 구은희 (1976 ~ )

→→ 1남 정창현 (1998 ~ )

→→ 1녀 정진주 (1999 ~ )

→→ 2남 정창민 (2001 ~ )

→2남 정문선 (1974 ~ ) 현대BNG스틸 부사장 / 妻 김선희 (1974 ~ ) 본태박물관장

→→1녀 정진원 (2004 ~ )

→3남 정대선 (1977 ~ ) HN] 사장 / 妻 노현정 (1979 ~ ) 前 KBS 아나운서

→→ 1남 정창건 (2007 ~ )

→→ 2남 정창성 (2009 ~ )

 

정몽우가 일찍 작고한 이후 그 슬하의 자식들은 큰아버지 정몽구 회장이 후견 하여 현대자동차 그룹 산하의 현대 BNG스틸을 경영하고 있다.

 

1945년 2월 24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과 변중석 여사의 4남이다.

 

( 정의선, 정지선, 정교선에게는 작은아버지이고 정예선에게는 큰아버지이다. KBS 아나운서 노현정에게는 시아버지가 된다. 셋째 아들 정대선과 결혼.)

 

 

정몽우는 고교시절에 또래 친구들과 패싸움 도중에 머리를 크게 다치고 난 후 잠깐 우울증을 앓았었는데, 일상생활이 아주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는지 중앙대학교에도 들어가고 연애결혼으로 숙명여대 퀸카 출신인 이행자와 결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큰아들 정일선이 4살이 되던 해인 1974년부터 후유증 등이 재발하기 시작하여 이때부터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하튼 정신질환으로 작은 일도 못 맡자 아버지 정주영은 그런 정몽우를 굉장히 못마땅해했으며 정몽우는 수많은 자신의 형제들이 너무 유능해서였는지 반대급부로 자신이 무능한 것에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내 자식이라도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한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었지만 큰형이자 정주영의 장남인 정몽필이 교통사고로 죽자 그나마 정몽우에게 내준 게 고려산업개발 사장 자리다. 1987년 현대알루미늄 회장도 맡았으나 직함만 회장이었을 뿐 실제로 경영은 처남인 부회장 이진호가 맡았고, 본인은 경영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사실상 바지사장이었고, 당연히 정신적으로 상태가 좋지는 못했다. 1990년 4월 2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남서울 워싱턴호텔에서 음독자살하였다.

 

2. 학력

중앙대학교 영문학 학사

오산고

배재중학교

3. 정신질환 증세

정몽우가 1974년 미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갑자기 차도에 뛰어들어서 승용차와 부딪힐 뻔한 적이 있다.

사망 1년 전인 1989년 6월 정몽우가 정신병원에서 직원과 산책 도중 또 차도에 뛰어들어 지나가던 승용차와 부딪혔다.

 

4. 경력

 

1970년 ~ 1974년 현대건설 입사

 

1974년 ~ 1977년 현대건설 부장

 

1977년 ~ 1979년 현대건설 상무

 

1979년 ~ 1987년 한국 포장 건설 사장

 

1987년 ~ 1990년 고려개발산업 사장

 

1990년 3월 ~ 1990년 4월 24일 현대알루미늄 회장

5. 사망

 

정몽우는 미국 유학을 갔다 오고 난 뒤부터 우울증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4월 23일 오전 정몽우는 잠깐 밖에 바람 좀 쐬러 간다 하고 외출증을 끊어 병원을 나왔다고 한다. 밖으로 나와서 정몽우는 차를 몰고 처남 이진호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처남과 만나서 테니스를 2시간 정도 치고 정몽우는 서울 강남 역삼에 있는 한 호텔에 가서 호텔 직원에게 오늘 하루 투숙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현금 20만 원을 맡기고 키를 받고 객실로 올라가 거기서 옷을 갈아입고 1층에 있는 호식당으로 내려와 혼자서 횟거리와 몇 병의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정몽우가 소주 몇 병을 먹어 치우는 것을 본 한 요리사가 정몽우에게 너무 폭음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니 정몽우는 “기분 좋을 때도 한 잔 마시고 괴로울 때도 한 잔 마시는 거 아니냐.”라고 매우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식사를 다 마친 정몽우는 검은 봉지를 들고 객실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다음날 아침 한 여직원이 정몽우가 투숙해있는 객실을 청소하기 위해 문을 두들기는데 인기척이 없어 문을 따고 들어가니까 정몽우가 쥐약을 입에 문 채 응접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숨져 있었다고 한다. 여직원은 비명을 지르면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출동하여 수사를 했는데 타살 흔적이 없어 자살로 종결지었다. 또 정몽우 지인은 자신이 평소에 아버지 정주영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하는 것을 자책하고 있던 데다가 평소에 애착이 있던 현대중공업의 노사분규 부담까지 갖게 되어 정신적으로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참고로 정몽우가 사망한 지 13년 뒤인 2003년 바로 아랫 동생인 정몽헌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주영 5남 정몽헌 (현대그룹)

 

1. 개요

 

5남 정몽헌 (1948 ~ 2003) 현대그룹 회장 / 妻 현정은 (1955 ~ ) 현대그룹 회장

→1녀 정지이 (1977 ~ ) 현대무 벡스 전무 / 夫 신두식 (1974 ~ ) 링크 자산운용 부사장

→→1녀 신혜윤 (2013 ~ )

→2녀 정영이 (1984 ~ ) / 夫

→1남 정영선 (1985 ~ ) 현대투자파트너스 이사 / 妻

 

현대그룹을 승계받았다. 하지만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이 계열 분리되었고 대북 사업을 영위하던 현대아산도 금강산 관광 등 대북 사업 중단의 여파로 경영이 악화된 데다 현대상선도 매각되면서 현대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하는 중견기업으로 몰락하였다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그룹 제4대 회장.

 

1948년에 정주영의 5남으로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졸업 당시 수석이었다)를 졸업하였다. 원래는 문학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정주영의 뜻에 따라 이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미국 페어레이디킨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각각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 현대상선 대표이사, 1992년 현대전자 대표이사를 지냈다. 1998년 현대그룹 회장이 되면서 대북사업을 수행하였다. 2000년 둘째 형 정몽구와의 왕자의 난 이후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을 지냈다.

 

2003년 불법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서 검찰의 조사를 받다가 그 해 8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서 투신자살하였다. [2] 장례식 당시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에서 조전을 보냈으며, 금강산 지구에서 분향소가 열리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현대그룹 회장직은 아내인 현정은이 이어받았다.

2. 이야깃거리

 

유난히 축빠가 많은 현대가(家)에서(아버지 정주영은 현대중공업 사내 축구대회에 직접 출전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고, 바로 아랫 동생인 정몽준은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국제 축구연맹 부회장을 지낸 세계 축구계 거물이며, 사촌동생인 정몽규는 사촌 형에 이어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됐을 정도로 현대 가는 축구와 인연이 깊다.)

 

동생 정몽윤과 함께 야빠였다.(현대해상 화재보험이 넥센 히어로즈의 창단 이후부터 2015년까지 꾸준히 스폰서를 맡아왔던 이유도 바로 정몽윤 덕분이기도 한데, 대한야구협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2004년까지는 사내 사회인 야구팀 1루수로 직접 뛰기도 했다. 한국 실업야구팀이었던 현대해상 야구단을 2003년 실업야구가 해체되기 전까지 운영한 것도 정몽윤의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대 유니콘스도 정몽헌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던 덕에(인천고를 막 졸업한 대형 유격수 박진만과 해태 타이거즈 지명을 받았던 연세대학교 출신 내야수(당시 포지션) 박재홍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거액이 동원됐다. 두 사람에게 쥐어준 신인 계약금 총액만 해도 7억 1000만 원인데 박진만에게 지불한 신인 계약금 2억 8000만 원은 당시 고졸 야수 역대 최고대우 수준이었다.)

 

팀 성적이 매우 좋았었다. 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구단주를 잃은 현대 유니콘스는 비참한 말로를 겪고 만다. 구단의 모기업인 하이닉스반도체의 경영난이 심해지면서 하이닉스와 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의 구단 운영 지원이 끊어졌다

 

(적어도 2005년까지는 십시일반 형태로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등 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이 조금씩 지원해줬지만, 2006년부터는 지원을 아예 끊어버렸다. 더 심각한 것은 정몽헌의 부인인 현정은이 2005년을 끝으로 아예 구단 운영 지원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생전에 남편이 열렬한 야구팬이었고, 남편이 유니콘스 구단 운영에 열정을 바쳤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한 아이러니다.)

 

서울특별시 연고지 입성을 위해 기존 서울 연고 구단에 줬어야 할 연고지 이전 비용 54억 원을 모기업 하이닉스반도체가 가로챘으며

 

(2000년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인천 연고권을 취득하는 조건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54억원을 줬고 현대는 그 54억원을 반으로 쪼개 서울 연고권 분할에 대한 권리 보상 목적으로 LG와 두산에 주기로 했으나, 하이닉스가 이 돈을 가로채면서 서울 연고권을 취득하지 못했다. 결국 이 때문에 유니콘스 구단은 2003년부터 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연고지 출신 1차 지명 신인을 뽑지 못하게 된다.)

 

26년간 적립해 온 KBO의 야구발전기금마저도 홀라당 써버리는 난리통 끝에 결국 해체되었다.

 

현대엘리베이터 이천공장 안에 있는 테스트타워인 현대아산타워 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정몽헌 R&D센터가 있다.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배우 김갑수가 정몽헌 회장 역을 맡았는데, 간지 나는 연기로 완벽하게 배역을 소화했다는 평이다. 현대그룹 측의 초청으로 정몽헌 회장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정주영 6남 정몽준 (현대중공업 그룹)

1. 개요

 

6남 정몽준 (1951 ~ ) 현대중공업 그룹 대주주, 아산 사회복지재단 이사장 / 妻 김영명 (1956 ~ )

→1남 정기선 (1982 ~ ) 현대중공업 부사장 겸 현대 글로벌 서비스 대표이사 부사장 / 妻 정현선 (1994 ~ )

→1녀 정남이 (1983 ~ ) 아산 나눔 재단 상임이사 / 夫 서승범 (1975 ~ )

→2녀 정선이 (1986 ~ ) / 夫 백종현 (1983 ~)

→2남 정예선 (1996 ~ )

 

현대중공업 그룹을 물려받았다. 정주영의 정치적 야망을 물려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정몽준은 1988년 정계에 진출하기 전까지 현대중공업 회장을 맡았다가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현재까지 별다른 그룹 내 직함 없이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물러났다. 하지만 최측근을 통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장남 정기선이 아버지를 이어 그룹 전체 승계를 위한 전방위적 움직임에 나서고 있다.

정몽준은 한국의 정치인, 기업인, 축구행정가다.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 회장의 6남으로, 現 현대중공업 그룹의 총수.(현대중공업은 전문 경영인이 경영하고 있다. 정계 입문 전인 1988년까지는 정몽준이 현대중공업 회장이었다. 이 당시는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되기 전이다.)

 

그리고 전직 7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현대중공업 공장이 있던 울산 동구에서 5번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13·14·15·16·17대)됐다가, 18대와 19대 총선 땐 서울 동작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2014년 서울시장선거에 나갔다 낙선하였고 2016년 20대 총선엔 출마하지 않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당도 탈당하면서 사실상 정계은퇴.)

 

또한 축구행정가로서 한국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FIFA 부회장(4선, 현 명예 부회장), 대한 축구협회장, 한국 프로축구연맹 총재를 역임했다.

 

여담으로 과거 언론 등에서 국회의원들의 재산 조사를 하면 항상 정몽준의 조 단위의 재산 때문에 평균치가 급격히 오르는 탓에 자료가 곡해될 수 있어서, 그는 빼고 조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2. 정치인이 되기 전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장충초등학교,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해 나름 학력 콤플렉스를 가졌던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은, 정몽준이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가자 다른 재벌 총수들을 만나면 그렇게 아들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정주영의 다른 자녀들도 학력이 준수한 편이다. ●한양공대: 정몽구(차남), 정몽근(3남). ●연세대학교: 정몽필(장남, 당시엔 연희대학교), 정몽헌(5남), 정몽일(8남). ●중앙대학교: 정몽우(4남). 정몽윤(7남)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를 나왔다. 다만 연고대를 포함한 사립대는 당시 재벌들이 운동부나 해외 거주 특례 등으로 편법적으로 입학하는 사례가 있었고, 해외 대학의 경우는 기여입학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대는 2000년대 이전에는 빼도 박도 못하고 공부로 입학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재벌 2세 중에서도 서울대를 나온 경우는 정말 인정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정몽준과 삼성가의 이재용. 실제로 재벌 2세, 3세들은 국내에서 대학을 나온 경우 연고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흔하지만, 반면 서울대를 나온 경우는 무척 드물다.)

 

 

그 덕분인지 형제들 중에서 가장 빠른 31세에 사장이 되는 기염을 토했고, 부친인 정주영과 술집에 가서 자신이 외상으로 달아놓은 술값을 그 천하의 정주영한테 덤터기 씌우는 용자 짓도 했다고 한다. 정주영 본인도 어이없어했다고.

 

(다만 정몽준은 정실인 변중석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엔 찬밥대우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정몽준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하 고부턴 대우가 달라졌다는 카더라 성 후문.)

 

 

정주영은 정몽준이 머리가 좋다 보니 현대그룹을 물려줄 생각도 해봤으나 정몽준 본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치자금 겸 현대중공업과 산하 계열사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정치란 게 정치자금이 있어야 돌아가는 법이기도 하고, 본인도 대선에 출마한 적이 있으니 아들의 꿈을 어느정도 이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을 아들이 이루어주길 바랬던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못 이뤘다. 대신 현대건설에 일반 사원으로 입사하여 사장까지 승진했던 샐러리맨이 대통령이 되었다.

 

2.1. 병역

 

정치인·재벌가 사람들 중 병역문제에서 깨끗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대학 재학중 대한민국 육군 ROTC로 입단, 후보생 시절 동기들의 단가방을 자비로 다 갈아치우기도 했다.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사실 범 현대가에는 남자는 대체로 꼼수쓰지 않고 군대는 가는 전통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전통은 정주영 때문에 생겼다. 뭔 소린고 하면, 정주영은 평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고 그래서 실제 대선 출마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회창의 예가 있듯이 자식들의 병역에 문제가 발생하면 대선에 출마해서 당선되기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전 국민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예비역 병장에 장교 및 부사관 출신이니... 때문에 정주영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서 일족들의 병역부터 제대로 관리해왔다는 후문.

 

(예외적 케이스로 정의선은 담낭 절제술로 면제 판정을 받우(어머니가 담낭암으로 사망하여 가족력이 있다.) 바람에 현재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앞에서는 병역 관련 얘기를 꺼내지 않는게 일종의 불문율이라고 한다.)

 

 

정몽준의 장남(정기선)도 육군 학군사관(ROTC)으로 병역을 마쳤으며, 1군단 특공대에서 소대장과 연대 작전과장으로 군생활을 마쳤다. 당시 아들이 복무하는 특공대를 방문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피자 한 판 & 치킨 한 마리씩을 돌렸으며, 낙후한 시설을 보고 사비로 군 시설을 개선해주고 싶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후자는 당시 지휘관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아마 선거법상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다

 

3.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3.1. 2002년 이전까지

 

현대중공업 회장을 하고 있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90년 3당합당을 전후로 해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지만, 1992년 초에 아버지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당연히 민자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합류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재선되었고 당 대변인, 정책위원회 의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대선 직전 초원복집 사건을 기획했으나, 지역감정 역풍으로 아버지의 득표를 오히려 까먹었고 본인은 대선 후 범인도피죄로 기소되는 흑역사를 찍기도 했다(...). 그나마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아 의원직 상실은 면했다.

 

통일국민당이 와해된 후로는 당적을 갖지 않고 2007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무소속, 1인정당 소속으로 독고다이 행보를 보인다. 그래도 1998년 정권이 교체된 후로는,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울산에서 기반을 다진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여당 쪽의 손을 들어주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14대 대선 후 여당에 찍혀 현대그룹이 강도 높은 세무조사, 대출 제한 등 정치보복이라 의심할만한 사태를 겪자 현대가는 DJ에게 줄을 댔고, 실제 DJ가 대통령이 되자 남북 화해 무드 속에서 정주영 회장이 북에 소떼 방문도 하는 등 제법 득을 봤다는 것이 세간의 중평이다.)

 

3.2. 화려했던 리즈시절 그리고...?

 

상기했듯 정몽준은 국회의원까진 몰라도 대통령과는 인연이 멀어보였는데, 2002년 그에게 천운이 다가온다. 바로 한일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그가 큰 힘을 썼기 때문. 게다가 이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기적적인 4강에 오르자, 축구협회장으로서 한국 축구를 적극 후원한 그의 입지 역시 급격히 올라가 몇개월만에 유력 대선 후보에까지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한때 여론조사에선 당시 유력대권주자였던 노무현을 제치고 이회창을 위협하기도 했을 정도.

 

 

이에 정몽준은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국민통합21을 창당한다. 처음에는 당시 이회창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다 자신처럼 붕 떠버린 동병상련 박근혜와 힘을 합쳐보려 했으나[17], 식사 자리에서 박근혜로부터 다짜고짜 김재규를 변호한 변호사 강신옥를 내치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에 결국 측근이던 강신옥이 곁을 떠났으나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것도 있고 애초에 정몽준과 박근혜는 성향이나 결이 좀 달랐던 것도 있어서 박근혜는 한나라당이 콜하자 다시 복당해 버린다

 

 

그 후 후단협의 압박 등으로 새천년민주당 후보 노무현과 여론조사 방식에 따른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으나, 여론조사 결과 간발의 차로 패하고 만다. 단일화 후 이에 승복하여 대선에서 노무현 선거운동에 나섰으나, 선거일 전날 밤 지지를 철회했다.지지 철회 이유로는 외교 정책상의 이견, 차기대권주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소외감 등 감정 문제 등이 거론된다.

 

 

김민석의 증언에 따르면 기존 단일화 합의는 모든 유세장에 단일후보 둘만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동 유세에서 당 관계자의 실수로 노 후보 진영 인물 대다수가 단상에 오르게 된다. 김민석은 사고를 직감했고, 종로에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본인이 커버를 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종로 유세에서 서갑원의 지시로 또 다시 모든 인물이 단상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직후 정몽준 진영에서 어떤 사람이 '차기는 정몽준!'이라 적힌 피켓을 보이자 노무현이 '너무 속도위반하지 말자. 정동영, 추미애 최고위원도 있다고 한 것이 결정적으로 정몽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이후 이동하게 된 냉면집에서 정몽준은 화가 나 소주만 마시고 있고 당직자들은 가만히 냉면만 먹는 분위기 속에서 정몽준 측근인 김흥국이 열이 뻗쳐 막 떠드는 상황이 벌어진다.그 후 정몽준은 즉시 지지철회 오더를 내린다. 그리고 이 날 밤 집에 찾아온 노무현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밖에 세워두다 돌려보내면서 정몽준과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하지만, 선거 결과 노무현이 극적으로 당선되면서, 결과적으로 하루만 더 참았으면 얻을 수 있었던 국무총리직을 스스로 날려먹은 셈이 되었고, 이후 뒤통수 이미지까지 씌워지면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다음 대선은 한나라당이 낙승하는 선거였으니 정몽준이 차기가 되었더라도 힘들었을 수 있지만, 미래야 바꾸기 나름이고 실제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하며 입지를 다졌다면 차차기는 노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참여정부 총리를 지낸 고건 총리가 막판까지 유력 대선주자로 평가받은 것을 보면.. 어쨌든 서로 간의 감정을 정산하는 문제는 이긴 뒤에 해도 늦지 않은데 굳이 선거 전날에 판를 깨야 되겠냐는 비판이 거세지며 정몽준은 뭔가 쪼잔한(...) 인간처럼 되어버려 향후 정계 입지도 확 줄어버리고 만다. 여기엔 후술되어있듯 버스비 발언 등 본인의 실언도 한몫했다.

 

 

이렇게 월드컵으로 얻은 정치적 위상 및 입지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흩어보낸 후, 국민통합21을 이끌고 17대 총선에 나섰으나 본인 1명만 당선된다. 결국 국민통합21을 해체하고 다시 무소속으로 있다가, 2007년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3.3. 한나라당 입당 이후

 

한나라당 입당 후엔 계파색이 뚜렷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친이계로[분류되었고,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선 기존 지역구인 울산 동구를 측근인 안효대에게 넘기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당 거물이었던 정동영을 누르고 당선되었다.동작구을 지역구는 당시 최대 격전지로 보도되었으나 투표함을 까고 보니 생각보다 쉽게 정몽준이 승리했다.

 

 

2008년 8월에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2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고, 2010년 박희태 대표가 사퇴하면서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직도 승계하였다. 다만 이 시기 후술된 버스비 사건으로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대권 욕심도 여전히 있었는지 당내 유력 대선 주자인 박근혜와 대립했는데, 박근혜가 2011년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기고문에 대해 "내가 잘 아는 교수가 대필한 것이다"라고 깎아내리거나, "식자층에선 박 위원장이 대통령이 되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 있다고 걱정한다", "당이 유신(독재)의 그림자에 덮여있다" 등 독설에 가까운 멘트를 날려 친박 세력에 제대로 찍히기도 했다. 허나 당시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경선에서도 큰 바람은 일으키지 못하고 물러나고 만다.

 

 

2012년 19대 총선에선 동작 을에 출마해 당선되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상대 후보는 17대 국회 당시에 이 지역구의 의원이었던 현대자동차 사장/현대카드 회장 출신의 이계안 전 의원이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나섰다. 당초에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마땅한 후보가 없던 새누리당의 강력한 요청과 함께 당시 안철수의 신당 창당 활동으로 야당 표가 갈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입장을 바꿨다. 같은 당의 김황식, 이혜훈 후보와 경선을 치러 5월 13일에 최종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후보 등록과 함께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현직 시장 박원순에게 큰 표차로 참패하면서 낙선하고 만다. 당시 모든 선거는 민주당의 압승이었고, 정몽준도 피해갈 수 없었다. 정치 인생 최초의 낙선이라 더더욱 뼈 아팠을 듯 하다. 더군다나 대선을 제외하고 보면 한국에서 가장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직 중 하나인 서울시장 선거였으니..

 

 

패배한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후보자 토론에서의 발언 문제, 그리고 당 차원에서 너무나 어설펐던 네거티브 전략 등이 있다. 박원순이 포스터에서 정면이 아닌 측면 사진을 쓴 건 떳떳하지 못해서라고 하는가 하면, 박원순 부인 잠적설을 꺼내는 등, 안하느니만 못한 무리수같은 네거티브였다. 자세한 내용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화젯거리 문서 참조.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건 아래의 논란에서도 설명하는 가족들의 팀킬이었을 것이다.

 

 

2016년 20대 총선에는 아예 불출마했다. 대신 이런 글을 블로그에 올려 안효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나, 안효대는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울산연합 계파인 김종훈에게 패배하여 낙선하고 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분당 사태까지 벌어진 2016년 12월 29일 새누리당을 전격 탈당했다. 개혁보수신당으로의 합류는 부인했으며, 이후 별다른 정치 활동이 없는 상황. 이제는 나이도 70이 다 되어가는 만큼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박원순 사망 당시 조문을 하면서 오랜만에 정치뉴스에 올라오기도 했다.

 

4. 국제정치학 박사

 

1993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SAIS)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본인의 프로필에도 '국제정치학 박사'임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본인의 주도로 설립된 아산정책연구원은 국내 유수의 국제정치 연구기관, 싱크탱크로 성장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핵무장론이 국내외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단 정몽준의 박사 논문 주제인 "일본의 정부-기업간 관계: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원제: The government-business relationship of Japan : a case study of the Japanese automobile industry)는 외교, 국제분쟁과 같은 일반적인 국제정치보다는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비교정치, 정치경제 부문에 더 가깝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국제정치는 이런 지역정치학 역시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납득의 여지는 있는 편이다.

 

 

전공이 국제정치학인데다가 오랜 국회의원 경력과 피파부회장 경력 때문에 글로벌인맥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 헨리 키신저와 매우가깝고 마이클 블룸버그와도 교분이 있다. 조바이든, 푸틴, 시진핑을 위시해서 전세계 거물들과도 교류한다. 한국사에 이 정도 인맥이 또 있을까.... 2011년에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와의 소통』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쓴 책이 아니고 대담집이다. 키신저를 포함해서 마이클 샌델, 기 소르망, 도널드 럼스펠드 같은 유명 인물들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했다. 헤리티지재단 회장 에드윈 풀너도 있다.

 

 

국제적 활동의 베이스는 아산정책연구원이다. 매년 아산플래넘이라는 컨퍼런스를 개최하는데 거의 800명 가까운 국내외 인사들이 참여한다. 단순히 국제 인맥교류가 아니고 콘텐츠 기반으로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비중을 확보하는데 기여한다고 보면 된다.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이 이사장인데 자문위원단 면면이 화려하다. 전 세계은행 총재 폴 월포위츠, 전 브루킹스연구소 소장 마이클 아마코스트도 있다.

 

5. 재산

 

2015년

 

현역 국회의원 당시, 재산 1위를 항상 고수했다. 알려진 재산 총액은 2조원대다. 대선 출마 경력까지 생각하면 사실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 바로 아래(?)에 있는 김세연(정치인), 안철수, 박덕흠도 어디가도 꿀리지 않을 자산가지만 정몽준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워낙 혼자서 튀는 수치라서 국회의원들의 평균 재산액이 언론에 보도될 때, 정몽준 재산은 반드시 빼고 평균을 계산하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다. 정몽준을 제외한 국회의원 총 재산 평균은 대충 30억 원 정도 하는데, 정몽준을 평균에 포함시키면 거의 100억원으로 뻥튀기(!)된다. 2조 원을 국회의원 총 인원인 대략 300으로 나누면 67억 원이다. 그러니까 다른 국회의원 재산을 다 합쳐도 정몽준의 반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재산 때문에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공직자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와 주식 및 해당 기업이 전혀 무관함을 입증하지 못하면 관련 주식을 비롯한 자산을 3,000만원만 남긴 채 모두 처분하거나 금융기관에 신탁 처분해야 한다. 이를 주식백지신탁제도라고 한다. 처분이라 해서 나머지 재산을 버리라는 건 아니고 주식을 매각해서 현금으로 바꾸거나 직무와 관련없는 분야의 주식으로 바꾸거나 하면 된다만, 정몽준이 가진 정도의 자산이면 변환 과정의 번거로움과 손실을 고려했을 때 그냥 안하는 게 낫다는 것. 그래서 현대중공업과 무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박사 전공 국제정치학도 살릴 수 있는 외교, 통일 분야에서나 활동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역 국회의원이던 시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뇌물 받을 일이 없다'는 평가 내지는 농담이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사람들 사이에 종종 나돌았다.

 

참고로 재산 꼴찌는 성완종으로 나와있는데, 성완종 게이트 당시에 그가 전달한 뇌물의 액수나 경남기업 회장을 지냈다는 점 등을 생각해보면 순 뻥이다.


6. 국내 축구계의 초거물


 

 

한국 축구 역사에서 정몽준의 공로는 그야말로 지대하다. 1993년부터 2009년까지 16년간 47~50대 대한축구협회장을 역임했다.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전 당시 한국은 일본보다 5년이나 늦게 유치 준비를 시작한데다, 당시 FIFA 회장 주앙 아벨란제는 대놓고 일빠였다. 하지만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정몽준은 치열한 축구 외교전을 벌였고 현대그룹의 재력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인 디에고 마라도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등의 성과를 쌓아가며 기적적으로 공동개최안을 성사시킨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더 나아가 2002년 자체를 생각해보면 태극전사가 이룬 “4강 신화”가 대부분 먼저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홀로 고군분투하여 공동개최를 이끌어 낸 정몽준의 “원맨쇼”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월드컵의 감동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그 후의 한국 축구의 비약적인 발전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단 월드컵 개최에 성공한 것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계의 인프라 개선에 자신의 사비까지 써가며 앞장섰고, 그 결과 축구 선진국 못지않은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계속 조별리그 탈락만 전전하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에서는 원정 최초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룬다.

 

 

또 1994년~98년 동안 한국프로축구연맹 1~ 4대 총재를 맡았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일선에서 물러난 상황에서도 한국 축구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몽준과 현대家의 영향력이 없다면 한국 축구계는 지금처럼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이는 정치인 정몽준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명백하게 인정하는 사실이다. 울산 현대 대주주로서 꾸준히 국가대표와 해외파를 배출하는 강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2011년부터 2016년까지는 그룹 산하 현대오일뱅크가 K리그 타이틀 스폰서로 연간 35억원씩 후원해왔다.

 

 

 

 

사진은 AFC 회장 선거에서 정몽준 지지파가 떨어졌을 당시 사진으로 정몽준의 침울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미소짓는 제프 블라터. 자세한 내역은 항목 참조.

 

 

FIFA 회장이나 AFC 회장직도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제프 블라터와 반목했었고 반블라터파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을 지지하며 그의 FIFA 회장 선거를 열심히 도왔으나 완패를 당했고, 이후 요한손이 블라터 지지를 얻은 미셸 플라티니에게 UEFA 회장 재선에 실패하면서 피파 내에서 블라터파에게 많은 견제를 받아야 했다. 결국 2011년 정몽준은 FIFA 부회장 5선을 노렸으나 블라터의 지지를 받은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에게 패하여 떨어지고 명예 부회장이 됐다. 하지만 말 그대로 명예직이라 아무런 권한이 없기에 더 이상 FIFA에선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진 못한다.

 

 

그의 몰락은 한국 축구 국제 외교력의 몰락이라는 말도 있으나 김운용과 마찬가지로 후계자를 전혀 만들지 않고 자신의 집권에만 신경썼다는 지적도 있다.

 

 

주앙 아벨란제 전 FIFA 회장의 심복이 바로 제프 블라터였다. 덕분에 아벨란제가 물러난 뒤로 터진 그의 비리혐의를 죄다 블라터가 쉴드쳐주거나 덮어버려서 그 어떤 수사도 조사도 이뤄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IOC 위원장 자크 로게는 전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심복으로 역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두 조직 부회장, 부위원장인 정몽준, 김운용은 전혀 후계자 및 지지 후임자가 전무했다.

 

 

반면 블라터에 맞서다가 지금은 야인이 된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은 후임을 여럿 둬서 이들이 현재도 UEFA 고위직으로 남아서 플라티니의 경쟁 후보로 남아있다. 그래서 블라터와 플라티니가 요한손 전회장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이들이 똑같이 막아버린 거와 달리 김운용, 정몽준은 그러질 못했다. 파벌까지 뿌리뽑고 IOC에서 어떤 명예직도 없고 축출당한 김운용과 달리 그나마 정몽준이야 비리적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기에 명예부회장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걸 내주긴 했지만.

 

 

그의 몰락에 대하여 IOC가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2012 런던 올림픽까진 23살 이하 선수로 3명에 한하여 축구 와일드카드가 이뤄지고 있다. 이후론 21살 이하 선수로 자격을 제한하거나 아예 21살 이하 축구 대회를 올림픽 축구로 대처하고 블라터 뜻대로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부터는 와일드카드 및 올림픽 축구 제한이 바꿔질 예정이라는 루머도 있으나 아직까지 이에 관련되어 확정된 사안은 없다. 결국 2016 올림픽도 와일드 카드 제도가 유지되었고, 2020 도쿄 올림픽도 별 말이 없다.

 

 

사실 한국에선 경악할 일이겠지만, U-20 청소년 월드컵은 유럽 축구 리그에서 외면하는 게 크다. 유달리 아프리카에서 청소년 축구와 올림픽 축구 성적이 좋은 이유도 유럽에서 외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많다. 사실 경기 수익도 월드컵에 비하면 없는 수준이며, 우승 상금도 없는 대회인지라 올림픽 축구와 병합해도 FIFA에선 별다른 피해도 없다. 그저 유망주 발굴이라는 요소로 보면 되니까. 게다가 21살 이하로 와일드 카드를 줄이자면 20살 이하 축구대회와 차이가 없고 유망주 및 선수 혹사라는 비판 및 문제도 없앤다고 여기기 때문에 90년대부터 꾸준히 FIFA에서 논의하던 사항이다.

 

 

2018 월드컵 개최지 투표에서 한국은 영국에 투표하고 영국은 2022 월드컵에서 한국에 표를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나왔다. 그리곤 영국측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항의하자 "이것이 축구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그러나 제프 블래터가 회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FIFA 회장 출마여부를 국제 축구 인사계들을 만나 경청한 후 좀 더 차분히 결정할 것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6월말 들어서 FIFA 회장에 도전한다고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몽준의 FIFA 회장 당선에 대해서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아프리카 및 아시아 쪽 상당수 FIFA 임원들이 블라터를 지지하며, 다른 경쟁자들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아시아 축구 연맹을 좌우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아랍 측에서도 정몽준을 견제해오는 게 사실. 위에 서술한 대로 정몽준을 그동안 FIFA 부회장이나 AFC에서도 견제하고자 블라터가 지지하던 게 아랍 측 인사였듯이. 게다가 블라터 반대파가 가장 많은 유럽 쪽도 유럽파 후보를 지지할게 뻔하다.

 

 

2015년 7월 23일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8월에 공식 출마 선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선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 않지만, 출마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8월 들어서 강력하게 어필하고 개혁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후보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 회장을 블래터 전 국제축구연맹 회장과 아들과 아버지라고 비난하면서 나서고 있다. 문제는 2015년 들어서 터진 현대중공업 비리 문제로 반대 후보들이 기업 하나 감당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FIFA 개혁을 외치냐고 맞설 거리를 만들어버린 셈. 게다가 더더욱 문제는 AFC 안에서조차 정몽준 지지세는 그리 없다는 점 사실상 정몽준이 승리보단 정치적인 홍보로 이미지를 남기고자 크게 나선다는 반응이다. 이런 가운데 정몽준 사촌동생인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지지를 표명하며 FIFA 내에서 정몽준 입지를 보여주고자 2005년 8월 이후 끊긴 남북친선 평화축구 부활을 부르짖었으나...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서부전선 포격 사건이 터지는 통에 이건 가망이 없게 되었다.

 

 

정몽준 본인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아는지 2015년 9월, AFC가 블래터의 똘마니(...)라는 듯한 발언을 하며 하고픈 말을 다했다. 당연히 AFC에서는 분노했다.

 

 

시사저널에서도 사실상 정몽준이 회장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기사로 분석한 바 있다. 유럽에서는 플라티니를 비난하면서도 사실상 그가 된거나 다름없다고 본다고 독일 및 여러 유럽 나라 언론을 보도하고, 남미, 아프리카는 플라티니 절대 지지세, 북중미도 미국 빼고 플라티니 지지세, 오세아니아랑 아시아도 마찬가지라면서...정몽준이 안된다는 글은 없으나 해외 5대륙 반응, 외신 보도로 보면 딱히 가망이 없어보인다.

 

 

여기에 FIFA 윤리위원회에서 2022 월드컵 대회 유치과정에서 한국 유치위원회의 국제축구발전기금 조성안 계획을 각국 집행위원들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15년, 윤리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로 4년을 구형받았다. 김 이에 한국의 법률회사인 '김앤장'이 정몽준을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는 기사가 떴다. 다만 정몽준 자신은 이에 대해 자신이 개혁세력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꿈보다 해몽'급 해석을 시전했다. 결국 2015년 10월 8일에 FIFA로부터 6년간의 자격정지를 받았다.

 

 

이에 항소했지만 기각당해 사실상 FIFA 회장에 도전조차 못하게 되었다. 사실 FIFA 회장은 너무나도 가망이 없었고, 차라리 부회장 선거를 나가고 강력한 회장 후보를 지지했다면 어떨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물론 플라티니가 너무나도 굳세 다른 후보로도 도저히 가망이 없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전에 요한손을 이렇게 밀어줬다가 참패하고 자신도 부회장에서 오래가지 못했던 일이 있었기에 이것도 어렵다는 분석도 많았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후 플라티니와 블래터도 정몽준과 같이 징계 및 처벌을 받아 FIFA에서 사실상 매장되었다.그리고 FIFA 회장은 잔니 인판티노가 새롭게 취임했다.

 

 

정몽준은 2017년 3월 항소위원회로부터 결정 이유를 통보받고 바로 4월에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FIFA를 제소했다. CAS는 2018년 2월 정몽준에 대한 FIFA의 제재를 대부분 무효로 하는 판정을 내렸다. 징계가 취소됐다. 그의 징계 취소 후 첫 행보는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1차전 한국-스웨덴 경기 관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FIFA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으며, 국내에서도 정치인으로만 활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 축구계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선 정몽준 본인이 울산 현대 대주주이며, 그의 조카 정의선이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다. 사촌동생 정몽규는 대한축구협회장 겸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다.

 


7. 사회복지활동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다. 이 재단은 1977년에 정주영이 현대건설 주식 50%를 내놓아 만든 것인데 세간에서는 서울아산병원재단으로 통한다. 당시 현대건설은 석유공사 다음으로 큰 국내 2위 기업이었다. 그 지분 50%는 거액이다. 정부 복지 예산의 3배쯤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산재단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서울아산병원이다. 미국 뉴스위크가 한국 1위로 평가한 적도 있을 정도로 수위권의 대형병원이다. 3개 과목에서는 글로벌 4~7위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 병원은 대학이든 재단이든 별 비중을 두지 않는 곳인데, 아산병원은 정몽준이 지원을 잘해서 의사들의 연구, 진료 환경도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2011년에 정주영 10주기 기념으로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다. 정몽준이 2천억 원을 냈고 범현대 회사들이 낸 기금을 합쳐서 2021년 현재 5,870억 원이다. 주로 청년창업 지원 사업을 한다.

 

물론 이 공익재단들은 현대중공업지주를 비롯한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경영승계에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않다


8. 가족 관계


 

부인은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딸인 김영명이다.

 

 

장남 정기선은 1982년생으로 대일외고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 MBA를 마친 뒤 2013년부터 현대중공업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2019년 기준 현대중공업 부사장이다. 사실상 현대중공업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경영 능력이나 성격은 소탈해서 평이 꽤 좋은 편이라고 한다.

 


9. 선거 이력


 


10. 소속 정당


 


정주영 7남 정몽윤 (현대해상)

 

정주영 7남 정몽윤 (현대해상) 프로필 나이 직업 현직 학력 부모 배우자 자녀 

출생
1955년 3월 18일 (66세)
직업
기업인
현직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회장
학력
중앙고등학교 (졸업)
센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경영학 / 학사)
센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부모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형제자매
이복형 정몽필
형 정몽구,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누나 정경희
이복남동생 정몽일
이복여동생 정정인, 정정임
배우자
김혜영
자녀
장녀 정정이(1984 ~ )


1. 개요


7남 정몽윤 (1955 ~ ) 현대해상 회장 / 妻 김혜영 (1960 ~ )

→ 1녀 정정이 (1984 ~ ) / 夫 김현강 (1979 ~ )

→ 1남 정경선 (1986 ~ ) 루트임팩트 대표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2. 생애


 

1955년 3월 18일, 서울특별시에서 정주영의 7남으로 태어났다. 여담이지만 바로 위에 형 정몽준과 동생 정몽일과 함께 다른 형제들과 좀 다르게 생겨 생모가 따로 있는게 아니냐는 루머가 나돌었다. 정몽준과 정몽일의 생모가 다른걸 보면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중앙고등학교(64회)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대학원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후 현대해상화재보험을 물려받아 현재까지 경영 중이다.

 

한때 어느 네티즌이 그의 지갑을 주웠다고 인증 글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3. 야빠


 

축빠가 많은 범현대가 인사(바로 위의 형 정몽준은 FIFA 부회장까지 지낸 축구계의 거물 중 거물이고 사촌동생인 정몽규는 현직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다. 조카인 정의선은 KIA 타이거즈의 구단주이기도 하지만 사실 전북 현대 모터스의 운영에 더 관심이 많은 편이다. 여기에 아버지 정주영도 프로야구단보다는 프로축구단을 먼저 만들었다)

 

중에서 보기 드문 야구광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모교인 중앙고의 경기를 빠짐없이 관람하였다고 한다. 현대해상 직장인 야구팀은 정 회장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사회인 야구에서는 상당한 강팀으로 알려져 있는데, 초기에는 직접 1루수로 뛰기도 했다고.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사재를 털어 협회를 헌신적으로 지원하여,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및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등 큰 성과를 올렸다. 정몽윤의 전폭적인 지원과 KBO와의 원활한 협조로 야구협회가 가장 잘 운영되었던 시기였는데,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낀 아마추어 원로 야구인들이 사사건건 딴죽을 걸면서 2000년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물러나면서도 30억원을 협회 기금으로 출연하면서 “알뜰한 운영으로 기금을 100억원까지 늘리면 협회가 자립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라고 금융인다운 말을 남겼다.

 

 

현대 유니콘스 구단주였던 형 정몽헌 회장이 투신자살하고 유니콘스의 모기업인 현대전자의 경영권이 채권단으로 넘어가면서 구단이 운영난을 겪고 있을 때 꾸준히 구단 운영비를 지원하면서 "아무 걱정하지 말고 평소 하던대로 훈련에 전념하라"고 선수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그룹 등 다른 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이 지원을 차례차례 끊고 형수이자 정몽헌 구단주의 미망인인 현정은 회장마저도 유니콘스의 몰락을 나몰라라 했을 때도 유일하다시피 현대해상 브랜드의 헬멧광고를 통해 15억을 지원했다.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된 뒤 넥센 히어로즈로 재창단한 후에도 헬멧에 '하이카' 광고를 계속 집행해 왔기에 현장이나 팬덤에서는 단순 스폰서십 이상의 의미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장석의 전횡이 드러나고 스폰서들의 지원비도 빼돌려쓴게 드러나면서 손을 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17 시즌부터는 넥센 대신 조카가 구단주로 있는 범현대가 프로야구단 KIA 타이거즈에 광고를 집행하고 있다.

 

 

제19~21대 KBO 총재였던 구본능 총재가 2017년 말 임기가 끝나면 퇴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차기 KBO 총재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나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새 KBO 총재로 추대되었다.

 

 

여담으로 심수창이 말하길 목동 야구장 내 넥센 락커룸에 정몽윤이 들어오자 심수창이 “아저씨 여기 들어오시면 안 돼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심수창에게 명함을 건네줬는데, 심수창은 그걸 “정.몽.윤” 이라며 한 글자씩 읽었다고... 게다가 오주원은 목동구장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정몽윤에게 “야! 빨리 나와!” 라며 문을 두들겼다고 한다. 물론 오주원은 자신이 두들겨대던 화장실칸에서 나오는 정몽윤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정수리가 화장실 바닥에 닿더라고(...)


4. 가족 관계


부국석면 회장의 딸인 김혜영과 결혼해 슬하 1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녀 정정이(1984년 7월 29일생)와 장남 정경선(1986년 8월 28일생)이 그들이다. 장녀는 2009년 결혼했고, 장남인 정경선은 아직 미혼이다.


5. 경력


1982. 현대종합상사 부장

 

1985. 현대해상화재보험 사장

 

1996.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현대할부금융 주식회사 (現 현대캐피탈) 대표이사 회장

 

1997.~ 2000. 대한야구협회 회장

 

1998. 현대해상화재보험 고문

 

2001.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1986.~ (현) 주한 요르단 명예영사

 

2004.~ (현) 현대해상화재보험 이사회 의장

 


정주영 8남 정몽일


1. 개요


출생
1959년 3월 25일 (62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본관
하동 정씨
학력
중앙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경영학 / 학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직업
기업인
현직
현대미래로그룹 회장
부모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형제자매
이복형 정몽필, 정몽구,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이복누나 정경희
이복여동생 정정인, 정정임
배우자
권준희[2]
자녀
장남 정현선(1989 ~ )
장녀 정문이(1991 ~ )

 

 

 

8남 정몽일 (1959 ~ ) 현대엠파트너스 회장 / 妻 권준희 (1962 ~ )

→1남 정현선 (1989 ~ ) 현대엠파트너스 상무

→1녀 정문이 (1991 ~ )

8남 정몽일

현대울산종합금융을 물려받았으나 IMF 과정에서 파산했다. 이후 현대중공업그룹 내 금융 계열사를 경영하다가 조선업 위기로 인해 또 물러났다. 이후, 범현대가의 지원을 통해 현대미래로를 설립하고 다시 독립했다.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미래로그룹 회장.

2. 생애

1959년 3월 25일, 서울특별시에서 정주영의 8남으로 태어났다. 여담으로 정몽준, 정몽윤과 함께 다른 형제들과 좀 다르게 생겨 생모가 따로 있는게 아니냐는 루머가 나돌었다. 그리고 1993년 대선 때,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 대선 출마 선언 이후 어느 토론회에서 "정몽일은 변중석의 소생이 아니다"고 밝혀서 생모가 따로 있음이 확인됐다.

 

중앙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가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귀국해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현대해상을 승계받은 바로 윗형 정몽윤과 마찬가지로, 금융 계열사인 현대울산종합금융을 물려받았으나 IMF시기 동양종합금융에 합병되어 정리되었다. 이후 형이자 현대중공업 오너인 정몽준의 배려로 금융계열사인 현대기업금융과 현대기술투자의 회장직을 겸했으며, 현대선물까지 3사의 경영을 총괄해 왔다. 그러나 조선업 위기가 심화되자 2015년 금융계열사 재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경영애서 물러나 야인(野人)이 되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그룹이 추진하던 하이투자증권-현대선물의 매각이 무산된 후, 범현대가의 지원하에 현대미래로를 설립하고, 현대기업금융을 인수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16.7월말 현대중공업의 현대기업금융 지분 72.1%중 62.2%를 매각하면서, 지주회사법상 경영권행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분인 31%를 16.7.20 설립된 현대미래로가 인수하고, 나머지는 범현대가에서 나눠서 인수하여 현대미래로를 최대주주로 만들어주었다.

 

또한 16.9월 경에 실시한 현대미래로의 유상증자에 현대종합상사, KCC, 현대산업개발, 현대에이앤아이(현대백화점그룹 계열) 등 범현대가에서 지분인수에 참여하였다. 역시나 정몽일 지분은 30%정도로 추정된다. 역시나 현대종합상사와 마찬가지로 친척 도와주기.


3. 가족 관계


권영찬 현대파이낸스 회장의 딸 권준희와 결혼해 아들 정현선(1989년생), 딸 정문이(1991년생)를 두었다. 딸 정문이는 지난 2012년 대마초를 피운 혐의를 시인했으며, 아들 정현선도 2019년에 마약구매 혐의로 입건되었다. 사실상 뽕쟁이 자식농사는 실패한 셈이다.


4. 경력


1982년 현대건설 입사

1990년 현대종합상사 재정담당 이사대우

1990년 국제종합금융

1991년 국제종합금융 전무이사

1992년 국제종합금융 국제금융,국제투자,리스담당 부사장

1994년 국제종합금융에서 현대종합금융으로 사명 변경

1994년 현대종합금융 대표이사사장

1998년 현대종합금융 대표이사회장

1998년 현대종합금융 대표이사회장(유임)

1999년 현대파이낸스 대표이사회장

1999년 현대파이낸스가 현대기업금융으로 상호 변경

1999년 (현)현대기업금융 대표이사회장, (현)현대기술투자 회장

 

 


정주영 2녀 정정인


 

2녀 정정인 (1979 ~

할리우드에서 그레이스 정이라는 이름으로 단역 배우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2녀인 그레이스 정(34)은 할리우드에서 배우를 꿈꾸고 있다. 비록 단역이지만 여러 작품에 출연하면서 최근에는 조금씩 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 그레이스의 어머니인 김경희 씨에 따르면 그는 현재 차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김 씨가 사기 등으로 재산 관리에 실패하면서 집안 전체가 망해 미국에 있던 집까지 경매로 넘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김 씨는 “LA가 얼마나 무서운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정주영 3녀 정정임


3녀 정정임 (1981 ~ )

당시 정주영의 나이 65세였다. 엘리자베스 정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살며 토요타 미국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3녀이자 막내딸인 엘리자베스 정(32)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차의 최대 경쟁회사인 도요타의 미국 광고를 대행하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로 집이 없어지면서 친구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한다. 김 씨는 엘리자베스가 현대차의 경쟁사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현대에서 일하고 싶어도 못한다”며 “(오빠들이) 여동생을 무심하게 내던진 셈”이라고 주장했다.


정주영 동생 정인영 (한라그룹)


.

2남 정인영 (1920 ~ 2006) 한라그룹 명예회장 / 妻 김월계 (1923 ~ 2003)

→ 1녀 정형숙 (1951 ~ 1974)

→1남 정몽국 (1953 ~ ) 엠티인더스트리 회장 / 妻 이광희 (1954 ~ ) 前 한라대학교 총장

→→1녀 정지혜 (1973 ~ )

→→1남 정태선 (1976 ~ ) 前 KCC 상무이사 / 妻 김성민 (1983 ~ )

→→2녀 정사라 (1977 ~ )

→2남 정몽원 (1955 ~ ) 한라그룹 대표이사 회장 / 妻 홍인화 (1955 ~ ) 前 TBC 아나운서

→→1녀 정지연 (1980 ~ ) 만도 미국주재원 / 夫 이윤행


정주영 동생 정순영


3남 정순영 (1922 ~ 2005) 현대시멘트·성우그룹 명예회장 / 妻 박병임 (1928 ~ 2015)

→1녀 정문숙 (1947 ~ ?) 현대시멘트 고문 / 夫 김자응 (1936 ~ 1990)

→→1남 김태호 (1970 ~ )

→1남 정몽선 (1954 ~ ) 前 현대시멘트 회장 / 妻 김미희 (1957 ~ 1993)[57] / 妻 진영심 (1969 ~ )

→→1녀 정재은 (1980 ~ )

→→2녀 정지은 (1983 ~ 1993)

→→1남 정형선 (1986 ~ )

→→3녀 정예린

→2남 정몽석 (1958 ~ ) 현대종합금속 회장 / 妻 안정해 (1961 ~ )

→→1녀 정정은 (1990 ~ )

→→2녀 정주은 (1995 ~ )

→3남 정몽훈 (1959 ~ ) 성우전자 대표이사 회장 / 妻 박지영 (1961 ~ )

→→1남 정광선 (1985 ~ ) 성우효광그룹 이사

→→1녀 정임은 (1986 ~ )

→→2녀 정유은 (1989 ~ )

→→2남 정윤선 (1997 ~ )

→4남 정몽용 (1961 ~ ) 현대성우홀딩스 회장[61][62] / 妻 김수혜 (1963 ~ )[63]

→→1남 정인선 (1990 ~ )

→→2남 정호선 (1994 ~ )

→2녀 정정숙 (1962 ~ ) / 夫 이주환 (1961 ~ ) 한일현대시멘트 대표이사 사장[65]

→→1녀 이재인 (1988 ~ )


정주영 동생 정희영


1녀 정희영 (1925 ~ 2015) / 夫 김영주 (1920 ~ 2010) 서한그룹 명예회장

→1남 김윤수 (1946 ~ ) 서한그룹 회장

→→ 1남 김용석 (1972 ~ ) 서한산업 대표

→→ 2남 김용범 (1975 ~ )

→→3남 김용준 (1977 ~ ) 서한ENP 부사장

→2남 김근수 (1948 ~ ) 후성그룹 회장 / 妻 허경

→→1남 김용민 (1976 ~ ) 후성그룹 부회장

→→→1남 김호중

→→1녀 김나연 (1979 ~ ) 후성HDS 전무

→→2녀 김주연 (1984 ~ )


정주영 동생 정세영 (HDC그룹)


4남 정세영 (1928 ~ 2005) 전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 妻 박영자 (1936 ~ )

→1녀 정숙영 (1959 ~ ) / 夫 노경수 (1954 ~ )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명예교수

→→1녀 노희진 (1983 ~ )

→→1남 노인영 (1984 ~ )

→1남 정몽규 (1962 ~ ) HDC그룹 회장 겸 대한축구협회 회장 겸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 / 妻 줄리앤 김 (1966 ~ ) 호텔HDC 감사

→→1남 정준선 (1992 ~ )

→→2남 정원선 (1994 ~ )

→→3남 정운선 (1998 ~ )

→2녀 정유경 (1970 ~ ) / 夫 김종엽 (1969 ~ ) 인트란스해운 대표

→→1녀 김지수 (2002 ~ )

→→2녀 김연수 (2004 ~ )


정주영 동생 정신영


5남 정신영 (1931 ~ 1962) 동아일보 기자/ 妻 장정자 (1935 ~ ) 서울현대학원 이사장

→1녀 정일경 (1960 ~ ) / 夫 임광수 (1959 ~ )

→1남 정몽혁 (1961 ~ ) 현대코퍼레이션 대표이사 회장 / 妻 이문희 현대SNS 대표

→→1녀 정현이 (1988 ~ )

→→1남 정두선 (1989 ~ ) 현대코퍼레이션 부장

→→2남 정우선 .,(1997 ~ ),,

원래는 현대정유그룹을 정몽혁이 물려받았으나 외환위기 당시 아랍에미리트 IPIC사로부터 5억달러의 대규모 외자유치를 받고 IPIC측에서 경영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고 하여 경영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현대오일뱅크는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인수하였다. 정몽혁은 오일뱅크에서 축출된 이후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인수한 현대코퍼레이션의 회장직에 있다가 이를 인수하여 다시 독립하였다.


정주영 동생 정상영 (KCC그룹)

6남 정상영 (1936 ~ 2021) KCC그룹 명예회장 / 妻 조은주 (1936 ~ )

→1남 정몽진 (1960 ~ ) KCC그룹 회장 / 妻 홍은진 (1964 ~ )

→→1녀 정재림 (1990 ~ ) KCC 이사

→→1남 정명선 (1994 ~ )

→2남 정몽익 (1962 ~ ) KCC글라스 회장 / 妻 최은정 (1963 ~ )

→→1녀 정선우 (1991 ~ )

→→2녀 정수윤 (1995 ~ )

→→1남 정제선 (1998 ~ )

→→2남 정한선 (2007 ~ )

→→3남 정연선 (2011 ~ )

→3남 정몽열 (1964 ~ ) KCC건설 회장 / 妻 이수잔 (1970 ~ )

→→1남 정도선 (1995 ~ )

→→1녀 정다인 (1996 ~ )